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우공이산] '강함'과 '약함'을 다시 생각하기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1-07 18:27
조회
399
 

‘강함’과 ‘약함’을 다시 생각하기


글 / 희진(절탁NY)



  1. 강한 상태를 원하는 약자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긴다. 먼저 나는 게으르고 자제력이 부족하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한번 늘어지면 하루 종일 누워있고 유튜브를 보다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결국 마지못해하기 일쑤였다. 둘째, 체력적으로 약하다고 느낀다. 어렸을 때부터 아파보인다거나 약해보인다거나 피곤해 보인다거나 하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계속 들어서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느껴서인지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걱정이 많아서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일, 주로 나쁘다고 여기는 일이 생기면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불안해한다. 대부분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그 상황을 대비해 무엇을 하는 것은 없다. 단지 마음의 준비를 하면 실제로 그 일이 닥쳤을 때 덜 힘들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그렇게 심하게 상상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오지 않는다는 이상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있다. 넷째, 스스로 인생 경험이 적다고 생각한다. 부유하지 않지만 안정적인 가정에서 공부만 했고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대학을 다녔고 이후 쉽게 직장을 구해서 다녔다. 가끔은 내가 온실 안의 화초 같다고 여긴다. 그래서 불행한 상황이 닥치면 내가 과연 잘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내가 ‘약함’을 어떻게 여기는지 보여준다. 다시 정리하면, 자제력이 부족하고, 겁이 많고 불안해하고, 인생 경험이 많지 않아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집약하면 ‘불행한 상황이 오면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함, 주위에 의존함’이 내가 생각하는 약함이다.

자신을 약한 존재로, 결여된 존재로 여기니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다. 내게 강함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나열한 약한 상태와 반대일 것이다. 일단 체력이 강한 사람이다. 체력이 강하지 않아도 불행한 상황이 오면 극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함은 일단 체력이 강한 자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을 잘 통제하는 사람, 스스로 세운 계획을 잘 실천해나가는 사람, 여러 가지 힘든 경험을 통해 어떤 불행한 상황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약함과 강함에 대한 이러한 나의 인식이 일상에서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약함을 극복하고 강해지기 위해서 시간을 쪼개어 해야 할 계획들을 세우고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간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지금 하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또는 직장을 그만 둬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하거나 관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스스로 세운 계획들을 지키며 규칙적으로 사는 게 나태해지고 싶은 욕망을 이기고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살아가는데도 내가 강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약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요즘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한정된 시간에 해야 할 것이 많으니 마음이 늘 조급하고 답답하다. 어쩌다 딴 짓을 하느라 계획한 대로 하루일과를 보내지 않으면 ‘역시 난 약한 인간이야’라고 자책한다. 최근 가벼운 접촉사고로 온갖 걱정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나 괜찮은 거냐고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해야 할 일’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직장 일은 생계를 위해 한다손 치더라도 저녁이나 주말에 내가 하는 일들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다. 내가 원해서, 강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건데 왜 정서는 조급함, 답답함, 불안과 같이 무거운가?

“‘출신이 좋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먼저 적을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경우에 따라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설득하거나 기만할(원한을 지닌 모든 사람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필요가 없었다. 그와 같이 그들은 힘이 가득 넘쳐나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인 인간으로, 행복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활동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행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도덕의 계보, 369쪽)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자, 강한 자는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행복하다는 느낌은 기쁨, 가벼움과 비슷한 정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왜 답답함, 불안과 같은 무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내가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설득하기 위해서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 강함을 원하고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약함을 원한다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강함’은 나의 의지로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인가. 아니, 강함이라는 상태가 과연 있는 것일까. 「도덕의 계보」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강함과 약함을 하나씩 되물어보고자 한다.

 

