일반 강좌

주역과 노자 61장 ~ 69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7-18 14:46
조회
164
저번 학기에 못 다한 노자를 마저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우쌤의 포부와는 달리 결국 학기를 넘겼네요. ㅋㅋㅋ 읽다보니 8주 안에는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마구 듭니다. 엄청 어렵네요. ^^;; 그래도 이번 한 번 읽고 나중에 또 읽고, 계속 읽다보면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1.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

 

큰 나라는 [강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겸손해야 한다. [큰 나라가 겸손하면] 천하가 찾아오고, 천하의 어머니가 된다. 암컷은 항상 그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니, 고요함()으로써 겸손을 취한다. 따라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게 겸손하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따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겸손하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겸손하여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얻고, 어떤 경우에는 겸손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받아들여진다. 큰 나라는 백성들을 아울러 기르고자 욕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우산에 들어가 섬기려고 욕망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둘 다 각기 원하고자 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큰 나라는 마땅히 겸손해야 한다.

 

61장은 60장의 내용에 이어서 큰 나라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얘기합니다.

하류(下流)는 강이 아래로 모이는 것입니다. 큰 나라에 하류(下流)라는 표현을 쓴 것은 ‘큰 나라는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교(交)는 ‘사귀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교차하다’, ‘만나다’, ‘찾아오다’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빈(牝)은 ‘암컷’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데 여기서는 ‘어머니’란 뜻의 모(母)와 통용됩니다.

천하지교, 천하지빈(天下之交, 天下之牝)은 앞에 “큰 나라가 겸손하면”이라는 내용이 생략된 것입니다.

고대국이하소국(故大國以下小國) 구절부터는 외교문제입니다. 큰 나라가 겸손한 뒤에 나타나는 취(取)는 ‘따르다’라는 뜻에서 부(附)와 통용됩니다. 반대로 작은 나라가 겸손한 뒤에 나타나는 취(取)는 ‘받아들이다’라는 뜻에서 납(納)과 통용됩니다.

고혹행이취, 혹행이취.(故或下以取, 或下而取.) 이 구절에서 혹(或)은 ‘어떤 경우’, ‘어떤 상황’을 뜻합니다. 앞에 있는 “혹행이취”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손하는 것이고, 뒤에 있는 “혹행이취”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손하는 것입니다.

겸(兼)은 ‘아우르다’라는 뜻인데,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큰 나라가 자기 역량에 맞게 작은 나라를 품는 것입니다. 우쌤은 월왕 구천이 천하를 차지한 뒤에 작은 나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을 이러한 통치의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畜은 ‘가축’이라는 의미로 보면 “축”으로 읽지만, 여기서는 ‘기르다’라는 의미에서 “휵”으로 읽습니다. 인(人)은 작은 나라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작은 나라가 입(入)한다고 할 때의 입(入)은 큰 나라의 보호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쌤은 이것을 ‘큰 나라의 우산에 들어가다’라고 표현해주셨습니다. 사(事)는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62.

道者, 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下, 置三公, 雖有拱壁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邪? 故爲天下貴.

 

()는 만물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선인(善人)의 보배고, 불선인(不善人)을 보호하는 바이다. (훌륭한 말은 팔릴 수 있고, 존경받는 행실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 사람이 불선(不善)하다고 해도,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배치하니, 비록 아름다운 옥을 받들고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앞세운다고 해도, 앉아서 도()를 말하는 것만 못하다. 옛날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닭은 무엇인가? 추구하면 얻을 수 있고, 죄가 있어도 면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된다.

 

奧는 의미에 따라 읽는 방식이 나뉩니다. “오”로 읽으면 ‘깊숙하다’라는 의미이고, “욱”으로 읽으면 ‘덮어주다’라는 의미에서 욱(燠)과 통용됩니다. 글자를 보면 옆에 불이 있으니까 그 덮어주는 방식이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왕필은 애(曖)로 풀었는데, 애정을 가지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밑에는 비음(庇蔭)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 역시 덮어주고 보살펴주는 것입니다.

선인(善人)은 각각의 책마다 얘기되는 것은 다릅니다. 『논어』에서는 선인(善人)을 옛 성현이 지나간 자취를 밟아가는 자라고 했고, 『맹자』에서는 선(善)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어쨌든 『논어』와 『맹자』 둘 다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노자에서는 약간 다릅니다. 여기서 선인(善人)은 자신이 타고난 본연의 도(道)를 잘 보존한 사람을 뜻합니다. 불선인(不善人)은 반대로 도(道)를 보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보(寶)는 ‘보배’, ‘보물’이라는 뜻인데 67장을 보면, “나에게는 간직하고 보존하는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그것을 자(慈), 검(儉),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는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누구는 보(寶)가 가리키는 것이 67장의 세 가지 보물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쉽게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보(保)는 ‘보호하다’, ‘보존하다’라는 의미로 불선인(不善人)까지도 안고 간다는 27장, 47장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미언(美言)은 ‘훌륭한 말’로 도(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市)는 ‘팔리다’는 뜻입니다.

