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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동거동락(同居同樂): 관계에서 삶을 배우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0-09 19:48
조회
342

동거동락(同居同樂): 관계에서 삶을 배우다


1.동거에도 기예가 필요하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예가 필요하다. 연구실 근처로 이사 오면서 연구실이란 공간이 더 친숙해졌다. 단순히 익숙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게 됐다. 생각이 바뀌니 눈에 들어오는 것, 말하고 싶은 것도 바뀌었다. 전에는 어디가 더럽고 어떤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는지를 강박적으로 봤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공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멤버쉽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좀 더 내밀한 관계에서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몇 시에 출근하고, 누가 무엇을 청소하는가, 밥은 어떻게 준비하고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 것인가 등 사소한 일상을 원만하게 해결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고민들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내밀한 고민, 즉 동거에 대한 고민이 아닌가? 그렇다. 나에게 동거는 현재 같이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내가 연구실에서 활동하면서 관계 맺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까지도 포함한다.

연인 사이에 동거하기 위해 슬기로운 약속이 필요하듯, 연구실을 운영하기 위해서도 규율이 필요하다. 연구실은 한 사람의 지성, 성실함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각자의 고유한 존재력이 관계를 형성하면서 돌아간다. 공간을 운영하기 위한 이해가 상충할 때가 있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규율을 세워야 한다. 채운쌤에 대한 수동적 의존도를 줄여보고자 우리는 스스로 출근은 몇 시에 하고, 연락은 어떻게 하고,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지에 대한 나름의 규율을 세웠다. 그런데 규율을 세워도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규율을 따르는 동안 공간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보다 점점 규율이 서로에 대한 참견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게 됐다. 우리가 세운 모든 규율은 한 달이 채 넘기도 전에 흐지부지해졌다.

규율을 세우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먹구구식의 노력이 아니라 동거라는 활동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공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함께 공간을 운영하는 공통 감각이 필요하다. 공통 감각은 규율을 세우는 작업과 나란히 형성된다. 그런데 동거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규율을 세우려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패할 때마다 자책하거나 다른 멤버를 원망했다. 처음에는 이 실패의 요인이 다치기 싫어하는 우리들의 기질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질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은 배움이다. 즉, 적합한 관념을 형성해야만 동거할 수 있는 신체적 소질도 발명될 수 있다.

맹자의 성인과 스피노자의 현자는 동거의 소질을 극한까지 발명한 모델이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역량은 나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고, 변형하는 역량과 비례한다. 맹자에 따르면, 성인의 위대함은 자신의 모습을 일식과 월식처럼 훤히 드러내고 자신을 변형하는 활동을 부단히 반복하는 데 있다. 그야말로 동거의 달인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현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 좋음을 욕구하며,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욕망”한다. 이 아름다운 말을 실천했던 스피노자의 생애를 보자. 자신이 믿는 길이 이성에 따르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스피노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고, 칼을 맞을 뻔하고, 자신이 지지한 정치인들이 대중에게 찢겨 죽었음에도 철학을 멈추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대중에 대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자신의 정서마저 철학을 진행하는 문제의식으로 삼았다. 그의 저술에는 그가 느꼈을 무지한 대중에 대한 분노와 원한, 동시에 그것마저도 넘어간 사유의 이행이 일식과 월식처럼 드러난다.

이들의 삶을 상상해보면, 동거란 결코 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사람들과 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동거에 비하면, 현재 나의 동거는 뜨뜻미지근하다. 합치되는 방식을 제외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가끔 문제라고 느끼는 지점에 불편함을 잠깐 느끼더라도 얘기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얘기하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동거는 사실 동거라 할 수 없다. 동거하다 보면 서로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창피한 모습도 보이고, 상처가 되는 말도 오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일들을 미리 차단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뜨뜻미지근한 동거가 편하고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봤을 때 편안한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매우 해로울 수 있다. 나에게 해로운 줄도 모르고 좇는 것이야말로 위태로운 삶이다. 지금 내가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태도 역시 단기적으로 편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어떤 해로움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연구실 생활은 동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 공간에서 계속 공부하기 위해서는 동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2.동거는 이성이 아닌 정서의 작품