2. 나의 자제력’과 니체의 강함

내가 말하는 자제력이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다른 것을 하고 싶을 때, 이러한 욕망을 참고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힘을 말한다. 요즘 내 자제력을 실험하게 만드는 것은 주로 니체 공부이다. 니체 공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집안일을 할 게 없나 하고 몸부터 의자에서 일어난다. 이래저래 딴 짓을 하느라 공부를 미루기도 하고 숙제를 하기 싫어서 그냥 일찍 자버리기도 한다. 이런 나를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해버리고 있다. 스스로를 통제할 힘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약함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글을 써보려고 책을 보다가 딴 생각을 하더라도 일단 책상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하루에 30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숙제를 하려고 하고 실패와 다짐과 실천을 반복하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노력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니체가 말한 ‘주권적 개인’인가? 니체는 주권적 개인을 ‘약속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오래된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 강한 자,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 존경하며, 불행한 일이 있음에도 자신의 말을 ‘운명에 대항하여’ 지킬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약속할 수 없으면서 약속하는 허약체질의 경솔한 인간에게는 발길질을 해댈 것이라고 말한다. 주권적 개인은 자기 안에서 육화된 것에 대해 자부하는 의식을 갖고 있고 자기 자신을 긍지를 가지고 보증한다. 즉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397~399쪽) 나는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을 통제하는 힘, 즉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를 니체가 말한 주권적 개인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킴으로써 주권적 개인과 같이 강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권적 개인이 스스로를 강하다고 여기며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반면 나는 왜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길까. 글쓰기 과제는 규문이라는 공동체가 나에게 내린 명령(?)이고 내가 그것을 따르기로 해서 규문수업에 등록한 것이다. 즉 글쓰기 과제는 내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있지 않는 시간은 물론이고 글을 쓰는 동안에도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할까. 직장을 다니면서 이걸 하는 것은 무리야. 이 짧은 시간 동안 뭘 하겠어.’라는 조급함, 불안함, 포기의 심정이 나를 수시로 지배한다. 이러한 반응적 힘의지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분명히 나는 나를 변형시키고 싶은 욕망에서 규문 공부를 시작했다. ‘나를 변형시킨다.’는 것도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사고틀에서 느끼는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정말 나를 변형시키고 싶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짧은 시간에 글을 잘 쓸 수 없다고 쉽게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글을 잘 써서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는 나는 이것밖에 안된다고 자신의 역량에 한계를 지음으로써 그리고 직장 때문이라고 환경 탓을 하면서 글을 쓰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피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게 작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력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약자가 ‘좋음’을 만드는 방식이다. “우리 약자는 어차피 약하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니와, 이것이 좋은 것이다.” (같은 책, 378쪽) 약자의 약함 자체가 그의 본질임에도 마치 선택된 것인 양 미덕이 된다. (같은 책 379쪽) 적어도 나는 나의 약함을 미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니 강함을 바라는 것일 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강함, 즉 내식대로 말하면 글쓰기 싫은 마음을 극복하고 글쓰기 과제를 완수하는 것을 ‘좋음’으로 여긴다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리고 글을 쓰기 싫어 미루고 미루다가 급하게 쓰다가 만다. 나는 나의 약함 –글쓰기를 미루는 것, 사유를 회피하는 것–을 자신의 역량 탓, 환경 탓이라고 하면서 고수하고 있다. 이것이 약자가 선을 만드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어차피 약해’라고 하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약함을 선함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지금은 글쓰기 말고 다른 것을 해야겠어. 지금은 이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강함을 원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약함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글쓰기의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서 약함을 고수하고 있고 약함을 미흡한 글쓰기 과제의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나는 기존의 상태에 머무르려 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도달하고 싶은 강한 사람은 내가 약하다는 결핍의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약자가 이상을 제조하는 방식이 아닌가? 그런데 약자는 행위가 아닌 상상으로 이상을 만드는 반면 나는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한다. 문제는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충동이 어떤 힘의지에서 비롯된 것인가이다. 글쓰기 과제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 신경 쓰여 잘 쓰려고 하거나 대충이라도 써서 제출하려고 했을 때 글쓰기로부터 나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약속을 지키려는 행위가 반응적 힘의지로부터 출발할 때 자신을 긍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강한 사람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이들 약자들 -그들 역시 언젠가는 강자가 되고자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언젠가는 그들의 ‘나라’ 역시 도래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그들 사이에서 단지 ‘신의 나라’라고 불린다.”(383쪽) 약자의 이상은 현실에서 스스로를 강하다고 느끼게 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삶을 고통스럽다고 여기고 그 고통을 신의 나라가 언젠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위로삼아 견딜 뿐이다. 그들의 이상은 그들을 무력한 존재로 둔다. 나 역시 내 노력이 ‘언젠가는’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기니 영원히 약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이 약자가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과 어쩐지 비슷한 것 같다. 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참아가면서 지금 해야 할 것을 한다는 게 말이다. 다른 것을 하고 싶은데 그것을 억누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삶을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제력에 대한 나의 인식부터 점검해 봐야할 것 같다.

