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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 흥분에서 기쁨으로 : 강렬함이라는 우상을 넘어서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10-11 15:26
조회
541

흥분에서 기쁨으로 : 강렬함이라는 우상을 넘어서



폼나는 삶을 꿈꾸는 냉소주의자


내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 ‘달라지고 싶다’와 ‘나는 달라질 수 없어’. 열망과 체념, 이상과 냉소. 둘은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 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달라질 수 없음 혹은 달라지지 않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역으로 현재를 ‘달라지지 않고 있음’으로, 또 그것을 문제로 느끼지 않는 사람은 달라지고자 열망하거나 달라진 상태를 꿈꾸지 않을 테다. 사실 그동안 나는 이 두 가지 마음 중에서 주로 후자에 대해 이야기해왔던 것 같다. 그것은 냉소, 무기력, 자기비하로 조금씩 그 꼴을 바꿔 내가 쓰는 글들에 등장해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냉소란 지금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어떤 좌절 섞인 못마땅함을 삶에, 사회에, 세계에 투사한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기력이란 아무런 의지도 욕망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회피하는 데에서 오는 어떤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교착상태였다. 자기비하는 머릿속의 이미지에 비추어 ‘나’를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나는 달라질 수 없어’를 공고히 하고 현재 상태에 안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자기기만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의 밑바탕에는 ‘난 달라질 수 없어’, 그리고 ‘난 달라져야 해’가 깔려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는 말해진 것들로부터 말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읽어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냉소니 무기력이니 하는 말들, 그리고 그러한 심리적 상태들에 전제되어 있던 바는 ‘달라져야 한다’라는 믿음 내지는 ‘달라지고 싶다’라는 욕망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못마땅하기에 다르게 되고자 하는가? 무엇이 되고 싶기에 현재의 내가 이토록 불완전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사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불만이 많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구구절절 늘어놓아보자. 작은 키를 비롯하여 매력적이라고 보아주기는 힘든 외모, 남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성향이 다른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모나고 옹졸한 성격, 남들을 감화시키거나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엔 평범한 나의 재능, 일상을 단단하고 독립적으로 유지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성실성의 결여, 어떤 문제와 뜨겁게 씨름하며 예민하고도 고결하게 투쟁하며 살아가기엔 너무나 둔하고 안온한 나의 감수성과 욕망, 무모하고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나의 자의식과 안정지향적인 성향.

와우,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내가 은밀하게 열망해온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바로 특별함이다. 낯 뜨겁게도 나는 뭔가 동경할 만한, 폼나는 삶을 살고 싶은 모양이다. 아직도 내 마음 한쪽에는 특별하지 않을 바에야 산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있다. 특별하고 폼나는 삶을 사는 것은 고작해야 한줌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타협과 권태와 불만족으로 얼룩진 평범한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나는 ‘동경할 만한 삶’을 동경하고 ‘폼나는 삶’을 우상화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이 폼나는 삶인가? 돈을 무지막지하게 벌고 흥청망청 쓰는 삶은 아니다. 공공의 선이나 대의에 투신하는 삶도 아니다. 엄청난 명성도 딱히 필요 없다. 내가 꿈꾼 것은 무언가 벅차오를 정도로 강렬한 삶이었다. ‘강렬한 삶’의 이미지는 조금씩 달라져왔다. 아주 어렸을 때는 마법 같은 모험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얽매인 데 없이 세계를 유랑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공부를 시작하고서는 이러한 동경이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다른 이미지들이 추가되기도 했다. ‘오늘’과 뜨겁게 불화하는 니체적 자유정신의 삶, 자기 구원을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의 삶, 푸코와 일리치에게서 엿보이는 고결한 비판자의 삶 등등.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쉽게 동경하고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상적인 인간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동경이 냉소와 결합되어왔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우상을 하나 만들어낼 때마다 나에게는 원죄가 하나씩 추가되었다. 자유롭고 무모한 삶을 동경할 때는 나의 가축 같은 안온함이, 매일매일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고행자-철학자의 모습을 우상화하면 나의 게으르고 자극에 쉽게 휘둘리는 성향이 죄악시되었다. 특별하고 강렬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내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로 나는 나의 성향과 욕망과 성격 등등을 심판해왔다. 어쩌면 내가 냉소, 무기력, 자기비하라고 불러온 것들도 우상에 못 미치는 나 자신과 현실에 대한 분풀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동경과 냉소는 참으로 역설적인 조합이다. 어떻게 만화 같은 삶을 꿈꾸는 자가 동시에 무엇도 시도하지 않으려는 냉소주의자일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는 강렬한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방기하고 마는 것일까? 여기에는 무언가를 동경하는 일 자체에 내재한 어떤 함정 내지는 기만이 잠복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동경에 깃든 원한

