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012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10-07 17:23
조회
692
이번 학기 <에티카> 첫번째 수업 어떠셨나요? 역시 쉽지 않죠~ ^^; 1부와 2부를 떠올리며 에티카를 읽는 데에도 버퍼링이 걸리는데다 데카르트도 만만치가 않았네요.
덕분에 토론 시간은 토론이기보다는 질문과 설명들이 좀 많았던 것 같은데, 차차 익숙해지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완수쌤 말씀대로 이번 학기는 화엄경과  에티카를 격주로 읽는 관계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두 주나 있는 셈. 예습복습 열심히 해봅시다^^

데카르트. 연구실에서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조금 경시하게 되는 3인방이 있죠. 데카르트/헤겔/칸트.
그런데 채운쌤 왈, 데카르트가 그렇게 만만하고 고만고만한 철학자였으면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영향권 아래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책을 읽어보니 네, 역시 그렇구나 하고 조금은 생각하게 됩니다.

채운쌤은 데카르트의 혁명성에서 시작하셨죠.
지난 날 스콜라 철학에서 정념은 어떻게 사유되었는가?
종교의 영역에서 접근한 당대의 학자들에게 있어 인간의 정념은 선악 간의 싸움의 문제로 국한됩니다.
그러니 실상 인간의 정념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신과 믿음의 문제를 둘러싼 연구들인 셈.
데카르트는 이와는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정념 문제에 접근합니다.
일단 정념 문제가 중요한 이유부터 스콜라 철학과 단절점을 이루죠. 정념을 논하는 까닭은 신이 아니라 인간을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지각하고 욕망하고 행위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해서 보다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등에 답하기 위해 정념을 키워드로 잡은 거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념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전제, '실체 이원론' 및 '심신연합설'을 이해해야 합니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에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근본으로서의 실체는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사유, 다른 하나는 연장.
그러니까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 이 둘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경우는 물론 정신, 그리고 신체죠.
영혼과 신체의 연합, 바로 이것이 정념 탄생의 이유랍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영혼은 수동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영혼의 능동을 '의지'라 이름하고, 수동을 '정념'이라 이름하지요. 능동이라는 의미 그대로 의지는 영혼 자체에 내재한 활동이지만, 정념은 신체 즉 동물정기의 운동에 따라 생산되어 영혼을 동요케 합니다.
강한 영혼은 의지를 통해 정념을 복종시키지만 약한 영혼은 의지가 정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죠.
물론 데카르트가 모든 정념을 부정하고 오직 의지만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정념이야말로 삶을 도덕적인 삶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죠. 이 부분은 앞으로 차차 설명될 듯...

자, 이에 대해 스피토자는 3부 서론에서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군요.
"그[데카르트]도 역시 정신이 자기의 활동에 대하여 절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는 했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것의 제1원인에 의해 설명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감정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제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성을 보여줬을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 마디로 꽤 혁명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하다는  말인데요.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보기에 제1원인 같은 건 없을뿐더러 감정에 대해 정신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는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기 때문이지요.
데카르트는 실체이원론을 주장하지만 결국 정의를 위배하면서까지 정신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을 실체가 아니라 신의 '속성'들 중 알려진 두 가지라 간주하고, 이 두 개의 속성이 서로 평행하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죠. 언뜻 보면 이상합니다. 이원론에 반대하면서 평행론을 주장한다니 말이에요. 한 번 봅시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 사이에 그 어떤 위계나 인과를 설정하길 거부합니다.
차라리 둘의 관계는 동시적인데, 하나의 마주침에 대해 정신은 정신의 질서대로 그리고 신체는 신체의 질서대로 운동한다는 거죠.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을 때 신체가 받는 자극과, 정신이 '아파' '오늘 운 나쁘네' '왜 저 자리에 저런 게 있지'라고 생각하는 건 동시적이라는.
스피노자 체계 안에서 정신은 결코 외부 대상을 객관적으로 표상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동시적으로 자극받아 변용된 신체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따름이죠. 그러므로 데카르트 식의  소위 정신의 우월성은 사라지게됩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감각/감정을 다스려 올바른 길로 가려는 정신?  오, 그건 정말 아니라는군요.

하지만 이에 대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대체 매순간 수많은 감정을 생산하고 거기 휩쓸려 사는 우리는 어떻게 보다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거지?
채운쌤 말씀으로는 스피노자 윤리학의 핵심은 어떻게 보다 능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에 있답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컨트롤하거나 자유롭게 발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감정들에 어떻게 고착되지 않을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을지.
이에 대해서는... 우리 에티카를 읽으며 차차 더 생각해보기로 해요 ^^ 이제 막 시작했으니 너무 조바심 갖지 말고 대신 차근차근~

============================================
다음 시간 공지
읽을 책: <화엄경> 26권(십회향품4)~33권(십회향품11) - 전원 공통과제 써오는 거 잊지 마세요
간식: 만두쌤

모두들 다음 주에 만나요~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