존행(尊行)은 ‘존중받은 행동’입니다.

가인(加人)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존중받는 행동은 천 리 밖에서도 응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쌤은 불선인지소보(不善人之所保) 다음에 인지불선(人之不善)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고 하시면서 미언가이시, 존행가이가인(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이 구절을 어디에 붙여야 할지 고민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자와 삼공을 세울 때 각자 쓰이는 글자가 다른데, 천자의 경우에는 가운데에 서는 존재이기 때문에 립(立)을 쓴 것이고, 삼공 같은 경우에는 그 중심인 천자 주위에 배치되는 것이니 치(置)가 된 것입니다.

공(拱)은 ‘안다’, ‘받들다’는 뜻입니다.

벽(璧)은 완벽(完璧)하다고 할 때도 쓰이는 말로, 매우 아름다운 옥을 뜻합니다.

선사마(先駟馬)에서 사마(駟馬)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입니다. 선사마(先駟馬)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를 앞세우다’라는 뜻이고, 이것을 선어사마(先於駟馬)로 보면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보다 앞장서다’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좌(坐)는 ‘꿇어 앉다’입니다.

진(進)은 ‘아뢰다’, ‘말씀을 올리다’는 뜻입니다.

고(古)는 ‘옛날의’, ‘옛날부터’로 읽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63.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무위(無爲)를 행하고, 무사(無事)를 일삼고, 무미(無味)를 맛봐라. 어려운 일은 쉬운 일로부터 나오고 큰일은 작은 일로부터 나오니,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 어려운 일은 쉬운 일로부터 도모하고, 큰일은 미세한 일에서 만들어진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힘든 일은 반드시 작은 곳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성인은 끝까지 본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그 본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무릇 가볍게 승낙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부족하고,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운 일이 많으니, 따라서 성인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기니, 그러므로 끝내 어려움이 없다.

 

위무위, 사무사, 미무미(爲無爲, 事無事, 味無味)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 해석한 대로 “무위를 행하고, 무사를 일삼고, 무미를 맛보다”입니다. 다른 해석은 써 이(以)를 넣는 것으로 위이무미, 사이무사, 미이무미(爲以無爲, 事以無事, 味以無味)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하지만 행하지 않은 듯이 하고,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은 듯이 하고, 맛을 봐도 맛이 나지 않은 듯이 하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소다소(大小多少)도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크고, 작고, 많고, 적은 일”로 천하의 모든 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왕필은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나오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나온다”로 해석했습니다.

보원이덕(報怨以德), 노자에서 말하는 원한을 갚는 방식은 유가에서 얘기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논어』 「헌문」편 36장을 보면 누군가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공자가 그러면 덕은 어떻게 갚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한 말이 이직보원, 이덕보덕(以直報怨, 以德報德)이었습니다. 원한은 올바름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전까지 장가를 가지도 않고, 벼슬을 나가지도 않는 것이 유가의 올바름이라고 부연설명해주셨습니다. 친친(親親)의 집요함이 느껴집니다. 반면에 노자는 원한을 다르게 대합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작은 원망은 갚기에도 부족한 것이고, 큰 원망은 천하의 사람들이 도모할 것이니, 천하 사람들의 여론을 따르는 것이 덕(德)이다.”라고 했습니다.

도(圖)는 ‘도모하다’, ‘염두에 두다’라는 의미입니다.

세(細)는 ‘작다’, ‘미세하다’라는 의미에서 소(小)와 통용됐습니다. 『논어』에서는 세세한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을 세인(細人)이라고도 합니다.

작(作)은 ‘일어나다’, ‘시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대사(大事)는 ‘힘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성인이 추구하지 않는 대(大)는 본연의 목적을 말합니다. 64장의 신종여시(愼終如始)와 연결해서 말하면, 처음 시작할 때처럼 끝까지 신중하기 때문에 본연의 목적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룬다는 말은 과정을 계속해서 밟아가는 과정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경낙(輕諾)은 ‘가볍게 승낙하다’는 의미입니다.