니체에 따르면 나는 여러 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장이고 내가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 행위를 추동한 힘이 다른 힘들과의 투쟁 속에서 승리한 결과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하고 싶은 무엇을 참고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충동이 가장 컸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른 욕망을 참고 지금 하는 일을 억지로 한다는 식의 자제력의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제력이란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동하는 힘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자제력을 기존 방식대로 생각하는 한 나는 반동적 힘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지금 저걸 하고 싶지만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 한다는 인식, 즉 지금 하는 행위의 욕망을 부정하는 한 자신과 삶에 늘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글을 쓴다고 하지만 자신의 힘이 확장되기보다는 자신이 왜소해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점검해보아야 할 것은 ‘강함’에 대한 나의 인식이다. 나는 강함을 ‘강한 상태’로 여기는 것 같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내가 생각하는 강한 상태란 약속을 지키고 계획을 실천해나가는 상태, 불행한 상황이 오더라도 잘 극복해나가는 상태이다. 어떤 상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지속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지속되는 상태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수많은 힘들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계속 변화하는 순간만이 있는 세계에서 하나의 지속되는 상태란 있을 수 없다. 나 또한 힘들의 장이고 따라서 늘 변화하므로 강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강한 순간 그리고 약한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내가 활동하는 순간 긍정적 힘의지를 발휘하느냐 부정적 힘의지를 발휘하느냐의 문제이다. 강자란 강한 상태를 바라는 자가 아니다. 그냥 활동할 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약속을 지키는 강한 상태를 바라는 것. 오히려 내가 봐야 할 것은 그것을 바라는 욕망인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바라는 강한 상태란 약속을 지키느냐 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늘 힘이 고양되어 있는 어떤 상태를 그리는 것 같다. 언제나 자책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특정 감정, 정서만을 느끼는 상태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단 1분간만 가만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살펴보더라도 뭔가 먹고 싶다는 배고픔,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에 과거의 기억이 겹치면서 동반되는 미소, 그리고 다음 주에 해야 할 어떤 일이 떠오르면서 느껴지는 무거움 등과 같이 감정, 느낌은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고정된 상태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우울함, 불쾌함으로부터 벗어나 한 순간도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바라는 충동이 그러한 상태가 있다고 전제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강한 상태를 바란다는 것은 어떠한 우울함, 고통도 느끼고 싶지 않은 약함에서 나온 것이다.



 3. 강한 체력에 대한 갈망과 그 이면의 죄책감

나는 체력이 약해서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한다. 남들과 비교해서 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쉽게 피곤해하는 것 같고 늘 피로하다고 느껴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체력이 니체가 말하는 강함과 약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가 말하는 강함에 관한 부분을 찾아보자. 니체는 귀족적 가치 등식을 “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으로 표현한다.(363쪽) 강함은 좋음, 고귀함, 아름다움 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여기에서 체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찾아보자. 강함과 맥락을 같이 하는 고귀함은 성실함과 연결되며 이때 성실한 자는 현실성을 지닌 자, 실질적인 자, 진실한 자와 같이 낯선 방식으로 정의된다.(358쪽) 또한 고귀한 가치평가방식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함이며 자신에게 더 감사하고 더 환호하는 긍정을 말한다.(367쪽) 이에 따르면 강함은 행동과 태도, 정서와 관련한 문제이지 체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인다.

니체는 강자를 건강한 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건강하다는 것이 체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성직자적 귀족주의와 그곳을 지배하며 행동을 기피하고 부분적으로는 침울하고, 부분적으로는 감정을 폭발하는 습관 속에는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러한 습관의 결과로 어느 시대의 성직자에게도 거의 피할 수 없이 붙어 있는 내장질환과 신경쇠약증이 나타난다.”(360쪽) 니체에게 건강하지 않음이란 행동을 하지 않음, 침울, 감정의 폭발과 같은 것이며 건강함이란 이와 대립되는 상태일 것이다. 그에게 병은 건강하지 않은 습관의 결과이지 병이 있다고 해서 체력이 약하다고 할 수 없다. 즉 건강함 역시 행동, 충동, 정서에 관한 문제이다. 니체는 병든 자의 징후인 깊은 우울, 납덩이 같은 피로, 암담한 슬픔을 ‘생리적 장애 감정’이라고 부른다.(497쪽) 이것 역시 신체와 정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할 뿐 체력의 약함이 건강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체력이 강하더라도 우울함, 피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병들어 있음이다.

