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청년 톡톡] 존엄을 위한 투쟁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9-30 14:36
조회
274


존엄을 위한 투쟁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읽고


성민호   


당신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집으로 걸어가다 보면 고려대병원 앞 보도블럭에 있는 작은 텐트를 지나게 된다. 현수막들의 비장한 글씨들로 보아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1인 농성인 듯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여름 전부터 봤으니 반년 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천막 옆 작은 테이블에서 함께 소주를 마시던 동료들도 안 보인다. 날이 쌀쌀해져서인지 텐트 문은 굳게 닫혀있는데 안쪽에서는 희뿌연 스마트폰 불빛이 새어 나온다. 나는 이 사람의 사연을 모르고 의료법도 모르지만, 왠지 참 씁쓸한 투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그는 무엇을 위해, 무엇으로, 누구와 함께 싸우고 있을까? 현수막 내용대로라면 그의 ‘결사’는 병원 측의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바란다. 그의 동력은 그가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다. 하지만 매일 텐트 앞을 스쳐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나는 투쟁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국가의료시험을 반대하는 의사들의 파업, 정권교체를 바라는 집회, 부정입학 또는 군면제 등을 고발하는 국민청원들. 위의 텐트 농성과 마찬가지로 나는 왠지 모르게 이런 투쟁들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조금 볼품없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 투쟁들은 기껏해야 자기가 누리던 것을 더 누리겠다거나, 남이 누리던 것을 자기도 누리겠다거나, 자신이 누리지 못하면 남도 누리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어느 자리에 있든 돈이나 지위를 더 많이 갖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요구 말이다. 원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들의 무기는 ‘평등하게 누릴 자유’와 그것을 침해당한 처지다. 동일한 사람들의 동일한 것을 얻고 싶다는 투쟁. 똑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의 ‘똑같지 못함’에 대한 투쟁. 어쩐지 내게 이것들은 투쟁이 아니라 그저 투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책은 이런 ‘투정’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투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똑같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라지기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다른’ ‘타자’로 남기 위해”(345쪽) 벌이는 투쟁이 있다. 평등권이나 불행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와 춤과 노래를 무기로 삼는 투쟁. 그것은 이전까지의 여러 혁명 운동들과도 달랐다. 이 투쟁은 권력을 잡는 것도 부를 재분배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리게 하고 기억하게 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렇기에 정부 의석을 차지하는 것도, 역사의 전위가 되는 것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바라는 것은 “내가 나일 수 있고 내가 아닐 필요가 없는 세상, 네가 너일 수 있고 너가 아닐 필요가 없는 세상”(345쪽)이다. 이 투쟁의 적은 연방 정부군과 지주들뿐 아니라 그 구조를 만드는 신자유주의이며, 이 싸움의 무기는 싸구려 나무 소총과 수류탄만이 아니라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들의 대체될 수 없는 존엄성이다. 대체 이런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내 목소리를 통해 사파티스타가 말한다


어떻게 말이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이, 멕시코 오지의 작은 원주민 집단의 저항을 대륙적이고 세계적인 운동으로 바꿀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성명서와 편지를 모아 엮은 책이다. 그 성명서들은 라칸도나 정글 깊숙한 곳에서 쓰여, 누군가의 말 안장에, 배낭 속에, 콩자루 속에 담겨 이동하다가 마침내 인터넷이 접속되는 마을에 도달해 전 세계 수백만 사람들이 접속하는 웹사이트에 공개되었다. 이것은 인터넷을 활용한 최초의 혁명이었고, 수많은 지식인 및 시민단체들과 연결되어 5개 대륙에 있는 27개 나라 130개 도시에서 사파티스타를 지지하는 시위 행진을 가능케 했다. 그런데 이 운동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단지 인터넷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 때보다도 훨씬 더 크고 빠른 네트워크가 있지만 혁명적 움직임은 찾기 어렵지 않은가.)


마르코스의 말이 강력한 무기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개인 마르코스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말’이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스키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부사령관의 목소리를 통과하는 더 큰 존재의 목소리였다. 마르코스는 사람들 앞에서 강연할 때 늘 이런 멘트로 시작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 목소리를 통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목소리는 말합니다.”(159쪽)


마르코스는 자신이 500살이 넘었다고 말한다. 자신을 스페인에 의해 마야족이 정복당하면서 시작된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결코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앞서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과 앞으로 살아가고 또 죽어갈 사람들의 목소리를 갖는다. 그는 “자신이 하나이면서 많다는 것을 알고, 많은 목소리로”(281쪽) 말한다. 따라서 그 말은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권력이 아닌 것을 두렵게 하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땅에 거주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요구하지도, 명예와 구호금에 유혹당하지도 않는다. 그의 말이 그토록 단단한 것은 그 목소리가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뿌리에서, 그들의 죽은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421쪽)이다.