먼저 동경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내가 버릴 수 없었던 생각은 동경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반짝반짝 거리는 재능을 발산하는 사람들, 나와는 다른 강도로 삶을 마주하는 위대한 사상가들, 멀리 갈 것 없이 내가 가지지 못한 덕목들(가령 성실함, 책임감 같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변인들. 그들의 존재는 나의 불완전함을 매순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저런 능력들과 덕목들을 지닌다면 지금처럼 내 삶이 어정쩡하고 미지근하고 볼품없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이런 공상은 곧바로 허무주의를 낳는다. 저들과 같지 않으니, 나는 안 될 거야 아마.

그런데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동경하고 있는 나의 자리가 아닐까?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에서 니체는 천재 예찬이 허영심으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책세상, 179쪽). 아주 뛰어난 누군가를 희귀한 우연이나 신의 은총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그를 자기 자신과 견주어 볼 때 비롯될 불편함과 열등감을 회피하고 차단하려는 방어기제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재 숭배가 보여주는 것은 그 천재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를 우상화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위안을 구하고자 하는 숭배자들의 의지라는 것이다. 숭배자들은 사실 자신들이 동경하는 대상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천재들이 사물들에 쏟는 부단한 관심, 그들의 거듭되는 자기극복, 그들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단순한 작업들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만을 보고 천재들의 능력을 신적인 것(다시 말해 우연적이고 마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믿어버린다. 자기 입맛에 맞게 숭배의 대상을 신비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런 영혼들의 광포해진 숭배심은 만인이 신의 자식이라는, 예수가 가르쳤던 복음적 평등권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 그들의 복수는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예수를 치켜세우고, 그들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 예전에 유대인이 자기네 적에 복수하기 위해 자기네들의 신을 자신들로부터 분리시켜 높이 치켜세웠듯이.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신의 아들 : 이 두 가지가 다 원한의 산물이다……”(니체, 《안티크리스트》, 책세상, 270쪽)

그렇다면 숭배의 대상을 왜곡하고 신비화함으로써 숭배자들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숭배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더 나아간다. 니체 시대의 교양인들과 민중들의 천재 숭배가 허영심의 소산이었다면, 그리스도교도들의 예수에 대한 숭배의 배후에는 원한과 복수심이 있다. 예수를 신격화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를 신으로 만듦으로써 인간과 그들이 놓인 삶의 조건들을 불완전하며 타락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삶과 실천을 간단히 왜곡해버린다. 인간 예수를 신으로 만들고 유대인들의 민족신을 보편적인 사랑의 신으로 만듦으로써 그들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를 수립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죄가 있으며 저주받아야 할 것으로 보는 인간의 의지”(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442쪽)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목자의 갑작스럽고 비참한 죽음 앞에서 그를 죽인 자들을 용서할 수도 없고 그들에 맞서 싸울 수도 없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은 숭배함으로써 복수한다. 단지 로마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에 처하도록 한 삶 전반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동경하고 숭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 인간이 놓인 필연적 삶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마치 사물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려는 예술가의 부단한 시도와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기 위한 반복적인 훈련들을 도외시하고 그 결과물로서의 작품만을 보고서는 그로부터 신적인 재능이나 신비한 영감 같은 부적합한 원인들을 상상하며 수동적으로 경탄하는 관객들처럼, 동경하는 자는 누군가의 삶이나 행위나 능력을 주어진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열망한다. 여기에는 어떤 것을 그것을 구성하는 필연적 조건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상은 단순히 인식의 오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원한과 복수심으로 충만한 반응적인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동경하고 숭배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교도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 동경과 숭배 자체에는 어떤 병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있다. 동경과 숭배란 삶으로부터 유리된,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어떤 이상적 관념을 끌어옴으로써 지금 여기를 결여로 물들이는 부정적이고 반응적인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의 삶의 조건이 아닌 것은 삶을 해친다.” (니체, 《안티크리스트》, 책세상, 225쪽)