체력이 니체가 말하는 강함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체력의 강함을 욕망한다. 이 충동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가 체력이 약한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은 일상의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늘 피로감을 느낀다. 뭔가를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고 헛헛한 느낌이 들어서 할 일들을 찾아서 만든다. 그런데 무엇을 하지 않는 게 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을까?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오랫동안 지배해오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내내 학기 중 뿐 아니라 방학인 때에도, 직장을 다니고부터는 주말에도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했다.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는 것이 무엇일까. 학생 때에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그리고 취업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자기 계발을 위해 뭔가를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지금도 여전히 시간을 허투루 보내선 안 될 것 같다.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열심히 하거나 적어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위해’라는 목적을 동반한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나에게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어렸을 적에는 ‘빈곤이 없는 세상’ 등을 꿈꾸며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거쳐 좋은 직장 -비교적 이름이 난 비영리단체 등– 에 들어가서 중요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곳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빈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갈 필요가 없다.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할 수 있는 방식과 통로는 매우 다양하다. 그때에도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모두 작동했던 것이고, 상충되는 듯이 보이는 충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나의 의식이 그렇게 인과관계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대학과 직장은 안정적 삶을 구축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지금은 글쎄 특별히 열심히 노력해서 달성해야 할 목적이 없어 보인다. 나는 생협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생협 역시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나는 생협이 지향하는 가치(건강한 먹거리, 친환경농산물 확산 등)를 좋다고 여긴다. 그래서 일하면서 돈을 버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냥 그 정도다. 야근을 하면서까지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나에게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일하는 시간 외에도 생산적인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산적인 것은 운동이 될 수도 있고, 무엇을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생산적이란 나에게 도움이 됨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왜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이 동반될까? 왜 생산적인 것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면 죄책감이 들까?

먼저 죄책감의 기원을 니체를 통해 따라가 보자. 죄책감은 자유의 본능을 지닌 인간이 사회와 평화라는 구속에 갇히면서 생겨났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431쪽) 국가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간을 길들이고 통치해왔다. 그리고 이 양심의 가책은 무엇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무리들을 지배하는 데에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고통 받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그의 왕국이며, 그의 본능은 그에게 이 지배를 지시하고, 이와 같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가장 특이한 기교, 자신의 대가다운 실력, 자기 나름의 행복을 갖게 된다.”(491쪽) 고통 받는 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갈망에서 원한 감정을 갖게 되고 성직자는 이러한 원한 감정을 고통 받는 자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죄인이 된 인간은 ‘길들여진’, ‘약화된’, ‘용기를 잃은’ 자이며, 죄책감은 병자를 더 병들게 만든다.(513쪽)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병자는 성직자와 그가 제시하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내가 가지는 죄책감을 이러한 관점, 즉 죄책감이 사회가 그 구성원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생산성을 요구한다. 내가 일하는 협동조합도 직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얼마 전부터 연봉제를 논의하고 있다. ‘협동’조합이지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성을 더욱 높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협동보다 경쟁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협동조합에서 협동은 조합원의 조직화된 힘을 말하지 직원의 협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협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변화라 좀 비꼬고 싶었다.^^) 생산성이란 시간 대비 그리고 비용 대비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치가 여가시간에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여가시간도 생산적인 일로 채우려고 한다. 편안히 쉬지를 못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선 일할 때 생산성을 최대로 내기 위해 쉴 때는 제대로 쉬라고 말하고 있는 않은가? 문제는 그 쉼과 여가시간도 시장영역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좀 뜸하지만 퇴근시간 지하철역에서 요가, 마사지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종종 받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가시간에도 무엇을 계속 하는 게 필요하다고, 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그러지 않았을 때 죄책감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자에게 생산성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 아이 아닐까.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자본주의사회가 나를 효과적인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뭔가 미진하다.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고 싶은 충동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좀 더 살펴보자. 내가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내가 그것을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병자들이 죄책감으로 고통을 완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죄책감으로 무엇을 보상받고자 하는 것인가? 죄책감을 통해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한다는 생각을 고수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병자들이 고통의 원인을 보려하지 않고 고통이 완화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한다는 생각은 어떤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내가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고자 한 것은 안락한 삶을 욕망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쉼 없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안락한 삶을 욕망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운다는 것도 병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바라는 것이다. 병이 미래의 안락한 삶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으로 욕망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사회가 나를 길들인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자. 안락한 삶, 안정적인 삶이란 그냥 관념이 아닌가? 안정적 삶이라는 것이 있는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괜찮다고 하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내 발로 나왔다. 그곳은 평생직장, 즉 기존 관념대로라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곳이었다. 보수도 괜찮았다. 그런데도 그 안정됨과 안락함이 싫어서 뛰쳐나왔다. 다른 것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안정됨이란 순간의 느낌일 뿐이고 항상 좋다고 느끼는 어떤 상태도 아닌 것이다. 그 느낌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을 때도 있다. 따라서 내가 항상 좋다고 여기는 안정된 삶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가 만든 관념에 불과하다. 욕망은 계속 변한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이전의 방식으로 쉽게 처리하려는 욕망과 동시에 변화를 시도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변화를 시도하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조건이 기존 방식대로 하도록 놔두질 않는다. 올해도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방식들을 실험해야 했다. 지금 내가 변화 속에서 살고 그것을 원하는데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는 것이 자기기만이 아닌가.