일단, 성인과 현자에게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어떤 자의식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동거에 소극적이게 되는 이유는 나를 드러내는 일이 창피하고, 상대방과 합치되지 않는 지점을 확인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다른 멤버들과 하루 종일 붙어서 생활한다. 그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여주고,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면 생활하는 것이 상당히 껄끄럽다. 어쩌면 나는 은연중에 내가 상대방에게 거리를 유지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거리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독특한 실재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게 자의적으로 거리를 둘 수 없다. 에티카 1부 정리28에 따르면, 독특한 실재는 다른 독특한 실재와의 관계에서만 특정한 방식으로 작업하고 실존하도록 규정되고, 다른 독특한 실재 또한 같은 원리에 따라 실존하고 규정된다. 발리바르는 ‘독특한 실재’를 시몽동의 ‘관개체성(貫個體性)’이란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독특한 실재의 두 가지 특징을 도출해낸다. 첫째, 개체가 다른 개체를 규정하고 규정되는 과정은 비선형적이다. 둘째, 비선형적 과정은 원자적인 항들이 아닌 언제나 이미 독특한 실재들로 존재하는 개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세계는 독특한 실재들이 부단히 합치하고, 해체되고, 또 새롭게 관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합치되는 과정의 반복이다.

정치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홉스의 분석과 달리, 인간의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는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본성상 모든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부터 다른 인간을 돕고, 사회상태에서조차 서로에게 폐를 끼친다. 사회는 서로 돕고 폐를 끼치는 와중에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우리가 말했듯이,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더 많이 인도되므로, 민중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어떤 공통의 감정, -즉 어떤 공통의 희망 또는 공통의 공포, 또는 어떤 공통의 피해에 대해 복수하려는 욕구- 때문에 자연적으로 결속하고,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듯 인도되기를 원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런데 고립 속에서는 누구라도 자기를 방어하는 힘을 갖지 못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얻지 못하므로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상태를 원하고 있으며, 인간이 사회상태를 아주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 스피노자, 황태연 옮김, 정치론61.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회상태에 대한 욕망은 자연상태에서 본성상 도출된다. 예를 들어,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 Y 주위에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X1, X2, X3, X4 네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Y는 마주침의 질서에 따라 그들 네 사람과 단기적으로 적, 약간의 친구, 친구, 약간의 적의 관계를 맺을 것이고, 조건이 바뀜에 따라 관계도 반전될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반전되는 사이클이 몇 번 반복되면, Y는 막연한 경험만으로도 “X 모두가 친구이자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다른 네 명의 이웃 X들도 장기적으로 실존하려면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다 안전해지기 위해 서로에게 의지하는 이들은 자연상태에서조차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인도되듯 인도되기를 원한다”. 서로에게 의지하기로 약속한 뒤로, 이들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이들이 구성한 ‘모두’에 복종하게 된다. 이로부터 잠재적 적으로 출현할 것이라는 서로에 대한 공포는 서로에게 친구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변형된다.

이런 점에서 마트롱은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분을 고립과 연대가 아니라 상호의존의 관계 양상으로 구분한다. 희망과 공포는 불확실한 어떤 것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슬픔이다. 이 둘은 우연한 원인에 의해 언제든 반대되는 정념으로 전환될 수 있다. 특히 자연상태, 동거를 지속할 수 있는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희망과 공포에 더욱 예속될 수밖에 없다. 마트롱은 희망과 공포에 예속되게 만드는 이러한 관계를 ‘동요하는 상호의존’이라 규정한다. 사회상태는 자연상태에서 겪었던 마음의 동요를 줄이기 위해 공동의 약속을 정함으로써 저절로 형성된다. 마트롱은 공동의 약속을 통해 덜 동요하는 관계를 ‘견고해진 상호의존’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은 “독립성에서 의존성으로 이행이 아니라 자연상태의 동요하는 상호의존에서 견고해진 상호의존으로의 이행이며, 정치사회는 바로 이처럼 견고해진 상호의존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견고해진 상호의존도 언제든 동요하는 상호의존으로 이행될 수 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하고 결코 해소된 적이 없듯이, 사회상태에서도 자연상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권리의 양도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다. 누구도 자신이 가진 권리를 온전히 양도할 수도 없고, 양도받을 수도 없다. 성인과 현자의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동거에도 언제나 국지적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성공한 군주를 보고 흐뭇해하는 백성들도 언제든 “이놈의 왕은 언제나 없어지려나? 차라리 우리와 네가 함께 망해버리자!”라는 식으로 돌변할 수 있다.