나는 습관적으로 나의 문제를 실천과 노력의 결여에서 찾곤 했다. 나도 다른 누구들처럼 치열하게 살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난 너무 게으르다! 그러나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잘못 설정된 인과다. 여기서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 사이의 불균형이 아니다. 사실 우상을 만들어내는 자는 우상을 만드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실천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굳이 말하자면 나의 게으름은 노력하지 않는 나태함과 의지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동경하는 태도 자체에 있다. 나의 게으름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완벽한 상태, 삶과 분리된 삶의 이미지에 맹렬하게 집착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동경하고 집착하는 게으름을 해부해보아야겠다.

그리스도교적 이기심 : ‘어서 나를 구원해주시오!’

질문해보자. 자유로움, 치열함, 성실함 등을 우상화할 때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있다. 나는 정말로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정말로 스스로가 불완전하고 결여로 가득 찬 존재라고 느낀다면,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의외로 내 대답은 ‘아니오’였다. 지금과는 다르게 느끼고,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 즉 정말로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이해가는 것을 원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의 관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을 교정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생활습관은 그대로 두고 좋은 치료를 받고 좋은 것을 먹는 것으로 병이 낫기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나는 나 자신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단순히 좋다고 생각되는 미덕들을 추가로 탑재함으로써 삶을 더 그럴듯하고 더 폼나는 것으로 바꾸기를 원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행위, 나의 자기극복, 나의 변이가 제거된 구원을 꿈꿨던 것이다.

이것을 니체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교적 이기심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자연법칙이 깨질 것을 기대하는 것, 세계가 (가만히 있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다른 나, 다른 삶,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은 역설적이게도 조금도 변하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반응적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에는 지금 여기에서 부단히 작동중인 힘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조금씩 다르게 되어가고 있는 중에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무시와 평가절하가 함축되어 있다. 판타스틱하고 스펙터클하고 로맨틱한 삶에 대한 꿈. 이것을 현실로 끌어내려 보면 “사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사는”(니체, 《안티크리스트》, 책세상, 274쪽)삶의 태도가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낭만주의자와 냉소주의자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숭배하고 우상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에 독을 타는 일이다. 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통찰인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우상이란 우리의 상식적 이해를 훌쩍 넘어 확장된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미신적 숭배나 합리적 정신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맹목적 믿음 같은 것이 아니다. 니체는 지금 여기에서 작동중인 것들을 부정하도록 하는 모든 고착적 관념들과 싸운다. 오류나 미신만이 아니라 진리라고 불리는 어리석음과도 싸운다. 니체에겐 존재, 의지, 원인과 결과 같은 중립적이고 무해하며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우상들이다. 그것들이 우상인 이유는 그로부터 생성변화하고 있는 삶과 분리된, 실재성이 결여된 관념들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니체가 맞서 싸우고자 하는 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 일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거 없는 믿음만이 아니라 근거에 대한 믿음까지도 포함한 것으로서의 믿음 그 자체 혹은 무언가를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떤 ‘토대’를 찾으려는 의지다. 생성과 변이 속에서가 아니라 확고한 토대 위에 삶을 가지런히 세우고자 하는 욕망. 그러한 욕망을 품은 자는 자신의 행위 안에서 스스로의 구원을 구성해가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실현된 구원과 해방과 자유의 상태에 안착하기를 꿈꾼다. 그게 어떤 형태이든 간에, 도달할 수 있건 없건 간에 삶으로부터 일종의 ‘약속의 땅’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대를 구축하고 믿음에 의존하는, 그리하여 삶에 실재(다시 말해 약속된 것, 삶의 토대이자 이상으로 삼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무엇)와 가상(우리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덧없는 생성의 차원)의 이분법을 도입하는 자들이 원하는 바다.

