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엔조이 번역]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기르기[1]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1-09 19:36
조회
215
*규문의 어학 세미나 ‘엔조이(En-joy)’에서는 이번 시즌 동안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라는 논문을 함께 읽고 번역해보았습니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이 논문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포함한 생명 집단과의 연결성을 잃어버린 결과이자 동시에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힌트를 ‘애니미즘’적인 사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 도전하는 번역이기도 하고, 애니미즘이라는 낯설고 멋진 사유를 접하는 경험이어서 그 과정이 조금 어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는데요. 정아 샘의 도움와 다른 샘들의 수고 덕분에 어찌어찌 번역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그 내용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연재될 테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기르기
‘자연’ 보호에서 친족 부양으로. 지속가능성의 애니미즘적 전환


글 / 안드레아스 베버


 


    


“애니미즘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것이다.”
-팀 잉골드, <현대적 애니미즘에 대한 안내서>, 루틀리지, 2013, 224쪽


코로나의 전세계적 유행으로 우리는 지구가 공동의 것이며 우리 삶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찰은 이성적 관념이 아닌 정서적 필요에 의해 도출된 것이다. 개개인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접촉을 제한받는 불편함을 받아들인다. 서로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자, 며칠 만에 경제적인 이해관계마저 보류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상호의존성을 우선시한 것이다. 상호의존성, 즉 서로 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아니고 경제적인 정책도 아니다. 그것은 공유 관계의 경험이며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경험이다. 이 생명의 공동체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관여하는 물질대사 과정이 곧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에 자양분을 주는 활동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들, 즉 인간과 비(非)인간들을 효율적으로 다뤄야 할 사물로 대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정책은 공동체 내에서 풍요로운 삶을 만드는 경험, 인간과 비인간을 친족관계로 여기는 경험, 다른 존재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수천 년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애니미즘적’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지고 있다. 애니미즘의 교훈들은 다양한 존재로 구성된 거대한 사회에서 상호의존성에 기반해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생명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들은 다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1.코로나와 공동선

세계적인 유행병이 휩쓴 2020년 4월, 전세계 사람들이 움직임을 중단했다. 활발하게 일어나던 경제 활동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직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멈춰버린 것은 세계와 교류하는 서구의 방식이 가장 두드러지는 활동들이었다. 빈번한 여행, 쉴새없는 무역과 소비, 항공 수송의 대부분과 개인적인 활동들. 산업 중심지의 상공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보이지 않고, 도로에는 차가 사라졌다. 고요와 함께 보기 드문 깨끗한 공기도 돌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도시 사람들은 자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야생 동물들, 새들, 곤충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인류는 무언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활동을 멈출 것을 요청받았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서구의(그리고 세계의) 정책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해온 것, 바로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한 봉쇄조치는 경쟁을 통한 경제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조치로 경험하게 된 고요 속에서 우리는 더 넓은 공동체를 느낀다. 한밤중에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꿀벌, 지저귀며 노래하는 구관조를.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수백만 명에게 외출 제한 명령은 빈곤이라는,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 위협을 의미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은 머무를 집조차 없다. 밀폐된 공간에 여럿이 모여 앉아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 가정 폭력도 급증했다.

이러한 조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조명한다. 신자유주의가 지속적으로 감춰온 사실, 즉 개인은 다른 이들과 함께 형성하고 있는 집단이 번성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다른 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가능한 한 빨리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실 세계 여러 지역에는 아주 실제적인 위험도 존재한다. 기꺼이 개인의 목적을 추구하길 멈추고 심지어 일을 통한 생계유지조차 중단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착취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을 포함하여 몇몇 나라에서는 이동제한과 같은 자유의 축소가 상시적인 규칙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조차도 지금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고수하며 행동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사람들의 행동은 연결의 경험과 개개인이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대신 속도를 늦추고 다른 이들에게 공간을 내어준다(문자 그대로, 식당에서도 거리를 유지하며 줄을 선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인다. 많은 사람들이 서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 그럼에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문제에 응답한다. 좀 더 힘없고 취약한 자들, 나아가 생태적 관점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이를테면 식물과 동물, 개울과 숲과 바위와 산과 같은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신자유주의의 중심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이런 실존적인 위협 아래서 더 심오한 것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협약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생명의 관계망도 보호한다. 이러한 행위는 아주 넓은 영역에까지 뻗어 나간다. 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항상 딜레마였던 문제, 어떻게 취약한 타자들을 대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

이제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 답이 저절로 떠오른다. 전문적인 계획이나 기나긴 논쟁을 거치지 않아도 그 답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찬반을 논할 새도 없이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우리의 연약한 몸으로 답을 하고 있다. 우리 몸은 숨을 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러므로 봉쇄조치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생태적인 대응이다. 생태적 관점이 이론적 지평을 점령해버렸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가 생명의 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동체는 인간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를 포함한다.



 

2.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반응이 전적으로 생태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은 아직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생태적 원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 대유행은 생태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대재앙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고 해서, 이 질병이 오직 위생이나 건강에만 관련되어 있거나 인간에게만 국한된 문제라고 오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가 인간에게로 건너온 동물의 바이러스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종류의 교차전파는 대개 인간이 야생동물 고기를 목적으로 희귀 야생 동물들에게 너무 가까이 접촉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바이러스가 생겨나는 또 다른 온상은 공장식 축산이다. 따라서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의 파괴, 희귀종 동물들의 대량 소비, 즉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인간의 침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21세기 최초의 생태계 재앙이다. 인간은 이 재앙으로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과 이 유행병은 인간의 생활에 즉각적인 변화를 야기했고, 우리가 서로 관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인간보다 더 많은 존재가 사는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지금, 그 변화는 인간과 비(非)인간 존재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을 포함한다.

생태 파괴는 다른 존재들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의 주요 원인은 서식환경의 변화와 산업형 농업이다. 이는 상호성에 반한다. 따라서 생태 파괴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지금 이 순간에 인간 사회가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태도, 즉 한발 물러서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것과 상반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다른 존재들과 상생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에게 공간을 내어주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태도는 사물을 대상화하는 세계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뿌리내린 입장을 드러낸다. 즉 다른 존재들은 단지 사물일 뿐이고, 사물들은 시장 논리에 의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존재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필요가 없게 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세계적 유행은 이러한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의존성이 생태계의 핵심적 특성임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타자들에게 살 곳을 내어주는 상호의존성의 실현이야말로 우리에게 요청되는 가장 핵심적인 생태적 공헌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상호의존성이 우리 삶을 좌우하는 꼭 필요한 요소라는 점, 즉 우리는 생태적 상호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생태권의 일부이다. 우리는 생태권에서 살아가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로 죽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생태적인 교환의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단순하지만 그동안 무시되어온 진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우리는 생명 공동체의 일부라는 것,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 그 순환이 궁극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음 회에 계속)


전체 1

  • 2021-01-12 09:45
    코로나 판데믹을 인간의 존재방식의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해주는 글이군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자가 '상호의존성'을 어떤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호옥시 '호혜'나 '상호부조', '평화' 등에 대한 '인간적인' 이미지들을 자연과 우주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아마 이후 연재될 부분에 더 자세히 나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