3.나의 안전, 나의 무능

국지적 투쟁이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해도 “상황이 절대적으로 절망적이진 않다.” 사회상태에서도 자연권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든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여백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상호의존은 동요와 견고함을 반복한다. 맹자의 일치일난(一治一亂)도 사회는 동요와 견고를 부단히 반복하는 상호의존의 사이클 속에서 매번 구성된다는 관념을 전제한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대신하여 천하를 통치한 것은 동요하는 상호의존에서 견고해진 상호의존으로 이행한 결과다. 물론 주나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요하는 상호의존으로 이행했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등장과 함께 다시 견고해진 상호의존으로 이행했다.

문제는 국지적 투쟁이 와해되는 상황이다. 우리는 각자의 안전을 위해 서로에게 느끼는 불편함들을 습관적으로 외면한다. 그러나 공부로 모인 관계는 서로가 배울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는다. 생활과 공부가 분리되지 않는 연구실 같은 경우에, 배움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서로에게 긴장감을 주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을 함께 운영하기 위해 사소한 문제들을 두고 국지적으로 토론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런데 나의 연구실 생활은 공부와 분리되어있다. 글을 가지고 서로에게 코멘트하는 영역과 일상적으로 생활에 참견하는 영역이 구분된다. 나는 멤버들과 일상적으로 농담을 나누고 가끔 서로의 생활에 대해 얘기하는 만큼 공부를 나누지 않는다. 공부와 생활의 분리는 이곳에 공부하러 오시는 선생님들과 맺는 관계에도 나타난다. 나는 선생님들의 글에 코멘트하는 만큼 보다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이 두 현상은 동거에 소질이 없는 신체에서 비롯된 동일한 문제의 다른 표현이다.

동거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나를 변형하고, 타인에게 작용을 가하는 역량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역량의 감소는 그 자체로 존재의 결함을 의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역량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역량의 감소는 슬픔이고, 슬픔은 무능을 표시한다. 오직 기쁨만이 우리의 역량을 함축한다. 기쁨을 느낄 때만 우리는 또 다른 관계를 구성하도록 촉진된다. 이제는 동거하고 있지만 동거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역설을 이해할 수 있겠다. 동거는 역동적 관계 맺음 속에서 구성된다. “인간은 서로 힘을 결집함으로써만 실질적인 독립성과 현실적인 권리를 누린다”. 따라서 동거는 매우 실정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동거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변용 역량이 증대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한 실재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나를 온전히 내어놓지 못하는 이유도 변용 역량의 감소로 설명할 수 있다.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변형시킬 역량을 발휘하지 않겠다는 의지작용이다. 의지작용은 주체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자유의지는 실재가 상호의존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유의 무능력이다.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은 겪음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유의 무능력이다. 매우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의지작용은 그것들이 사유의 무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나는 내가 노력하면 관계가 달라지고, 노력하지 않아서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자유의지주의자다. 그러나 내가 이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이미 관계로 남김없이 드러난다.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자유롭게 만드는 지평을 겪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모두가 자신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성인처럼 일식과 월식처럼 드러내고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멤버들에게 속내를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갑자기 끈끈한 우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전과 다른 모습에 낯설어할 테고, 어쩌면 다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이 지평에 나를 더 열어두지 않는 한, 자신을 변형하고 나아가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트롱은 ‘한 사회의 정치적 소질은 토론할 수 있는 역량에 비례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국지적 투쟁이 토론과 같은 활동으로 전유되는 한에서, 갈등은 그 자체로 정치적 소질을 개발하는 기회가 된다. 반면에 갈등을 회피함으로써 안정된 사회는 역설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무능력한 사회다. 일례로, 모세가 다스린 신정은 극도로 안정된 사회다. 히브리 시민들이 정치적 사안을 처리하는 방식은 토론보다 모세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절대적 복종은 사회를 안정되게 만들어도 실상 스스로 작은 변화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작은 정치역량을 표현한다. 따라서 불편함을 외면함으로써 아무리 안정을 조장해도 견고해진 상호의존으로 이행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맹자에 따르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시대들은 모두 사악한 이론(邪說)과 포악한 행위(暴行)가 등장함으로써 시작됐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사악한 이론’과 ‘포악한 행위’는 정치역량의 증대를 방해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나의 안전주의적 태도 역시 공동체의 실존을 위협하는 ‘사악한 이론’과 ‘포악한 행위’였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자리에서 시도할 수 있는 실천은 무엇일까? 스피노자는 오직 경험에 근거하여 세상을 판단하는 인식을 ‘상상적 인식’이라 규정한다. 그것은 당장 내 몸에 느껴지는 자극에 대한 반응적 인식이고, 익숙한 습관에 따라 대상과 관계 맺는 의지작용이다. 반면에 지금 당장 내가 느끼는 정서를 보다 많은 것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이 ‘이성적 인식’이다. 그것은 감각을 계기로 다른 이해를 구성하려는 적극적 인식이고, 익숙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작용이다. 경험적으로 동거를 조직하는 것이 이롭다고 느껴도, 경험만으로는 상상적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당장 이성적 인식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험에 근거하여 자주 단기적 좋음에 매몰된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좋은 마주침을 구성하는 데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성적 인식이 무적이 되는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가끔씩 이대로 가다가 연구실이 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울 때가 있다. 앞으로 우리가 연구실 운영에 적극적이어야 이곳이 돌아갈 텐데, 막상 우리의 동거할 수 있는 소질은 좀처럼 개발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안함 때문인지, 나에게 상상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넘어가는 벽은 매우 높게 느껴진다. 이 공포에 예속되지 않고 어떻게 동거할 수 있는 소질을 발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지금 내가 성인과 현자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동거할 수 있는 실천은 어떻게 발명할 수 있을까?