자, 다시 나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보자. 그동안 나는 냉소와 무기력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왔다. 그게 얼마나 그릇된 생각인지, 어째서 그것은 반응적인 의지의 표현인지 반복적으로 스스로에게(?) 입증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결코 의심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전제를 의심하기보다는 달라지지 않는, 달라지려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비난하고 비하하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달라져야 한다’는 나의 전제에는 온갖 환상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치열하고 성실하고 능동적인 삶에 대해 뻔질나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들을 갖다 붙여도 그것은 결국 우상일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어떤 완전한 상태로, 도달된 구원의 이미지로 나의 삶에 끌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 한 늘 결론은 똑같았다. 어딘가에서(그러나 대체 어디서?) 결여된 성실함과 항상성을 끌어와 냉소와 무기력을 극복하는 것. 이런 결론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못마땅함을 글로 풀어냄으로써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책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이상으로 무엇인가가 생산되거나 긍정되지는 않았다.

내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한 것은 어떤 확실성이었던 것 같다. 변치 않는 토대와 이상, 그러니까 완벽한 삶에 대한 약속 말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되는 대로 사는 인간이라고, 나 자신을 방치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냥 사는 삶’을 거부하려는 강한 의지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완전한 상태에 대한 열망으로 나의 시선과 욕망은 지금 여기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들에 집중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방기는 이러한 집착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상적 상태에 대한 갈망을 끊어낼 수 있을까? 도달해야 할 목적지로서의 구원에 대한 상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삶이란 무엇일까?


강렬한 삶이라는 우상을 넘어서―흥분에서 기쁨으로


이상적인 삶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이건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이상은 관념으로 존재할 때에만 이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적 의미에서 ‘실재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자들의 ‘실재’ 개념에 부단히 균열을 내고 그것을 해체하고 비웃고 훌쩍 넘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좀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살아 있음은 늘 변수를 수반한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아무리 이상적인 삶을 상상하더라도, 그리고 설혹 그것이 그대로 실현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분명 예상치 못한 균열과 그로 인한 또 다른 번뇌가 수반될 것이다. 나는 치열한 삶을 우상화하면서 거기에 어떤 확신에 찬 충만함과 고양감 같은 것이 패키지로 딸려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치열한 삶이라고 생각한 삶의 면면들을 떠올려보자. 니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늘 하숙집을 전전하며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글을 쓰고 그런 과정 속에서 거듭하여 회의와 불확실성을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삶이 그대로 완전하고 충만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완전함과 충만함은 내 머릿속의 관념에 부합하는 무엇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렬하고 충만한 삶. 이것은 내 머릿속의 관념일 뿐이다. 나는 거기에 매일매일이 익사이팅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늘 불타오르고 새로운 문제의식이 샘솟는 그런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봐도 누군가 그렇게 늘 그렇게 클라이맥스 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가 삶을 지속할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워진다. ‘강렬함’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너무나 편협한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푸코도 일리치도 자신들의 화려한 사유를 펼쳐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도서관과 문서고에서 무미한 시간들을 겪어냈겠는가? 아니 사실 그러한 과정들을 절정에 이르기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지겨운 과정 같은 것으로 보는 것 자체도 나의 편견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마약중독자나 꿈꿀 법한 삶을 나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적합한 관념조차도 나의 삶에 ‘작동’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실재를 운동과 생성의 관점에서 볼 때, ‘가상’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며 “‘참된 세계’는 가상세계에 덧붙여서 날조된 것일 뿐”(니체, 《우상의 황혼》, 책세상, 98쪽)이라고 할 때 그는 가상과 실재의 구분 자체를 없애고 있는 것이지 관념과 현실, 인식과 삶, 정신과 신체에 또 다른 분할을 수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도들이 자기원인으로서의 신 관념을 생성에 앞세울 때, 신과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수립할 때, 그들은 단순히 그릇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삶 안에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과 죄와 내세와 영혼 같은 ‘가상’들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들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다. 마찬가지로 강렬한 삶에 대한 나의 망상도 나의 삶에 작동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던가? 어떤 삶의 국면들을 회피하고 외면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침체기 비슷한 것을 겪고 있다. 공부에 집중도 안 되고, 꾸역꾸역 책 한 권을 낸 뒤로 글쓰기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은 지 오래고, 연구실 생활 자체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불성실로 일관하고 있는지라 좀처럼 스스로를 정당화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개 들고 다니기 힘든 나날들이 이어지다보니 이제 그냥 나는 이런 인간인가보다 하고 자포자기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면 공부가 나랑 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가 새삼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말로, 단 한번이라도 이 침체기를 제대로 직면해본 적이 있던가? 나는 공부가 잘 풀리고 새로운 영감과 문제의식이 샘솟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던 아주 짧은 시기를 떠올리거나 어리석게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체기도 소강상태도 없이 계속해서 활활 타오르는(!) 삶을 상상하면서 조급하게 내게 찾아온 이 침체기를 건너뛰고자 했다. 그러면서 현재를 결여된 상태로 만들었다. 내가 도저히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나의 역량과 나의 삶이 지금 이러한 방식으로 남김없이 모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정과 외면으로 일관할수록 나는 오히려 나에게 찾아온 이 국면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갔다.

