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0.26 수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0-31 14:10
조회
375
 

이번 주에는 7번째 고원, ‘얼굴성’을 읽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읽은 7고원이 다른 고원들보다 유독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강의를 듣고 난 뒤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사실 절망적입니다...

『천개의 고원』이 놀라운 것은 각 장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서로를 참조하면서도 각각 독립적이라는 점입니다. 각 개념들은 분명 긴밀한 연관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를 꼭 알아야 다른 하나를 알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선후관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글쓰기 방식이 우리에게 리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읽은 ‘얼굴성’역시 다른 고원들, 특히 5번째 고원의 개념들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고원에 나온 기호체제 개념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쌓아 올리는 것은 아니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7고원을 이해하기 위해서 5고원의 개념들을 다시 복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5번째 고원에 나왔던 기호체제들이 표현의 형식을 형성한다면 얼굴은 표현의 실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굴성’은 기호체제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5고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던 기호체제는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와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 두 가지입니다. 체운쌤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를 ‘기만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기호가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는 의미작용체제”(채운쌤 강의자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호가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할 때, 우리는 기호와 의미의 미끄러짐을 확인할 수밖에 없겠지요. 어떤 하나의 기호의 의미를 알기 위해 다른 기호들을 소급해 가다보면 결국 의미의 부재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 체제를 기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원환에서 다른 원환으로 건너뛰게 하는, 기호에 다른 등가물을 부여하는 해석망상(사제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하나의 초월적인 기표, 전제군주의 얼굴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절대권력과 미디어, 작가의 의도를 묻는 제도교육 등에서 드러납니다.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사제가 아닌 예언자의 이미지로 대변됩니다. 사제가 전제군주나 신의 얼굴을 해석했다면, 예언자는 신을 배반하고 직접 길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때의 배반이 오히려 신의 뜻을 더 잘 실행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이 기호체제는 단일한 중심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출발점을 이루는 주체화의 점”에 의해서 작동합니다. 여기서는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가 일치되어 새로운 주체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전에 언표행위는 항상 신-사제가 만들어내는 중심과의 관계 속에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제 언표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에 종속됩니다. 채운쌤은 대표적인 예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예로 드셨습니다. ‘나의 생각’은 ‘나’라는 주체, 나라는 존재에 일치되며, 반대로 나는 나의 생각과 일치됩니다.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로부터의 탈영토화에 의해 성립되지만 동시에 주체화의 점에 의한 재영토화를 나타냅니다.

이번 7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얼굴은 무엇일까요? 얼굴은 정말 독특한 부위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동물의 머리의 등가물이 아닙니다. 머리는 몸체의 연장, 전체로서의 몸의 한 부위입니다. 그러나 얼굴은 몸에 대해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우리는 동물을 그들의 얼굴을 표상하지 않습니다. 가령 고양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아한 자세와 별개인 채로 그 얼굴을 떠올리지는 않죠. 그런데 다른 인간을 떠올릴 때에는 다른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얼굴만 남습니다. 인간에게 얼굴은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피부로 되어있음에도 몸과 얼굴을 같은 세정제로 닦지 않죠.

물론 얼굴은 눈, 코, 입, 귀 등의 중요한 기관들이 모여 있는 부위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합친 것이 곧 얼굴은 아닙니다. 얼굴에는 그것들 모두를 합쳐서는 설명되지 않는 잉여가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얼굴이 기호체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얼굴에서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와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의 교차를 봅니다. 5고원에서 이들은 특정 기호체제는 단독적으로는 작용할 수 없고 항상 다른 기호체제와 동시적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얼굴성은 기호체제의 그러한 작동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얼굴이 흰 벽과 검은 구멍의 체계라고 말합니다. 의미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흰 벽(기표작용적 기호체제)과, 주체화의 점으로 작동하는 검은 구멍(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들의 조합, 이것이 얼굴입니다.

7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제목에 ‘0년’이라는 날짜가 붙은 것도 그것 때문이지요. 중세 유럽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었습니다. 이때 주로 그려진 것은 그리스도의 정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궁극적 본질”의 표현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의 얼굴은 모든 의미들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흰 벽입니다. 그런데 르네상스인들은 예수에게 내면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표지로 사용한 예수의 옆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예수는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 같은 고난 받는 인간, 고통 받고 아파하는 인간의 이미지를 나타내게 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르네요. 예수의 얼굴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주체적 얼굴들이 탄생합니다. 예수의 얼굴은 다른 얼굴들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얼굴화하는 하나의 척도가 됩니다.

예수의 얼굴이 보여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는 얼굴이 특정한 기호체제의 배치와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얼굴은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와 후-기표작용적 기호체제에서 생산됩니다. 얼굴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는 것. 물론 지금은 곳곳의 병원들에서 얼굴이 생산되고 있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맥락일 것입니다. 이들은 얼굴을 생산하는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째서 얼굴성이 추상기계냐, 라고 묻는다면 사실 저도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사실 모르겠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죠ㅠㅠ). 중요한 것은 얼굴이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에 의해 특정한 배치 안에서 코드를 부여받는다는 겁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흰 벽 위에 핀으로 꽂힐 것이고 검은 구멍 속에 처박힐 것이다. 이 기계는 얼굴성 기계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이며, 온몸과 그 윤곽들과 그 대상들의 얼굴화를, 전세계와 모든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345)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는 이항대립에 의한 코드화를 통해 얼굴을 기입합니다. 사실 이 부분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얼굴을 해체하라고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말도 거의 당위로 받아들여지네요.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기계에 의해 얼굴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얼굴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형은 말하자면 얼굴의 해체입니다. 그런데 그 해체는 자본주의의 공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한 해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강한 주체화의 점에 의해 얼굴화 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얼굴을 해체하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뜬금 없지만 저는 동사서독에서 읽은 『노자』가 떠올랐습니다. 노자는 15장에서 도를 잘 실천하는 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거기에는 “돈후하구나! 마치 통나무 같다敦兮其若樸”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최진석은 특정한 방식으로 손질이 가해지기전의 모습을 통나무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잘 다듬어진 전형적인 인간형, 딱 들어맞는 인간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를 잘 실천하는 자가 얼굴 지우기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때보다도 더욱 허술한 (게다가 늦은) 후기였습니다(ㅠㅠ). 모레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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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31 17:12
    예수를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게 십자가를 지고 고통이 가득한 얼굴, 죽은 뒤의 얼굴이네요. 그게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