내가 죄책감의 발동을 통해 기존에 습관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욕망하고 다른 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겠다. 다른 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 이것은 약자의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마비시키기 위해 기계적 활동을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무엇을 보지 않으려 하는가? “우울증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어쨌든 좀 더 수월한 다른 훈련이 시도된다. 기계적 활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활동으로 고통스러운 생존이 상당히 경감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503쪽)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헛헛함을 느끼곤 한다. 가끔씩 헛헛함이 크게 밀려올 때에는 불쾌하다고 느껴지고 그 불쾌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할 일을 찾는다. 이 헛헛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갑자기 삶이 의미가 없는 것 같은 허무감인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서 뭐하나’ 이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힘들다’라는 가치평가를 의심해보자. 내가 힘들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딱히 힘들 게 없다. 지금 나의 일상을 보자. 운동하고 직장 다니고 글 쓰고 영어공부하고 이외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지낸다. 남들이 보면 힘들다고 할 만한 게 없다.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거나 몸이 아파서 불편하거나 통증을 겪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직장에서 여러 가지 일로 스트레스를 받기는 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삶이 힘들다고 퉁 치기에는 좀 민망스럽다. 글을 기한 내에 못쓴다고 내가 살아가는 데에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힘들다고 투덜대고 있다.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살고 있잖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라고 말이다. 결국 나는 열심히 할 만큼 했으니 더는 못하겠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거꾸로 말하면 뭔가를 더 안하고 싶어서 지금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더’란 기존의 일에 추가로 무엇을 더 안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 사는 게 뭔가 이상하지만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를 직면하고 다르게 사유해 보는 게 싫어서 나는 뭘 계속 하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게 아닐까. 삶이 고통스러운 자는 고통에 둔감해지기 위해 기계적 활동을 한다. 그런데 정말 삶이 고통스러운 것인가?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석함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다른 것을 시도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닐까. 기존 방식대로 기계적 활동을 하는 게 가장 쉽기 때문이 아닐까. 변화하는 삶속에서 기존 방식대로 머무르고자하기 때문에 삶을 고통스럽다고 해석한다는 것. 이제는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체력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이 죄책감으로까지 연결되었고 죄책감의 심리적 메커니즘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채운샘의 코멘트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체력이 약하면 일을 벌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니체가 줄곧 얘기하는 게 이것이 아닌가. 체력이 약하면 일을 더 벌이고 싶지 않을 것이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체력이 약해서 뭘 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는 불만. 아, 모순 덩어리다. 그냥 무엇을 하기 싫어서 체력을 핑계 삼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죄책감까지 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의식의 자기기만이 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채운샘이 말씀하신 약함 뒤에 숨어서 나를 봐주고 있다는 것임을 알겠다. 나는 그저 다른 것을 시도하기 싫었던 것뿐이다. 몸이 힘들면 몸이 원하는 대로 쉬면되고 몸이 할 수 있는 만큼 무엇을 하면 된다.

 4. 걱정이 많음과 죄책감

나는 걱정이 많다. 서론에서 언급한 가벼운 접촉사고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학원가 앞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학부모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신호로 정지와 이동을 알리고 있었다. 그 신호에 따라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고 차들이 지나가도 좋다는 수신호를 보고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전거를 탄 중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내 앞에 순식간에 나타났고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그 아이를 미는 듯 했고 그 아이는 잠깐 휘청 거리더니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고 횡단보도를 지나갔다. 그 순간 아이가 다치지 않았다는 생각과 갑자기 뛰어든 그 아이에 대한 화에 사로잡혀서 그리고 판단도 빠르게 서지 않아 차에서 내려서 아이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찝찝했다. 내가 뭔가 잘못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 괜찮은 거냐고 물으면서 그날 밤 온갖 걱정을 다했다. 그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뺑소니로 몰릴까봐서이다. 결국 경찰서에 가서 자진 신고했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다치지도 않았는데 뺑소니로 몰리는 게 뭐가 그리 두려운가? 내 상황을 그대로 얘기하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나쁜 상황을 상상한다. ‘이상한 아줌마를 만나서 나를 걸고넘어지면 어떡하나, 내 차도 아닌데 나 때문에 회사까지 골치 아파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자책했다. ‘나는 정말 그 순간 그 아이가 다치지 않았다고 확신했나, 그 아이가 혹시 다친 게 아닌가.’하는 온갖 망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2주가 지나서 한 학인이 물어왔다. 그 아이 부모한테서 연락이 왔냐고 말이다. 나는 대답했다. 아직까지 안 왔다고. 2주가 지났는데도 말이다. 아마 지금 물어 와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나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자신을 걱정하는 상태로 남겨둔다. 이 심리는 무엇일까?