우상은 나의 삶의 동력이 되었다. 분명 그것은 불편하고 막막한 현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때때로 나는 그것을 지지부진한 현실을 잊도록 하는 흥분제로 삼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이상적인 상태에 비추어 나 자신을 비난하고 또 나의 삶을 부정하면서 일시적으로 힘이 고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니체가 말하듯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쾌의 감정을 느끼고자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뜩치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힘의 고양을 느끼고자 발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의 감정을 오직 특정한 상태로부터 귀결되는 결과의 차원으로부터 얻고자 했다. 그럴수록 자연스레 일이 잘 풀려주고 상황이 원만하게 해결되고 그리하여 외부적 조건으로부터 자연스레 쾌감이 결과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는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연재하는 글이 몇 번 그럴듯하게 써지다가 잠깐 삐끗하면 그대로 길을 잃었다. 또 그 와중에 공부나 나의 일상 바깥에서 더욱 손쉬운 쾌감이 주어지면 쉽게 거기에 혹했다. 나는 분명 쾌감을 좇았지만 이때의 쾌감이란 니체가 말하는 기쁨, 즉 힘이 증대되고 장애가 제거되는 느낌이 아니라 현실을 잊게 하는 일시적 흥분이었다. 흥분의 추구에는 이미 침체된 상태를 정면으로 겪어내지 않으려는 부정적 힘의지가 작동하고 있었고, 따라서 모든 흥분이 그렇듯 그 뒤에는 어김없이 ‘현자타임’, 그러니까 냉소와 권태와 무력감이 뒤따랐다.

우상 숭배는 흥분을 선사한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교회에 나가겠는가? 다만 우상을 만들어내는 의지의 근본적인 동력은 생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기에 그 흥분은 강렬한 만큼이나 의존적이고 취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흥분을 갈구하는 삶이 아니라 기쁨을 동력으로 삼는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보려 한다. 이는 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아니다. 기쁨은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쁨의 추구는 기쁘지 않은 다른 모든 상태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기쁨이란 무엇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겪음을 긍정하며 나아가는 자에 부단한 이행 속에 깃드는 무엇이 아닐까 한다. 어떤 고통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고착되거나 고통이 없는 상태를 상상하며 그것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온전히 겪어낼 때,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하여 이전과는 다른 지점에 도달하고 그 결과 다른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아무리 큰 고통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이행과 자기변환 구성해낸다면 그때 우리의 동력은 슬픔이나 원한이 아닌 기쁨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은 (흥분과는 달리)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쾌한 상태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까지 포함한 이행과 변이, 생성을 긍정하도록 한다. 기쁨이 고통과 대립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점 얼룩도 없는 매끈한 행복과 완벽하게 세팅된 안락함을 꿈꾸는 나약한 이상주의자일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침체기를 우상에 의존하지 않고 담담히 겪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고 싶다. 우선 지금 이렇게 답답하고 막막한 상태 속에서 나 자신이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백퍼센트 인정해야 한다. ‘다르게 될 수 있었던 나’는 없다.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앞으로 도래할 것과 앞으로 될 모든 것에 대한 또 하나의 법칙, 또 하나의 필연성인 것이다. 그에게 ‘달라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에게 달라지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니체, 《우상의 황혼》, 책세상, 111쪽)또한 내가 침체기라고 부르고 있는 이 국면 안에도 늘 상이한 힘들이 진동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마뜩찮게 여기는 나 자신의 모습 속에도 사실은 계속해서 어떤 변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달라진’ 상태, 이러한 불편하고 답답한 상황이 극복된 상태를 우상화하는 시선 속에서는 지금의 이 국면과 그 안에 있는 내가 늘 똑같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조금씩 달리지고 있는 욕망과 느낌, 기운들을 속에서 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달라진 상태’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만 ‘지금 다르게 되어가는 중에 있는 나’를 긍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내가 긍정하는 태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고통이 고통이고 침체기가 침체기인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다만 외면함 없이 그것을 겪어낼 때 이 침체기는 나를 미지의 영역으로 인도해주는 변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미지의 영역이란 내가 상상한 이상적 삶은 아닐 테고 거기서도 또 다른 번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동안 나는 외부의 힘들에 의존하여 공부를 해왔다. 누군가의 칭찬과 인정, 다른 이들과의 비교로부터 비롯된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식, 우연히 내게 호의적으로 작용했던 여러 인연조건들의 작용, 접해본 적 없던 새로운 사상들이 주는 자극과 흥분 등등. 그렇게 본다면 이런 침체기는 내가 언제라도 겪어야 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이 시기가 위기인 동시에 외부적 조건들에 대한 의존 없이 나의 공부와 활동을 삶을 지속해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기회이기도 하다는 뜻일 테다. 이제 나는 이러한 위기-기회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겪어내고 싶다. 해결되고 극복된 상태를 상상하며 회피하려 하지 않고, 약속과 보장이 없는 자리에서 힘을 발휘함으로써.