4.기쁨의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

성인과 현자가 다른 구성원들에게 갖는 영향력, 그들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실존을 지속하려는 노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작업과 타자와 동거하기 위한 노력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타자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자신이 관계 맺는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실존하기를 욕망한다. 권리는 나의 실존을 구성하는 욕망, 스스로 마주침을 구성하려는 노력만큼 행사된다. 요컨대, ‘권리 즉 역량’이다.

정치적 권리는 주체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사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성인과 현자의 정치력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거하고자 하는 실존에 대한 욕망만큼 발휘된다. 나의 안전주의적인 실존 또한 성인과 현자가 발휘하는 역량과 동일한 자연적 필연성에 따라 역량을 발휘한다. 그러나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동거할 수 있는 소질이 개발되지 않는다. 보다 서로를 기쁘게 만드는 동거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실존하려는 노력 속에서 구성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정치론》의 탐구 목적은 대중의 역량과 통치자들의 역량 사이의 균형점을 발견하는 데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각자는 자신의 권리를 모두 양도할 수 없기 때문에, 통치자는 대중과 결코 완결되지 않는 힘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도모해야 한다. 통치자는 구성원들이 마치 자신의 실존을 욕망하듯 국가가 실존하기를 바라는 만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통치자는 구성원들이 기꺼이 국가에 복종하도록 법과 제도를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 이 개혁이 얼마나 구성원들의 실존에 유리하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통치자의 권리도 구성된다.

성인과 현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구성한다. 다만 동양의 성인은 철학자이자 통치자다. 그는 타인을 통치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통치한다. 전통적으로 유가에서 통치는 ‘바로잡는 것(正)’이다. 바로잡는 행위는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 실존을 위협하는 사악한 이론과 포악한 행위를 몰아내고, 개인적으로는 본성에 잠재된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로막는 사욕(私欲)을 제거하는 것이다. 맹자에게 수신(修身)과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가 말하는 현자는 엄밀히 말해서 통치자와 구분되는 철학자다. 마트롱은 사회의 외적 조건으로 철학자를 얘기했지만, 철학자와 통치자는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구별된다. 철학자가 절대 주권자가 된다 하더라도,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전의 통치자들과 동일한 방법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인과 현자는 그들이 더 많은 것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들이 자신의 실존을 법률과 제도의 집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 실천은 역량의 증대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맹자에 따르면, 은나라 주왕은 통치자가 아니라 일개 사내다. 그가 왕으로 있는 동안 나라를 다스린 것은 그의 역량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의 가문에 복종한 신하들 덕이다. 주왕은 법률과 제도를 시행했을지 몰라도 그것은 나라를 통치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행은 왕으로서의 그 자신의 역량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과 현자는 모두가 독특한 실재로 살아간다는 것을 먼저 깨닫고 동거하며 살아가기를 먼저 욕망하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상상적 인식에 따라 반응적으로 기쁨을 좇을 때, 그들은 이성적 인식에 따라 기쁨을 조직한다. 이로부터 무지한 자들과 성인·현자의 삶은 그들의 태도만큼이나 상이해진다. 무지한 자들은 자신에게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 모든 마주침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성인과 현자도 무지한 자들과 동일하게 기쁨과 슬픔을 겪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을 겪게 한 모든 요인들이 파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슬픔을 파괴하는 방식은 “대상의 부분들에 우리의 관계와 합치하는 새로운 관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슬픔 또한 작용 역량이 증대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인(仁)을 실천하는 두 측면 중 하나인 서(恕)도 상대방의 마음(心)과 합치하는 관계(如)를 형성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이는 단순히 동일시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방의 공통된 이해를 발명하는 것이다. ‘서’를 풀이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라(己所不欲 勿施於人)”다. 맹자는 걸왕과 주왕의 정치적 실패 요인으로 바로 이 ‘서’를 실천하지 않음에서 찾는다.
걸왕과 주왕이 그의 천하를 잃은 것은 그의 백성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의 백성들을 잃은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얻는 도리가 있으니, 그 백성들을 얻으면 곧 천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백성들을 얻는 도리가 있으니,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곧 백성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 도리가 있으니,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고 또 늘려 주며, 그들이 싫어하는 일은 행하지 않으면 된다(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 得天下有道: 得其民, 斯得天下矣; 得其民有道: 得其心, 斯得民矣; 得其心有道: 所欲, 與之聚之, 所惡, 勿施爾也).” - 맹자》 〈이루 상9