올해는 코로나로 특히 조마조마 하는 나를 자주 보았다. 회사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 회의, 행사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요즘같이 코로나가 심각할 때 특히 그렇다. 나 때문에 회사가 피해를 볼까봐 그 때문에 조직에서 받을 비난과 사회적 비난이 두렵다. 행사를 치르기 전에는 행사를 치를까 말까를 고민하고 행사를 치르고 나서는 확진자가 나올까봐 걱정이다.

이제 내 문제가 좀 보인다. 나는 막연히 불확실한 미래를 긍정하지 못하는 나를 변화하는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약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에 앞서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나쁜 상황이 올까봐 걱정하는 것은 내 행위로 비난을 받을까봐서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갑자기 큰 병이 들까봐, 직장을 잃을까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들은 당장 닥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나의 행위로 인한 결과와 그에 따른 비난이 분명한 듯 보인다. 그런데 비난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나의 걱정은 ‘접촉사고 후 바로 아이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행사를 치르지 말걸.’이라는 후회를 동반한다. 그러나 내가 그 순간 다른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모든 동물은, 따라서 철학자라는 동물도 자신의 힘을 완전히 방출할 수 있고 최대한의 힘의 감정에 이르는 데 맞는 최선의 좋은 조건들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464쪽) 이는 매순간의 조건 속에서 자신의 힘을 완전히 방출하는 것이 모든 동물의 본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힘들 중에 가장 강한 힘이 약한 힘을 빼앗아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접촉사고 후 그냥 지나친 것은 본능적으로 그 아이가 다치지 않았다고 느꼈고 그 순간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내 힘을 완전히 방출한 것이다. 내가 행사를 진행한 것은 코로나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힘보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엇을 하고자 하는 힘이 컸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런 방식으로 힘을 최대한 발휘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죄책감을 발동시키고 있다. 이런, 다시 죄책감의 문제이다. 죄책감은 원한감정을 자신에게로 돌려 공격하는 것이다. 죄책감을 가지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힘든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책하고 있는 동안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아이가 다쳤다고 연락이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진행한 행사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이후 일어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자책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약자들이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갈망에서 죄책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고통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닐까? 실제로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오직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힌다. ‘죄인’이 된 인간이 자신의 불쾌를 없애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고통을!’을 외치며 고통을 갈망하는 모습(512쪽)과 같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삶을 ‘힘들다, 고통스럽다’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자책을 추동하는 또 다른 힘은 힘든 시간을 보낸 이후 내가 바라는 좋은 결과가 오길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작동하고 있는 믿음임에는 분명하다. 자책으로 힘들면 힘들수록 나쁜 결과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얼마나 비겁한가? 자책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후에는 내가 감당할 것을 감당하기 싫다는 심리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인들이 그토록 바라는 구원이 아닌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신에 의존해 구원 받기를 바라는 것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대가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인들이 삶을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그들이 그렇게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신에 의해 구원받기 위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내 문제로 돌아가면 결국 나는 자책하면서 신과 같은 외부에 의해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지 않은 원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 남 탓을 한다. ‘그 아이는 왜 갑자기 횡단보도에 뛰어든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코로나는 왜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쓰다 보니 어이가 없다. 자연현상을 탓하다니. 그러나 그동안 나는 얼마나 어이가 없는 분노로 삶을 부정하고 있었을까.

 

