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1.16수업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1-21 12:01
조회
366
또 늦고 말았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홉 번째 고원 <1933년-미시정치와 절편성>을 읽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정치란 무엇일까요? 적어도 들뢰즈·가타리에게 정치를 한다는 것(?) 혹은 정치적으로 된다는 것은 ‘정치적 영역’이라고 범주화된 어떤 단위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획득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진보, 보수, 특정 계파의 문제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 ‘현실 정치’라고 범주화된 영역의 담론을 체득하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정치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정치는 감수성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라는 영역에 대한 관심, 무관심이 아니라 어떤 일에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감수성이 반응하는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타리는 자주 ‘나는 매번 어디에 주파수를 맞추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파수라는 말이 참 독특한 것 같습니다. 가타리는 의식적인 정치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이 맞추고 있는 주파수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자 했던 것이겠죠.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들이 제시하는 것이 바로 ‘미시정치’입니다. 미시정치는 정치적 판단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시정치는 거시정치와 구분되어 다른 정치적 영역을 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이 말하는 미시정치는 모든 영역에 걸쳐 있는 욕망과 감수성의 문제입니다. 이들이 미시정치를 말하기 위해 가져온 개념이 바로 ‘절편성’이죠. 바로 앞의 8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선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9번째 고원에서는 절단된 선, 절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채운쌤은 절편을 선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선분의 특징은 바로 절단입니다. 이들은 선분을 말하며 어떻게 국가장치 안에서, 권력 안에서 선이 절단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왜 생소한 절편 개념을 정치에 도입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혁명에 대한 이들의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의식적이고 이념적인 거시 정치의 영역으로는, 집합화하고 총체화하는 정치 개념으로는 혁명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본인이 겪은 68혁명을 ‘때 아닌 것’이라고 규정했다고 합니다. 혁명은 역사적 흐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이탈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니체가 말한 역사적 생성, 비역사적 운무가 여기에 해당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사건화하는 비역사적 운무인 혁명을 거시 정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혁명에 어떤 이념적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 자체로 코드를 벗어나는 운동인 혁명을 다시 코드화하는 일일 뿐일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은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특정한 계급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 정치는 “존재를 그렇게 존재하게끔 하는 조건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로부터 다른 사유의 선과 삶의 노하우를 발명하는 것”(채운쌤 강의안 인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혁명은 특정한 이념이나 계급과 관련해서만 이야기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광장이나 거리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이들에게 혁명은 나름의 방식으로 도주선을 발명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선들과 접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들에게 정치, 혁명은 곧바로 삶의 문제이며 윤리의 문제입니다.

다시 절편 얘기로 돌아와 볼까요. 8장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존재를 선으로 규정했습니다. 흐름으로 존재하는 선, 그 선의 운동이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은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 됩니다. 절편화는 다르게 설명하자면 주체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 단체, 직장, 집단 등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됩니다. 커다란 통나무를 여러 방향에서 미세하게 깎아낼수록 더욱 구체적이고 견고한 조각이 탄생하는 것처럼 흘러가는 선은 절단됨에 따라 견고한 주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국가는 그 자체로 나름의 절편성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절편성들을 공명시키는 ‘공명상자’로 기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편성은 3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커플화(이항화)를 통해 작동되는 견고한 절편성과, 분자적인 운동으로 규정되는 유연한 절편성, 그리고 도주선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하지 않는 절편성(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세 층위의 절편성은 항상 동시에 작동하면서 국가를 이루고 주체화를 작동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도주선이 일차적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절편화는 동시에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흐름들과 함께 정의됩니다. “권력의 중심들은 그 영향이 미치는 지대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벗어나는 것 또는 그것의 무력함에 의해 훨씬 더 많이 규정되는 것이다.” 원시국가는 전제군주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얼굴을 빼앗긴 자, 쫓겨난 수형자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도주선이야말로 일차적이라는 점은 도주선의 양가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견고한 영토성도 도주선 위에 설립되어 있다는 것. 꼰대취급 당하는 지금의 기성세대들도 독재에 항거하고 학생운동을 하며 이전의 영토로부터 도주했던 세대라는 것,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도주선의 위험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것의 가장 명확하고 극단적인 예가 바로 파시즘이겠죠. 나치의 파시즘은 전체주의와 접속했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파시즘을 전체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파시즘은 하나의 주의(-ism)이 아닙니다. 파시즘이 보여주는 것은 영토성이 아니라 도주선의 위험성입니다. 채운쌤은 파시즘을 동일화하려는 의지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파시즘은 일종의 암적인 몸체로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자기화하며 작동합니다. 파시즘은 동일화와 배제의 논리를 동시에 작동시킵니다. 가령 백인우월주의라는 형태로 드러난 파시즘의 경우 ‘백인처럼 되어야 한다’라는 동일화의 논리(검은구멍?)와 동일화 되려고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오라는 배제의 논리(흰 벽?)가 동시에 작동합니다.

아무튼 들뢰즈·가타리는 이 장에서도 또 한 번 도주선은 언제나 파시즘과 접속할 수 있으며 가장 견고한 재영토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신중함이 또 한 번 강조됩니다. 물론 이때의 신중함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도주를 지속할 수 있는 역량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카스타네다가 배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빌려와 도주선을 그리려고 할 때 빠질 수 있는 위험성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위험성들에 대한 지적은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가지 위험성을 정리하면서 후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포. 여기서의 공포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것들을 잃는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기 부정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절편성은 우리의 예속인 동시에 권력이라는 점입니다. 견고한 절편성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우선은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2. 명확함. 명확함은 배움이 너무 확실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혁명집단이 혁명에 성공한 뒤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경우가 바로 명확함에 해당될 것입니다. 채운쌤은 공중파로부터 도주한 팟캐스트 방송들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확신이 이러한 명확함의 문제를 보여준다고 하셨습니다. 3. 권력(힘). 이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명확해진 것을 견고하게 만들고자하는 욕망입니다. 자신의 새로운 영토를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겠지요. 4. 죽음. 이것은 파시즘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채운쌤은 이것을 니체가 말하는 무에의 의지와 같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기 보다는 무를 욕망한다는 것. 도주선을 그리는 일은 몹시 번거로운 일일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시 고민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이 될 테니까요. 죽음은 그러한 자질구레한 문제들로부터 떠나고자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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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24 04:55
    자기부정의 두려움에 눈길이 끌리네요. 근데 그 작용은 의식적으로 일어난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왜 제 글은 깨지는 지점이 없을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