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11.11 차이와 반복, 수업후기

작성자
락쿤
작성일
2015-11-13 20:34
조회
3869
 

지난 시간에 이어 드디어 <차이와 반복>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아~!! 3시간의 열띤 강의, 우리는 툭툭 튀어나오는 낯선 개념들 덕에 몹시 가려운 느낌으로 이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채운 선생님은 “들뢰즈는 사고에 대한 철학이다. 사고란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새로운 생각이 발생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표상을 뚫고, 나의 표상에 붙들리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깐 이것을 깨고 사고해야 한다. 절실하게 화두를 갖고 고민하다보면 선승들의 깨달음처럼 팍팍 튀는 순간이 있다. 들뢰즈는 이런 것을 사유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 낯선 개념들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조차 편협한 사고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대충 자기가 아는 표상으로 정의하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으로 들뢰즈를 맞이해서는 안 되겠다... 는 다들 그런 생각이 드신 거죠(^^;;).
채운샘은 들뢰즈의 그간 저서들을 쭉 살펴주셨는데요. 그중 차이와 반복은 어려운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들뢰즈의 첫 책, <경험주의와 주체성>(1953년), <베르그송주의>(1966년)는 <차이와 반복>(1968년)에 영향을 주었던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채운샘은 이번 수업에서 흄의 경험론과 베르그송의 시간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주셨고, 그것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합리론은 이성이 있다는 전제에서(의식하는 주체,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에서) 시작되지만, 경험론은 어떠한 전제도 없습니다.(오홋! 이것이 어떤 느낌일까요?) 들뢰즈는 경험은 프로세스의 문제다. 삶은 끝도 없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깐 ‘겪음’만 있는 것. 하나를 겪으면 또 다른 것들을 겪어야 하는 것. 우리는 머리로 대충 이것은 책이다. 이것은 컵이다 하면서 개념을 정의 속에 환원시키며 산다. 그러나 진짜 경험은 내가 환원시킬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때, 예기치 않는 사건을 만날 때, 나의 생각은 표상에 붙들어지지 않는다. 공부 또한 몸으로 부딪히는 경험들 속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A 와 B 이다. ~와가 중요하다. 닥쳐오는 사건 앞에서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들을 계속 만난다. (그러니깐 내가 낯선 개념을 대충 아는 대로 이해하고픈 마음은 ‘A=B 이다’ 라는 방식이었던 거죠)
흄은 인간의 정신은 선험적 이성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을 관계 짓는 능력이고, 실제 경험 속에서 얻어진다고 했다. 즉 하나로 전체보기가 아닌 관계를 연합시키므로 세계를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의 역량이 커진다는 것은 관계짓기 역량이 크다는 것. 즉 우리는 습관적으로 A를 보면 다짜고짜 B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관계 짓는 것이다. 흄은 주체란 지각의 덩어리다. 관계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일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 속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주류철학은 늘 생동하는 현장을 놓치고 간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의 화두는 운동과 시간이다. 운동은 A라는 실체가 1에서 2로 움직이는 것을 운동이라 하는데, 들뢰즈는 이것을 가짜 운동이라고 한다. 시간은 뭔가? 칸트는 선험적 조건으로서 시간을 이야기 하지만(시간은 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자꾸 미루는 것일까...), 하지만 들뢰즈는 지금 만들어 내는 시간이 내 삶의 전부라고 말한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이것이 다음의 시간을 준비하는 차이와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과정, 관계, 촉발.. 이러한 것은 경험론의 언어다. 그렇다면 난 하나의 민감한 판, 촉발 당할 수 있는 미립자의 다발이다. 얼마나 누군가를 촉발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촉발하는냐, 촉발 당하는냐(뭔가 멋지다! 흑흑흑^^;). 현재 나를 매혹하는 힘. 그러니깐 관계 속에서만 내가 규정된다. ~와 있어야만 세계가 구성된다. 단독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인상만이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사물이란 뉘앙스다. 사물 자체는 없다. 지금 이 순간 발하는 반짝거리는 것이 사물이다. 개별적 뉘앙스는 단독자로 있지 않다. 각각의 뉘앙스를 발산한다. 일반성은 부분적인 것을 전체 속에서 파악한다. 보편성은 부분적인 것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서로 소통하는 것이다(부처님의 철학은 개개인의 삶에 따라 가르침을 다르게 전개시켰다). 사람이라는 일반성 속에 우리의 고유함을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개별은 개별로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연기 속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다. 어떤 내재의 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적 뉘앙스는 단독자로 있지 않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도 그렇다. 매번 반짝이는 차이를 통해서 반복할 수 있는가. 다시 반복을 통해서 차이가 매번 나타나지는가. 차이란 미세한 어긋남이다. 차이는 어떤 것이 아닌 것. 어떤 것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뭐가 아닌 것, 뭐와 대립하는 이 이미지를 버리고 사유하는 것이다. 원본으로 환원하려는 재현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기계적이고 천편일륜적인 반복에 직면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차이를 만들어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헐벗은 반복만을 한다. 차이를 가면 씌우는 것이 반복이다. 차이가 존재의 근원으로 이해해라.
경험론은 개념을 어떤 마주침의 대상으로 지금-여기로 다룬다(촉발: 베르그송과 흄). 무언가 겪지 않고서는, 촉발하고 촉발되지 않고서는 경험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 자체가 경험이고 실천이다. 이론과 실천을 구분하지 않는다.

나의 이전 상식으로 도저히 나오지 않는 사유, 나의 표상을 뚫고, 나의 습관으로 반복하는 헐벗은 반복은 뒤로하고 일상을 팍팍, 확확, 짱짱하게 느끼고, 만나고 질문하도록 날을 더욱 세워야겠습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한번 감사함을 느낍니다. 서로를 촉발하고 당할 수 있는 다음 주 수업을 고대해 봅니다. 그럼 수요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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