5. ‘경험이 많음그리고 불행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다는 것

나는 다양한 경험, 소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을 우러러 보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그런 사람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하는 사건들을 잘 겪어나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불행한 사건이 오더라도 담담하게 잘 극복할 것 같다. 예를 들어 한 밤중에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이전에 한번 경험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잘 알지 않을까. 전 재산을 날렸지만 다시 일어선 사람이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쓰면서도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밤중에 산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만 이전과 똑같을 뿐 길을 잃은 위치, 날씨, 나의 상태 등 모든 상황이 다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전에 한 경험이 그 상황을 대처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전에 전 재산을 날렸지만 재기에 성공한 사람이 내일 암 선고를 받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나의 경우를 보자. 스스로 경험이 적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뭐라도 경험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이 이후에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도움을 주었나? 이전과 비슷한 경험이라도 했다면 이전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런 사례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찾아보자. 지금 직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상사가 정말 힘든 사람이었다. 내 앞의 사람들이 1년을 못 버티고 떠나갔다고 한다. 나는 3년은 버텨보자 라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다녔는데 그 사람이 3년이 지나고 얼마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뒤에 정말 힘든 직원이 내 팀원이 되었다. 도대체 소통이 안 되었다. 아침마다 출근길이 지옥 같았다. 이 경험을 통해 늘 힘든 사람이 나한테 오는구나, 힘들지 않기를 바라지 말아야겠다, 그 사람을 내 공부거리로 삼아야겠다는 깨달음(?) 정도를 얻기는 했지만 상사와의 경험이 딱히 부하직원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람, 상황 모든 것이 달라서 그 충돌의 강도와 질은 비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경험이 많은 사람이 불행한 사건을 잘 극복해나간다는 것이 나의 관념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경험이 많다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경험을 하면서 살 뿐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다 나열한다 하더라도 그 경험을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경험이 많은 어떤 상태를 관념으로 만들어놓고 스스로를 경험이 적다고 하면서 결핍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왜일까? 왜 스스로를 무력한 자로 만들고 싶어 안달일까. 젠장. 경멸심이 생긴다. 여기서도 나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하면서 불행한 사건이 올까봐 두렵다고 외치고 있다. 앞장에서 봤듯이 나는 지금 딱히 힘들만한 것도 없는데 삶을 힘들다고 채색해버리고 있었다. 물론 힘든 순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순간 또한 지속되지 않았다. 순간순간 나의 감정은 변했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이다. 변화할 뿐이다. 변화 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사건들과 나는 그 마주침으로 강도는 다르지만 늘 충돌이 생길 것이다. 그 충돌에서 생기는 낯설음, 힘듦을 겪기 싫어 나는 미래가 두렵다고 또 채색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권희진! 정말 두려운가? 그런데 앞장에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내일 큰 병이 걸릴까봐, 직장에서 잘릴까봐 두렵지 않다고. 실제로 두려울 게 없다! 그런데도 ‘앞으로 큰 병에 걸릴까봐 두려워요.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 안락하게 살 수 없을까봐 두려워요.’라고 계속 외친다. 변화로 겪을 것을 겪기 싫어서 말이다. 다시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삶을 힘들고 두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 다음 너를 그런 삶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약한 존재로 만들고 있구나. 너는 결핍의 상태로 평생 살아갈거니? 그래서 너는 어떤 기쁨을 느끼니? 그냥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약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에게 기쁨을 주니?’

좀 더 들여다보자. 나는 불행을 ‘자기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강함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여러 힘들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자기 힘만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불행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다는 것을 강함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첫 직장에서 나온 후 행정고시를 봤고 두 번 실패하고 접었다. 순조롭던 인생에서 그 경험은 그땐 꽤나 큰 절망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행시에 실패했다는 것 보다 실패 후 마주친 현실이 힘들었다. 모아둔 돈도 꽤나 썼고 이제 서른도 넘어서 직장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고... 늙으신 부모님에게 기대는 것도 창피했다. 그 때 부모님은 다른 일로 힘든 상황이어서 나의 실패가 당신들에게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내 삶은 내가 살아야하구나, 누가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구나 하고.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해석이 이렇게 이어졌다. 그러니 내 힘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내 힘을 강하게 키워서 이 힘든 삶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때에도 ‘힘든 삶’이라는 것은 없었다. 행시에 실패했다는 사실, 즉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었을 뿐이다. 모아둔 돈이 줄어들었지만 당분간 먹고 살 돈은 있었다. 절망이라고 생각하던 그 시절을 극복했던 것도 내 힘만으로는 아니었다. 그때 같이 살던 동생의 도움을 받았고 사회복지단체에서 봉사하면서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힘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직장을 구했다. 절망에 머무르고 있는 게 힘들었던지,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살아갔다. 대단한 결심과 용기를 발휘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해석이 여전히 작동하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어떤 충동에서 비롯되었나? 그것은 긍정적 힘의지인가, 부정적 힘의지인가?

생각해보면 그 해석은 일종의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도 부모님은 도와주시지 않는구나 라는 부모임에 대한 섭섭함. 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에 떨어지다니 세상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 라는 세상에 대한 원망. 이런 원망에서 출발해서 ‘이 세상에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이제부터 나는 혼자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힘들어도 참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왜 그렇게 부럽고 대단해보였던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보곤 했다. 나름 아팠던 기억이 소환되면서 나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나와 내 삶에 결핍을 느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역경을 극복했을까. 나는 중도에 포기했는데. 나는 저들처럼 강하지 않구나. 저들처럼 강해지고 싶다.’ 결핍과 이상의 악순환이다. 그런데 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참으면서 산 것이 내게 기쁨을 주었는가? 이후 들어간 직장에서 상사의 굴욕감을 주는 언사를 참았고 많은 업무량으로 늘 저녁 9시까지 야근이었다. 나는 위축되고 피로에 지쳤다. 원한감정에서 출발한 강해지고 싶다는 바람과 노력은 결코 나를 기쁘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작동하고 있는 이 바람과 노력은 나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인가?