성인이 어렵게 여기는 까닭은, 주석을 참고하면, “성인의 재능으로도, 오히려 미미하고 쉬운 일을 어렵게 여기는데, 하물며 성인이 아닌 재능으로 그것을 소홀히 하고자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64.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抱之木, 生於毫末 ; 九層之臺, 起於累土 ; 千里之行, 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 故無敗 ; 無執, 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에 대해 말해보자면,] 안정된 상태에서 지키기 쉽고, 아직 조짐이 있지 않을 상태가 도모하기 쉽고, 딱딱해지지 않은 상태가 녹이기 쉽고, 미약한 상태에서 해결하기 쉽다. 아직 일이 있지 않을 때 해결하고, 난이 일어나기 전에 다스린다. 아름드리 나무도, 매우 작은 씨에서부터 태어나고, 구층의 높은 누각도, 흙을 쌓는 것에서 일어나고, 천리의 길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의도가 있는 사람은 그 의도한 바를 실패하고, 고집하는 사람은 그 고집하는 것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성인은 의도가 없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는다. 백성들이 일을 해나가는 것은 항상 거의 이루었다가 그 일을 실패한다.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끝까지 신중하다면,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배울 수 없는 도()를 따르니,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회복하게 해준다.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도와주지, 감히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아직 일이 심각해지지 않았을 때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64장은 63장과 연결됩니다.

주석에서는 “안정된 상태에서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그것을 갖고 있어도 없어질 것을 잊지 않으니, 힘이 들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도모하니, 그렇기 때문에 「쉽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취(脆)는 ‘무르다’라는 의미로 아직 딱딱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반(泮)은 ‘녹다’라는 뜻입니다.

미(微)는 다른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미묘하다’라는 의미로 도(道)를 형용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힘을 들이지 않는 단계의 일을 말합니다.

산(散)은 ‘해결하다’라는 뜻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힘을 들이지 않고 일을 해결하는 네 가지의 말은 모두 신종(愼終)을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거기서 일이 있게 되고, 미미하다고 해서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위(爲)는 ‘삼가다’, ‘신중하다’는 의미에서 신(愼)과 통용된다고 하셨습니다.

우쌤은 위지어미유, 치지어미난(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이 구절이 63장의 도난어기이, 위대어기세(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와 의미가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는 29장에 나온 문장입니다. 위자(爲者)는 의도가 있는 사람을 말하고, 집자(執者)는 무엇을 변하지 않기를 고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 다 도(道)의 작용과 반대되는 사람들입니다.

합포지목(合抱之木)은 아름드리 나무, 매우 큰 나무입니다.

호(毫)는 아주 작은 것으로 ‘씨앗’이기도 하고 한 올의 ‘털’이기도 합니다.

대(臺)는 ‘탑’, ‘누각’입니다.

신종여시(愼終如始)는 ‘마치는 것을 처음과 같이 신중히 하라’입니다.

과(過)는 백성들의 실수,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욕불욕(慾不慾)은 직역하면 ‘불욕을 욕하다’입니다. 이것과 같이 나오는 것이 학불학(學不學)인데, 앞의 학(學)은 ‘배우다’보다는 ‘행하다’, ‘따르다’로 보는 게 정확합니다. 불학(不學)은 ‘배울 수 없는 것’, 즉 도(道)입니다. 욕불욕(慾不慾)과 학불학(學不學) 둘 다 도(道)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보(輔)는 성인이 백성들이 어리석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다’라는 뜻입니다. 우쌤은 보(輔)가 노자의 정치성을 엿볼 수 있는 단어라고 하셨습니다.

 

65.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 亦稽式, 常知稽式, 是謂玄德. 玄德深矣, 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옛날 도()를 잘 행한 사람은, 백성을 교활하게 만들지 않고, 그 타고난 본성을 지키게 했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교활한 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활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재앙이고, 교활함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자연의 이치와 같아지는 것이다. 항상 그 자연의 이치와 같아지는 것을 아는 것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현덕(玄德)은 깊고도, 오래되었으니, 만물과 반대되는 것 같지만, 그러한 뒤에 이내 도()의 근원에 이르게 된다.

 

“옛날 도(道)를 잘 행한 사람”을 여기서는 고지선위도자(古之善爲道者)로 표현했는데, 15장에서는 고지선위사자(古之善爲士者)라고 표현했습니다.

“백성을 명(明)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노자에서 가장 크게 오해되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明)은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독선적인 앎과 남을 속이는 기술이 많아져서 본성을 해치는 경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우(愚)는 마치 어리석은 것과 같은 모양으로 지혜를 없애고 본성을 지켜서 타고난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민지난치(民之難治) 다음에 나오는 이(以)는 ‘~하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적(賊)은 ‘해치다’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나라의 ‘재앙’으로 쓰였습니다.