사파티스타는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죽음을 죽지 않기 위해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728쪽)다. 반란의 배경인 멕시코 치아파스 주는 멕시코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주이자 원주민이 가장 많고 동시에 빈곤률과 실업률이 가장 높은 주이다. 20세기 내내 목재상들과 목장주들이 이주해오면서 원주민들은 노예처럼 노역에 시달리거나 라칸도나 정글 깊숙이 쫓겨 들어가야 했다. 다양한 피부색과 다양한 종족의 원주민들이 모여들었고 새로운 집단이 올 때마다 그들은 더욱더 정글로 깊숙이 들어갔다. 정글이 개발될수록 그들은 무자비하게 탄압당했으며, 헌법에 명시된 토지조차 빼앗겼다. 해마다 만오천명의 원주민이 빈곤만 아니면 치료할 수 있는 병 때문에 죽었다.“우리는 치욕과 고통 때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싸워보지도 않고 죽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우리를 하나로 모은 고통이 우리에게 말을 하게 했고, 우리는 우리 말에 진실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140쪽)


생각해보면 우리의 말이 더 강력해지는 것은, 그것이 나 개인으로 환원되는 목소리가 아닐 때인 것 같다. 개인의 차원에서 말할 때 우리의 목소리는 겨우 자기의 경험과 상식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의 이익, 나의 손해, 나의 기쁨, 나의 분노. 이런 기준들은 잘해봐야 가족의 범위 이상으로 뻗지 못하며, 그럴 때 우리의 시야는 사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왜소한 목소리는 더 우람한 목소리, 더 두둑한 보상에 의해 제압되고 만다. 단호한 ‘결사’도 액수만 충분하면 쉽게 돌이켜 세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결사가 여러 공동체 구성원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리하여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삶을 돌려주는 것 외에 어떤 회유책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목소리의 네트워크’라면? 그것은 분명 아주 멀리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사파티스타의 목소리가 그랬다.


“말의 꽃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름 있는 가면을 쓴 얼굴은 죽을지 몰라도, 역사와 대지의 심연에서 올라온 말은 더 이상 권력의 오만에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222쪽)”


 우리의 존엄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우리의 가난은 ‘다른’ 가난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란을 선택했을 때부터, 저들은 우리에게 온갖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팔게 하려고, 항복하게 하려고. (...)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팔지 않기로 했습니다. 항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원주민이고 투사인 까닭입니다. 우리가 투사인 것은 어떤 것을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342쪽)


마르코스는 분명히 말한다. 신자유주의와 권력은 우리를 두려워한다고. 권력자들이 사파티스타의 마을인 라 레알리닷을 공격하고 파괴하려는 군사작전을 계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작고 가난한 마을에 공습기를 띄우고 탱크를 주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존엄한 인간이 라 레알리닷에 살고 있는 걸 발견한 탓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243쪽) 원주민들은 권력이 주겠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자 소비자로, 인권을 가진 개인으로, 도시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부가 내미는 구호품과 평화안을 원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살 수도, 이해할 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자신들의 가난을 무기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오직 존엄을 위해 살고 죽기로 한 사람들.


“평화 회담을 하는 동안 정부 대표들은 존엄이 뭔지 알려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사파티스타 대표에게 존엄이 뭔지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531쪽) 나도 같은 심정이다. 대체 존엄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걸로 이 거대한 신자유주의를 골탕먹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가난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마르코스에 따르면 존엄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다. 존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존엄하게 사는 것뿐이다. 존엄하게 살지 않으면 존엄은 죽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존엄하게 사는 것일까?


나는 이 힌트를 마르코스의 한 편지에서 찾아보고 싶다. 사파티스타의 활동에 민족성이 빠져 있다고 지적하는 작가와 분석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껏 한 일 중에 여러분을 기쁘게 하려고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말하고 행동한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즐거움, 투쟁하는 즐거움, 사는 즐거움, 말하는 즐거움, 걷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448쪽) 어린애들이 군사령부실에 들어와 지도와 나침반과 탄창 사이에서 풍선을 찾는 곳. 아이들의 사탕 선물 때문에 부사령관이 쩔쩔매는 곳. 죽은 사람을 위해 생일 잔치를 하고, 1+1=2라는 수학적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곳.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바로 이런 곳에서의 삶을 위해 살고 죽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존엄한 삶이 아닐까?


전체 3

  • 2020-10-03 13:16
    아, 이런 책이 있었군요! 읽어보지 못했지만 민호샘 글을 통해서 사파티스타의 목소리가, 그들의 말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500살이 넘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마르코스로부터 존엄함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낍니다.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권력이 아닌 것을 두렵게 하지도 않으며, 필요한 것 이상을 요구하지도, 명예와 구호금에 유혹당하지도 않는 존엄함.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뿌리에서 그들의 죽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깊은 목소리를 지닐 수 있는 존엄함. 정말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존엄함입니다!

  • 2020-10-08 21:34
    글쓴이가... 누구신가요....?

    • 2020-10-09 18:02
      민홉니다 ㅎㅎ 이름을 깜빡해서 다시 써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