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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이 번역]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기르기[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1-15 16:36
조회
147
*규문의 어학 세미나 ‘엔조이(En-joy)’에서는 이번 시즌 동안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라는 논문을 함께 읽고 번역해보았습니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이 논문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포함한 생명 집단과의 연결성을 잃어버린 결과이자 동시에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힌트를 ‘애니미즘’적인 사고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 도전하는 번역이기도 하고, 애니미즘이라는 낯설고 멋진 사유를 접하는 경험이어서 그 과정이 조금 어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는데요. 정아 샘의 도움와 다른 샘들의 수고 덕분에 어찌어찌 번역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그 내용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연재될 테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3. 미생물에 의한 서구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의 해체


시장주의적 사고방식은 타자들이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드는 능력을 가진 생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고려를 방해물로 간주한다. 여기서 현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세계다. 이는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묘사된 '자연상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같은 사고방식 안에서 생명과 세계의 상호의존성은 일종의 순진한 꿈으로 손가락질 받는다.

홉스를 따르는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경제학적 사고방식 안에서 ‘사회계약’은 국가의 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개개인들에게 안정적 생계를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런 안정성은 다른 존재들에게 삶의 공간을 내어주는 인간의 역량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계약은 권력을 쥔 소수의 사람들이 개인들의 처절한 경쟁을 통한 물질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행되었다.

사회계약의 구도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 비활성적인 사물들, 즉 자연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조약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 사회다. 이 조약은 개인이 재산 축적을 위해 자연과 싸우고, 인간의 삶을 물질적 현실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맺은 것이다. 이 구도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열’, 즉 서구 문화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자연과 문화를 분리하고 비인간을 '사물'로 재정의하는 방식 말이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보아벤투라 데 수사 산토스는 이런 구도의 사고방식을 ‘서구 인지 제국’이라고 불렀다. 서구 인지 제국의 이러한 관행을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괴물들은 살아 있는 세계, 즉 상호의존성에 기반해 스스로를 생산하는 세계를 적대적인 두 영역(자연과 사회)으로 분열시킬 때 태어난다. 하지만 자연과 사회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두 영역은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이러스의 확산과 신체의 감염 같은 물리적 과정은 문화와 사회를 변화시키고,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피드백을 얻은 사회적 조치들도 변화시킨다. 자연, 즉 야생 동물들로부터 온 바이러스는 사회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바이러스에게 활동 영역을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회가 ‘저 바깥의 사물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또한 그것은 지속가능성에 관한 정책들을 시행하거나, 더 효율적인 사회를 구성하거나, 더 큰 보호구역과 완충지대를 사회와 ‘자연’ 사이에 설립하는 것으로 인류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관념들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성 정책들은 여전히 인간 이외의 존재들(비인간 존재와 급증하는 지구 시스템 요소들)를 행위자가 아닌 사물들로 간주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가 사물이 아닌 다른 존재들, 마땅히 상호의존적인 태도로 다뤄져야 하는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배운다.

서구 인지 제국은, 사회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과 그 밖의 ‘대상들’(모든 비인간 존재뿐 아니라 때로는 일부 인간들까지 포함하는) 사이의 비가시적인 경계선을 기초로 수립되어왔다. 이러한 인식의 헤게모니는 비인간 타자들인 ‘자연’의 파괴와 ‘식민지’의 인간 타자들의 멸절을 정당화한다.

서구 인지 제국은 필연적으로 식민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계약에 동참하지 않은 모든 존재들을 사물들로 이루어진 죽은 자연의 일부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은 이러한 분할에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 바깥의 존재들(사회적 규범에 따르지 않는 인간들, 토착민들, 다른 존재들, 지구 시스템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식민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대우로 귀결된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이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서구의 인식에 따른 식민주의는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자멸적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은 인류세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인류세가 인간 영역과 비인간 영역의 뒤섞임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뒤섞임의 현상은 북극의 3미터 얼음 속에 남아있는 방사능의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는 기술 문명 사회를 멈추게 하고, 그 사회를 역병이 창궐한 중세 도시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든 바이러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가 삼림파괴와 멸종위기 동물 고기의 거래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인류세는 서구적 합리성의 체제가 ‘자연’ 전체를 관리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세의 등장은 서구적 인식의 지배에 종말을 고한다. 인류세에 접어들며 우리는 인간 사회가 ‘자연’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더 중요하게는, ‘자연’ 안에 존재한다는 것(생명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에는 일련의 규칙들이 따른다는 것을 경험한다. 사회가 그 규칙들을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지금의 이 삶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RNA를 기반으로 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전형적인 인류세의 행위자이다.

자연재해의 발생빈도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가 상호 연결된 전체(호주의 산불, 세계 많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불안정한 몬순 주기, 폭풍, 가뭄을 생각해 보라)의 일부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코로나-19만큼 즉각적인 위협이 된 재해는 없었다. 이를 통해 바이러스는 공동체 윤리를 생각하게 한다. 팬데믹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지 보여준다. 그것은 다른 존재에게 삶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용어인 ‘우분투(Ubuntu)’에 요약되어 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이것은 상호의존성에 관한 사유로, 우리가 함께 삶을 만들어가며 우리뿐 아니라 다른 존재의 삶, 그리고 그 삶의 풍요로움에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우분투는 애니미즘에 기반한 사고방식이다. 애니미즘은 인간 사회의 외부가 말 없는 사물들이 아니라 인격체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유다. 인격체들은 흥미와 욕구를 지닌 행위자들이다. 애니미즘적 접근은 이러한 이들과 우리가 상호의존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살아갈 공간을 얻기 위해,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이 세상에서 생명이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해 그들과 삶의 터전을 공유해야 한다. 팬데믹 시대에 세계는 동요하고 있고 우리는 멈춰 서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의 생명력을 다른 인격체들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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