계식(稽式)에서 계(稽)는 ‘같다’라는 의미에서 동(同)과 통용됩니다. 식(式)은 ‘법칙’으로 여기서는 자연의 이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계식(稽式)은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 ‘자연의 이치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주석에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같은 것인즉 폐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노자의 도(道)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 운동했다는 점에서 14장의 집고지도, 이어금지유(執古之道, 以御今之有.)와 통하는 것 같습니다.

현(玄)은 분별하는 인간의 감각작용을 뛰어넘은 도(道)를 형용한 글자입니다. 따라서 현덕(玄德)은 도(道)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것에 맞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원(遠)은 ‘멀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 ‘아득하다’, ‘오래되다’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반(反)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반대되다’로 만물이 욕망하는 것과 상충되게 작용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돌아가다’로 만물과 함께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도(道)의 작용을 표현한 것입니다.

대순(大順)은 도(道)의 근원으로 우쌤은 이를 근(根)으로 표현해주셨습니다.

 

66.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是以欲上民, 必以言下之 ; 欲先民, 必以身後之.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강과 바다에 많은 계곡이 모여드는 것은, 겸손하기를 잘하기 때문이니, 많은 계곡이 모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의 윗자리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명령이 겸손해야 하고, 백성보다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몸으로 뒤따라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백성들은 [떠받드는 것을] 무겁게 느끼지 않고, 앞에 있지만 백성들을 해치지 않으니, 그러므로 천하가 즐겁게 추대하고 싫증내지 않는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66장에 왕필은 주석을 달지 않았습니다. 왜 안 달았을까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어쨌든 왕필의 생각을 알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백곡(百谷)은 ‘많은 계곡’입니다.

왕(王)은 계곡의 왕으로 강과 바다를 가리키는 것일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왕을 ‘물을 대다’라는 의미에서 주(注)로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계곡이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까닭”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는 “아래에 처하는 것을 잘하기 때문이다”로 60장, 61장과 내용이 통합니다.

언(言)은 ‘정치적 명령’, ‘법령’입니다.

부중(不重)은 백성들이 성인의 다스림에 대해 ‘무거워하지 않는다’,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추(推)는 ‘추대하다’라는 뜻입니다.

厭 이 글자는 ‘싫증나다’로 보면 “염”으로 읽지만 ‘누르다’로 보면 “엽”으로 읽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지 싫어하지 않는다.”로 볼 수 있고, 앞에 나온 부중(不重)과 연결해서 보면 “백성들이 그를 추대해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필이 주를 달지 않아서 어떻게 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67.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 久矣其細也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 故能勇 ; , 故能廣 ;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 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천하 백성이 말하길 나의 도()는 거대하여, 세상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것 같다. 너무 거대하여 세상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것 같다.[어떤 것과도 닮지 않아서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무엇을 닮았다면, 별 볼일 없어진 지 오래됐을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원칙이 있으니, 그것을 간직하고 보존한다. 첫째는 자애()이고, 둘째는 검소함()이고, 셋째는 함부로 천하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애()롭기 때문에 용맹할 수 있고, 검소()하기 때문에 널리 나눌 수 있고, 천하에 함부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제도를 만들어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자애()를 버리고 용맹하기만 하고, 뒤를 버리고 앞만 취하니, 죽을 것이다! 무릇 자()로써 전쟁하면 이기니, 그것을 지킨즉 견고해진다. 하늘은 장차 그것을 구하고, ()로써 지켜준다.

 

대(大)는 장자 「소요유」의 무용지용(無用之用)과 연결됩니다.

초(肖)는 ‘닮다’라는 뜻입니다.

부유대, 고사불초(夫唯大, 故似不肖)를 그대로 해석하면 “너무 커서 어떤 것도 닮지 않은 것 같다.”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면 앞의 문장과 반복이 됩니다. 백서본에는 부유불초, 고능대(夫唯不肖, 故能大.)라고 돼있습니다. 해석하면,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크다고 할 수 있다.”가 됩니다. 우쌤은 이 부분은 백서본을 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세(細)는 63장에서과 비슷하게 ‘별 볼일 없는 일’로 해석됐습니다.

사전에서는 자(慈)를 키우는 것(玆)과 마음(心)을 합쳐서 ‘키우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자(慈)를 ‘상대방이 아무리 미워도 자꾸 마음을 내는 것’이라고 풀어주셨습니다.

선(先)은 ‘앞장서다’, ‘잘난 척하다’입니다.