 6. 강함을 발휘한다는 것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중략)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 적이 없다.”(337쪽) 「도덕의 계보」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니체는 도덕이 본래 어떤 기원을 갖는가라는 물음 앞에 선다. 그리고 이렇게 적는다. “이 문제에 관해 나는 나 자신에게서 많은 해답을 찾아보았고, 그 해답을 찾고자 감히 시도해보기도 했다. (중략) 내 문제를 세분화해서 다루었으며, 그 해답에서 새로운 물음과 탐구, 추측, 개연성이 나왔다.”(341쪽) 「도덕의 계보」는 니체가 자신을, 자신의 문제를 탐구해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에세이의 막바지에 이르러 새삼 서문의 이 구절이 들어온 것은 이번 에세이가 「도덕의 계보」의 도움을 받아 나 자신을 탐구해가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겨 강함을 원하는 줄 알았고 그래서 내가 왜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기는지 하나씩 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식의 자기기만 현장(?)을 곳곳에서 적나라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강함을 원한다고 했지만 그 뒤에 숨어서 얼마나 약함을 원하고 있었는지, 죄책감을 작동시키면서 얼마나 변화에 저항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변화에서 오는 낯선 것들을 겪기 싫어 삶을 힘들고 두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보았다. 나는 강함을 원한다고 했지만 약함을 원한 약자였던 것이다. 이것을 안 이상 이제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고 싶다.

이러한 욕망은 내가 하는 행동이 내가 원하는 것임을 순간순간 인식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제 민호샘이 낭송 영상을 찍어서 보내달라는 카톡메세지를 보고 옆 자리 직원에게 인상을 구기며 이렇게 말했다. ‘아, 바쁜데 또 낭송 영상을 찍으라네요. 어쩔 수 없죠, 뭐. 이따가 저 좀 찍어줘요.’ 그 순간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또 마지못해 하는 양 습관적으로 말하고 있구나. 영상을 찍어달라고 하는 건 내가 그걸 원하는 것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직원한테 부탁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약함으로 포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찍어보고 별로이면 안 보내려고 하는 수작인가.’ 내가 반응적 힘의지를 발휘한다는 것을 안 순간 나에게는 샛길이 열린다. 1년을 함께 공부한 규문에 조그마한 것이라도 참여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그게 좋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영상을 찍었다. 재미있었다. 그게 전부다. 내가 원해서 함을 긍정하는 것. 이 순간이 긍정적 힘의지를 발휘하는 것일 게다. 이번 에세이를 쓰면서도 순간순간 그만 쓰고 싶다는 마음과 죄책감을 작동시키는 나를 보았다. 그러나 죄책감 뒤에 자기기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을 중단할 수 있는 힘도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강함과 약함을 다시 생각하고 싶은 충동이 분명히 있었고 이러한 충동이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장에게 매일 에세이를 보내기로 하고 시도도 해보았다. 에세이 보내는 걸 거르기도 했지만 이런 훈련은 나를 탐구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보다 강하게 만든 것 같다. 그리고 강함과 약함에 대한 나의 관념을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심리를 쫓아가는 과정이 힘들면서도 즐거웠다. 다른 식으로 사유해 보고 거기에서 나를 긍정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었다.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좋음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강함일 것이다.
전체 3

  • 2021-01-08 23:11
    문체만이 아니라 실제로 샘께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쓰신 것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도덕의 계보>를 잘 활용하셨지만 저는 왠지 <즐거운 학문>이 더 많이 연상되네요. 회복기의 경쾌함이랄까?
    아무튼 읽는 것만으로도 함께 가벼워지는 듯한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1-01-11 19:06
    분명 같은 글인데 이렇게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눈으로 읽을 때랑 세미나에서 글쓴이 목소리 들으면서 종이에 밑줄 그어가며 따라 읽을 때랑 그 맛이 너무 달라서 신기해요. 희진샘 에세이가 너덜너덜해지고 있어요. 올해도 듣고 싶고 읽고 싶네요. 바쁘시져..

  • 2021-01-11 21:51
    "젠장. 경멸심이 생긴다." 와. 글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감탄했습니다. 자신을 탐구해본 사람만이 이 말을 쓸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런 탐구를 엿봤을 뿐인데 저도 그 말을 쓰고 싶네요. 강자의 경멸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추동하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