여기서 맹자는 걸왕과 주왕의 실패를 천하를 잃고, 백성을 잃고, 백성의 마음을 잃은 3단계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잃은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그들이 싫어하는 일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싫어하는 일이 과연 통치자인 나의 실존에도 불리하게 작동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즉,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으로 나와 합치되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슬픔이 발생하는 조건에 대한 명석·판명한 이해로부터 도출된다. 그 다음에 나의 실존에 불리한 것이 실제로 백성들의 실존에도 불리한지 사유하고 고찰해야 한다. 여기까지 거친 이후에야 백성들의 마음과 합치할 수 있는 정치적 명령을 시행(試行)할 수 있다. 따라서 ‘서’는 단순히 우리를 슬프게 하는 실천의 금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이르기 위해서는 백성들과 함께함으로써 즐거움이 느껴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요컨대, ‘서’는 기쁨의 마주침을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이다. 이는 마트롱이 분석한 원리로서의 ‘민주적’과도 통한다. 모든 정치적 실천은 ‘서’를 원리로 이루어진다. 맹자에게서도 서로를 기쁨으로 마주치게 하는 사유실험이 정치적 실천의 출발점이다.

5.‘나’가 ‘우리’가 되는 체험

성인과 현자의 실존이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이유는 자신의 실존을 집합적으로 인식하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성이 무적이 되는 문턱을 지났을 것이다. 즉, 이성적 인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을 충분히 신체에 새긴 자들이다. 반면에 이성이 무적이 되는 문턱 언저리에도 가지 못한 나 같은 경우에는 이성적 인식과 정념을 결합시키기 위해 애쓰는 정도다. 그러나 두 행위는 기쁨의 마주침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안전한 경계를 얼마나 넘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안전한 거리를 고수하며 생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연구실 동거를 지속하기 위해서 ‘나’ 혼자 끙끙대는 태도가 얼마나 무능력한 것인지, 당장 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연구실 생활도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구실은 특정 계약이나 합의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신뢰에 의해 작동하는 공간이다.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연구실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신뢰는 서로에게 맞는 부분만을 찾는다고 해서 형성되지 않는다. 더 큰 역량의 증대를 도모하지 않는 안전주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지속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연구실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이 매우 다행스럽기도 하다. 공동체에 있는 것만으로도 개인으로 있었을 때 할 수 없었던 일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관계에 대한 고민 또한 공동체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겪지만, 동시에 이러한 문제들을 통해서 보다 자유로운 삶을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공동체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념적 예속이 극대화되지 않도록 ‘그럭저럭’ 조절된다.

앞으로도 연구실 생활을 지속하려면 나의 실존을 확장하는 사유실험, 서로의 안전거리를 교란하는 참견 등을 해야 한다. 온전히 나를 이 실험에 던져본 적이 없어서 두렵지만, 실험하지 않는 이상 무기력한 건 매한가지다. 용기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끝내려고 한다.
실로 아직까지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 - 에티카 3부 정리2의 주석.

글 : 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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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1 16:30
    나에서 우리가 되는 체험을 실험하고 있는 규창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