글 : 정건화 (절차탁마NY)

전체 4

  • 2020-10-12 10:43
    얼마 전 포탈에서 고대 로마서에 나오는 노예를 효율적으로 부리는 법 - 1.칭찬 2.포상(고기,소금 그리고 은화) 3.업무교체 4.진급(노예장) 5.여행기회(시중들면서) - 을 보면서 현대인들과 로마 노예는 무엇이 다른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상 타인의 인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니체가 고귀한 강자를 강조하고 있는 이면에는 인간이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면 이러한 로마 노예의 욕망, 현대인의 욕망은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그에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점을 직면하며 살아가고 싶어서 공부를 지속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외부 우상에 대한 열망은 강한 힘을 가진 것 같습니다.
    침체기라는 부정적인 말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규정짓기보다 건화샘이 에세이 끝에 새롭게 발견한 위기-기회로 이 순간을 규정짓게 된다면, 지금 자기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과 다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 같아요. 건화샘의 마음이 한껏 담긴 이 글에서 글쓰기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건화샘의 기쁜 공부를 응원합니다.

  • 2020-10-13 21:58
    건화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네.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동경하고 집착하는 게으름. 나에게도 힌트가 되는 말이야. 자칭 지지부진(?)했던 2년간의 시간들을 겪은 힘으로 자신을 만나는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서 참 반갑네.

  • 2020-10-16 17:18
    같은 뜻의 말을 해도 결과 색깔이 다 다르게 말하는 것 같아요. 수준의 문제가 뉘앙스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걸 건화샘의 글을 보면서 매번 느낍니다. 건화샘의 '침체기'는 '침체기'가 아니네요. 깊은 바닷속의 수압이 자기 삶의 조건이 된 물고기들은 그 속에서 자기만의 불을 만들죠. 이 글은 제가 읽은 건화샘의 글 중 가장 사유의 치밀함이 감긴 아름다운 글이네요. 필사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건화샘을 통과한 나되기!!

  • 2020-10-19 20:02
    찬찬히 다시 읽으니 에세이 발표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문제를 다르게 보게 된 건화샘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 니체를 읽으면서 서둘러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빨리 뭔가를 써야겠다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요. 말해진 것들로부터 말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는 문장이 콕콕 찌릅니다. 저는 우상화의 문제를 제 마음대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리스드교적 이기심이나 삶을 구성하는 필연적 조건과 연결해서 쓴 건화샘 에세이 읽으니 안티크리스트와 우상의 황혼이 갑자기 확 와닿고 그러네요. 삶의 필연성에서 오는 긍정 이거는 진짜 어려운 문제인데,, 이 문제를 계속 더 고민하고 싶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