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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이야기] 오욕의 쾌락에 탐닉하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2-03 10:04
조회
222

오욕의 쾌락에 탐닉하다



글 / 현숙


 

지세持世보살은 탐욕과 욕정을 끊어버리고 조용한 방에 고요히 머물기를 좋아하는 자다. 어느 날 악마 파순이 제석천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그를 찾아온다. 악마 파순은 악마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지옥의 마귀가 아니라, 오히려 선업을 지어서 그 과보로 욕계 천상에 태어나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나름 괜찮은 존재라고 한다. 다만, 그는 천상의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해, 그 즐거움이 영원하리라 착각하고 해탈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을 방해하려 한다. 그 악마 파순이 1만 2천 명이나 되는 천녀들을 거느리고 제석천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찾아오니, 그렇잖아도 제석천이 하늘의 쾌락에 빠져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지세보살이 한 마디 한다. “어서 오시오, 교시가여. 욕망의 쾌락 한복판에서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욕망의 쾌락은 모두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해야 하며, 몸과 목숨과 재물 속에서도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견실한 법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지세보살에게 제석천의 모습을 한 파순이 한 술 더 뜬다. “대정사여, 이 1만 2천 명의 천녀들을 받아들여 곁에서 시중들게 하시지요.” 지세 보살이 순순하게 응할 리 없다. “그만두시오, 교시가여, 그런 법답지 않은 일을 우리 사문에게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내게는 온당치 않은 것이오.”

그런데 그 때 유마힐이 나타나 파순이 제석천왕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 악마가 당신을 놀리러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악마에게 “그대는 이 천녀들을 보시해도 좋소. 나는 흰 옷을 입고 재가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사문이 아니니 받아도 되오.”라고 말한다. 자기를 알아본 이가 나타나자 파순은 무척 놀라고 두려워서 모습을 숨기고 사라지려 했지만 유마힐의 신통력에 붙들려 떠나지 못한다. 그 때 천상에게 이런 소리가 들린다. ‘그대 악마 파순아, 천녀들을 이 거사에게 보시해야 비로소 네 천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악마 파순이 천녀들을 유마에게 주자 유마힐은 천녀들에게 오묘한 보리의 법을 설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천녀들이 오욕의 쾌락에서 벗어나 대법원(大法院)의 즐거움에 대해 설한다. 유마힐이 말한 대법원의 즐거움이란 모든 부처님의 파괴되지 않는 청정한 즐거움으로, 보리의 도량을 장엄하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유마힐은 보살은 항상 이 법원의 즐거움 속에 머물며 등불 하나로 수십만 등불을 붙이는 ‘꺼지지 않는 등불(무진등)’이라는 오묘한 법문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무진등’이란 보살 하나가 수십만 중생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내도록 권유하는 정법을 널리 설하고 행하는 보리심이다.하루의 대부분을 오욕의 쾌락에 탐닉하여 살고 있는 우리가 ‘모든 부처님의 파괴되지 않는 청정한 즐거움’ 속에 머문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과제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짧은 문장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법의 즐거움이란 말이 한없이 낯설다. 크게 괴로운 일이 없는 한, 먹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먹으면서 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삶의 전부다. 아니 어쩌면 생각이나 감정, 오감을 만족하게 하는 즐거움을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유마힐이 말한 ‘대법원의 즐거움’이라는 말이 참으로 낯설다. 지세보살은 탐욕과 욕정을 끊어버리고 조용한 방에 고요히 머물기를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에 제석천으로 위장한 악마 파순에게 ‘욕망의 쾌락 한 복판에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근엄하게 말한다. 그런데 유마힐은 한 술 더 떠, ‘대법원의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욕망의 쾌락 한 복판에서도 깨어 있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쾌락보다 더 큰 즐거움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는 마음이야말로 ‘무진등’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보살, 보리살타(보디사트바)란 말은 보디, 즉 깨달음, 부처라는 말과 사트바, 즉 무지, 중생이 란 말이 합쳐진 말이다. 하나는 아주 밝음을 나타내는 깨달음, 지혜를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아주 캄캄한 무지와 무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두 개의 정반대되는 말이 보살이라는 말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 보살은 ‘깨달은 중생’이다. 중생은 중생이지만 깨달은 중생이 보살이다. 즉 보살의 삶은 유마힐처럼 우리의 삶의 어떤 모습도 부정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 1만2천 명의 천녀들을 곁에 거두었으면서도 ‘이미 놓아주었’다고 말하는 소유와 집착이 없는 마음을 산다. 그 보리심이 ‘마궁’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수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 것이다.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오욕의 쾌락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오욕의 쾌락으로부터 깨어있지 않으면 그것을 소유하고 집착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보살은 그보다 더 큰 즐거움, ‘대법원의 즐거움’을 한 찰나도 놓치지 않고 사는 이다. ‘어떤 조건에도 의지하거나 머물지 않는 즐거움’, ‘무상한 오온을 관찰하고, 탐욕을 떠나, 오만하고 나태함이 없이, 인욕하면서 정진하며, 모든 법을 기쁘게 믿으며 보리분법을 닦아 익히는 최상의 즐거움’ 속에 머물며 이를 즐기는 이들이 보살이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조건에도 의지하거나 머물지 않으며, 어떻게 ‘무진등(無盡燈)’의 오묘한 법문을 펼쳐나갈 것인가. 매 순간, 깨어있음만이 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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