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사오정의 관찰일지] 혜원 ‘곰에서 사람으로’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09-20 22:10
조회
261
연구실에서 발소리로 누구인지 맞추기를 한다면, 누구라도 헷갈릴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계단을 오를 때도, 주방과 홀을 오갈 때도, 공부방에서도, 쿵! 쿵! 쿵! 울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은 혜원이 외엔 없기 때문이다. 걷는 모양새를 볼라치면 뒤꿈치로 바닥을 찍었다가 재빠르게 들어 올리는데, 얼핏 보면 사뿐사뿐 야무지게 걷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걸핏하면 넘어지고 엎어지기 일쑤다. 소리만 요란하지 하체는 부실하다. 걸음걸이가 어딘가 불안불안해서 모두들 한 마디씩 조언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도 걸핏하면 휘청거린다. 사실 올 해 초 한 달 동안 이란 여행을 하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단지 걷는 자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행 중 비 오는 날 평지에서, 산에서 내려오다, 빙판 위에서, 쿵! 소리를 내며 진창에서 굴러도 혜원이는 무심하게 툭툭 털고 일어나곤 했다. 크게 넘어져 만신창이가 된 혜원이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가 콜라를 권했기 때문이다. 습관을 바꾸는 차원에서 평소 즐겨마시던 콜라를 금지당했던 혜원이는 당당하게 마실 기회를 한껏 누렸다는. 

길 안내를 하며 당당하게 새우깡을 받아내는 손꾸락!

걸음걸이에 이어 혜원이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곰이다. 백곰. 하얗고 토실한 외모도 물론 한몫했지만 곰이라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먹을 거에 대한 본능적 반응 때문이다. 곰돌이 푸가 벌꿀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듯 혜원이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딴 사람이 된다. 평소 무심하고 시크한 표정과 달리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혜원이는 단순히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요리법이나 맛집에 대한 지식도 방대하다. 고금과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데, 여행 중 차타고 지나가다 간판만 보고 음식점의 정보를 줄줄 읊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무엇보다 음식에 관한 통찰력과 주방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원숙한 맏며느리나 tv에 나오는 요리 달인 같다. 요즘 연구실 공식 셰프로 덕을 쌓는 중이라 점심 저녁 혜원이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가 많은데, 별 것 없는 재료가 그녀의 손을 거치면 웬만한 맛 집보다 훌륭한 음식이 된다. 요리에 관해서는 겸허함과 아량도 있다. 노련한 주부샘들과 요리할 땐 낮은 자세로 배우고, 요리 초짜들이 망친 음식을 훌륭하게 소생시키기도 한다.



언젠가 부터 맛의 기준이 혜원이가 되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 호텔 조식이나 식당, 혹은 간식의 맛이 어떤가 알고 싶으면 일단 혜원이의 접시와 반응을 보게 된달까. 제사 음식처럼 쌓아놓고 먹거나 누군가에게 권하지 않고 말없이 꾸역꾸역 먹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맛집이란 뜻이거나 맛있다는 뜻이다. 혜원이의 맛있는 음식에 대한 반응은 막말로 식탐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탐욕을 부린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가령 어느 날 느긋한 건화가 천천히 먹고 있던, 마지막 한 조각 남은 맛있는 음식을 낚아채며, “이거 안 먹을 거지?”라고 했다고. 먹고 싶은 걸 당당히 얻어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음식에 대한 태도는 혜원이의 다른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그 중에 잔소리를 ‘먹기’로 승화해 버리는 스킬이 있는데, 친구들의 그 어떤 놀림이나 채운샘의 잔소리도 “음~~?”이라는 특유의 제스츄어로 다 먹어버리는 통에 말 하는 쪽에서 할 말이 없어지고 그저 허허 웃게 된다. 이런 반응만으로 보면 언뜻 모든 일에 덤덤하고 무던한 대인배인 듯하지만, 혜원이가 특이하게 강렬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도 먹는 것과 관련 될 때이다.



혜원이를 안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때의 일이다. 함께 세미나를 한 첫날, 혜원이가 첫 세미나도 했으니 샘들이랑 연구실 근처 떡볶이 집에 가자고 했다. 마침 할 일이 있어 무심코 사양했다가 깜짝 놀랐다. 공부방으로 들어간 혜원이가 눈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울먹울먹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원이는 무언가를 못 먹게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채운샘의 말에 미안해하며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혜원이는 글을 쓸 때 한역이 ‘슬픈 한역’ 되듯,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게 될 때 ‘슬픈 혜원’이 된다. 음식이 제공되면 금세 온순해지기 때문에 잘 먹고 건강하면 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예언자(채운샘)님에 따르면 그게 바로 혜원이의 가장 큰 문제라고.

연구실은 전국 각지에서 반찬 선물이 오고 세미나 때마다 풍족한 간식이 있고, 매 끼 채운샘표 맛있는 집 밥 덕분에 먹는 거에 관한 한 부족함은커녕 음식이 차고 넘친다. 맛있는 걸 좋아하지만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좋아라하지 않는 혜원이에겐 어쩌면 최적의 서식지이다. 동시에 습관을 보기 어려운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런 혜원에게 이란 여행 후부터 6시 이후 금식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본인도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하루가 다르게 홀쭉해지고 있다. 중간 중간 회식과 특식이 있는 날은 금식을 중단해서 ‘간헐적 단식’이라 놀림을 받긴 하지만, 못 먹게 하면 울음부터 터트리던 혜원이에서 서서히 변신 중이다. 날렵해지는 턱선 만큼 글에 대한 코멘트를 할 때도 복잡한 내용을 단순 명쾌하게 정리하고, 번역에 관해서도 때때로 프로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여러 계기가 있겠지만 요즘 혜원이가 충격을 받았던, ‘연구실 여자들 중에 혜원이가 가장 기운이 없다’는 말이 가장 크지 싶다. 기운이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듣거나 책을 읽어도 그것을 변용할 힘이 없다는 말에 큰 결심을 한 듯하다. 스스로 건강을 자부하던 혜원이는 약뜸을 뜨며 변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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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21 13:24
    "잔소리를 '먹기'로 승화해 버리는 스킬"이라니..(!) 표현이 참 재밌습니다. 손꾸락 사진만 봐도 맛있는 것을 대하는 혜원샘 특유의 표정이 눈 앞에 그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