검(儉)과 광(廣)은 주석을 보면, “절약하고 검소하여 마음을 쓰니, 천하가 텅 비지 않고, 따라서 넉넉히 나눌 수 있다.”라고 돼있습니다. 여기서 검(儉)은 ‘아끼다’고, 광(廣)은 검(儉)하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기장(成器長)은 성기(成器)와 장(長)으로 나눠서 봐야 합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성기(成器)를 세워 천하를 이롭게 하니, 물(物)의 장(長)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기(成器)를 세운다는 것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고, 장(長)은 28장의 성인이 만드는 현실정치 시스템인 관장(官長)을 말합니다.

사A차B(舍A且B) 구절은 차를 ‘또’로 보는지 아니면 ‘취하다’로 보는지에 따라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로 보면, “A를 버리고 B하다”이고, ‘취하다’로 보면, “A를 버리고 B를 취하다”입니다.

 

68.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古之極.

 

잘 싸우는 장수는 용맹을 드러내지 않고,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고, 싸움에서 잘 이기는 사람은 다투지 않고, 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자신을 낮춘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를 일러 사람을 쓰는 능력이라 하고, 이를 일러 하늘의 짝이라 하고 옛날부터 있어왔던 지극한 극이라 한다.

 

사(士)는 ‘장수’를 말합니다.

무(武)는 ‘용맹하다’, ‘용맹을 뽐내다’라는 뜻입니다.

용인(用人)을 ‘다른 사람을 쓰는 것’을 뜻합니다.

용인지력(用人之力)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쓰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힘을 쓰다’입니다. 왕필은 ‘다른 사람을 쓰는 능력’으로 봤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사람을 써도 겸손하지 않으면, 그 힘을 이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른 사람의 힘을 쓰다’로 많이 해석한다고 합니다.

배(配)는 ‘짝하다’라는 뜻인데, 주도적으로 이끄는 짝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쌤은 도(道)의 작용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극(極)은 식(式)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옛날부터 변치 않은 자연의 이치, 도(道)를 가리킵니다.

 

69.

用兵有言 : 吾不敢爲主而爲客, 不敢進寸而退尺.是謂行無行, 攘無臂, 扔無敵, 執無兵. 禍莫大於輕敵, 輕敵幾喪吾寶. 故抗兵相加, 哀者勝矣.

 

병사를 쓰는 데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감히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고 방어하는 사람이고, 한 마디도 나아가지 않고 한 척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를 일러 행군하되 행군하지 않은 것처럼 하고, 팔을 걷어붙이되 공격하지 않고, 적을 공격하되 적이 없는 것처럼 하고, 병기를 잡지만 무기가 없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적을 얕보는 것보다 큰 화는 없고, 적을 얕보면 거의 [가지고 있는] 나의 보물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대등한 군대가 서로 싸우면, 슬퍼하는 쪽이 이긴다.

 

주객(主客)은 주인과 손님이 아니라 ‘공격하는 군대’와 ‘수비하는 군대’를 말합니다.

촌(寸)과 척(尺)은 거리를 재는 단위를 말합니다.

행무행(行無行)부터 집무병(執無兵)까지는 63장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행(無行)을 행하다”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이무행(行而無行)으로 “행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로 보는 것입니다.

양(攘)은 ‘훔치다’, ‘물리치다’의 뜻이 있지만 38장처럼 ‘소매를 걷어붙이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왕필은 보(寶)를 64장에 나온 삼보(三寶)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지만, 우쌤은 62장의 선인(善人)이 지니고 있는 보(寶), 생명력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항(抗)은 ‘대등하다’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애(哀)는 ‘슬프다’, ‘연민’을 뜻하는데 67장과 연결하면 자(慈)로 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보원이덕(報怨以德)과 신종여시(愼終如始)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유가에서도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원한은 올바름으로 갚아야 한다고 해서 좀 놀랐습니다. 반면에 노자는 오직 자연의 이치만을 따를 뿐이지 개체의 올바름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는 불인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을 본받아 살아간다면 그건 개체의 삶보다는 어떤 거대한 흐름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르는 삶이 개체의 윤리를 낳게 되는 지점.....일까요....? 어렵네요.......

신종여시(愼終如始)는 제가 새겨둬야 하는 말입니다. 항상 공부해서 어떤 목표, 상태에 이르려고 하지만 사실 할 수 있는 것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하나 밟아가는 과정밖에는 없습니다. 아름드리 나무나 구층의 높은 누각에 대한 망상을 버려야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동사서독 에세이 발표가 있어서 휴강입니다. 모두들 다음 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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