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11월11일 4학기 5회차 후기

작성자
은미
작성일
2021-12-01 19:33
조회
506
채운샘께서 중론의 19장 '시간에 대한 고찰'에 대해 강의 해주셨습니다. 녹취록을 일부를 풀어 정리해 보았습니다.

 

시간은 존재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공간이 시간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아이슈타인은 말했다. 일본의 도계선사라는 분께서는 존재가 시간이라고 했다. 有(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時(시간)이라는 거다. 동양에서 시간은 시공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시간과 무관한 공간만도 없고, 공간과 무관한 시간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구체적인 존재와 연기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가시적으로 알 수 있는 변화를 통해서 시간을 느낀다. 예전에는 많았던 머리숱이 줄어든 걸 느꼈던가, 흰머리가 많아지는 것처럼 격세지감이 시간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건 시간에 대한 느낌이 아니다. 내가 알았던 상태와 이전에 알았던 상태가 가지는 거리, 차이를 시간이라고 느끼는 거다. 우리가 느끼는 변화는 시간의 문제라기보다 공간과 거리의 문제이다. 없다가 있고, 있다고 없거나, 세모였다가 네모가 되는 형태의 변화를 시간이라고 느낀다. 시간성을 그 자체에서 상상하는 게 불가능하다.

과거라는 2차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과거가 지나갔다는 건 무얼 말하는 건가. 과거가 소멸된다면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또 과거가 그 자체로 실체가 있는 거라면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계속 같은 모양으로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둘 다 아니다. 과거가 소멸했다면 우리의 기억이 없어야 할 테고, 과거가 동일한 거라면 늘 동일한 기억으로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둘 다 아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층위를 생각할 때 이 두 가지를 모두 피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게 다 기억인데, 어디에 있는 걸까. 이게 유식에서 말하는 아뤼아식의 차원이다. 아뤼아식은 일종의 기억이다. 그런데 이 기억은 어디 차원에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 뇌에 있는 건 아니다. 뇌는 무수한 신경 다발로 이루어진 일차적으로는 자극과 반응의 체계인 신경계이다. 외부의 자극인 촉이 없으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뇌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거지 과거가 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뇌에 과거가 기억으로 보존되어 있다면 우리가 꺼내고 싶을 때 꺼낼 수 있는 방식대로 늘 동일하게 꺼내야 한다. 하지만 뇌에 기억이 없으니까 그게 안 되는 거다. 이 문제가 인식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옛날에는 주름이 없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주름이 10개가 생겼다. 그럼 우리는 주름이 생기기 전의 모습을 과거라고 하고 주름이 생긴 다음을 과거보다는 미래인 현재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시간을 보는 게 아니라 인과를 그렇게 붙여서 더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을 과거라고 이름할 뿐이다. 그러면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를 전혀 말해주지 못한다.

시간의 문제가 인과의 문제와 연결된다. 우리는 인이 더 과거이고, 과가 인보다 더 뒤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원인이 결과보다 선행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지금의 결과가 없다면 원인도 없다. 그러면 지금의 결과가 원인을 출현시킨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인과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과의 논리로 과거가 그렇게 있는 것처럼 출현시키는 거다. 우리의 논리 구조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시간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서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과거를 등 뒤에 놓고 앞으로 미래를 보면서 앞으로 간다고 할 때와 과거를 바라보는 상태에서 미래를 등지고 시간이 뒤로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의 시간은 다르다.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과거 현재 미래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논리가 달라진다. 들뢰즈는 시간을 종합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과거가 가고, 현재가 오고 현재가 가면 미래가 오는 게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차이들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차이가 발생하면 그것들에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과거 현재라고 이름을 붙인다. 차이가 발생할 때는 나의 차이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 우주 전체가 찰나에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과 더불어서 차이가 나에게도 발생한다. 차이들이 계속 종합되는 방식으로 여기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종합해내는 거지,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서 관계짓는 게 아니다.

불교가 철학적으로 서양의 현대 철학하고 연결 시키면 전체적으로 부합되지 않더라도 몇 가지 지점에서 흥미롭게 매칭이 된다. 그 이유는 불교는 발생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이건 원래 이렇다’고 한다면 그런 형태로 주어진 초월자를 상정하기 마련이다. 본래적인 것, 본유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마련해준 어떤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발생을 사유한다는 건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거다. 도대체 의식이라는 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건 하나의 관념을 생성하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게 흐름으로만 보인다. 자기조차도 흐름으로 느껴진다. 아이가 자라는 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엄마나 아빠와 관계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개념 혹은 관념이 무의식 속으로 주입되는 거다. 인간은 관념이 관념을 생성해서 분별로 가득 찬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 분별이 습관화가 될수록, 반응적이 될수록 이 세계가 고체화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행동하는 현재의 신체와 인식하기 위해 함께 작동해야 하는 과거(기억) 전체가 있어야 존재가 있다. 인간의 의식은 운동해서 다른 신체들과 연결하고 있는 신체 운동인 촉이 있어야 존재한다. 촉이 없으면 감각도 지각도 발생하지 않는다. 감각과 지각이 발생했다는 차원에서만은 ‘뭐다’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뭐다’라는 건 촉과 기억이 연결되어야 인식된다. 우리가 사물을 나무, 개, 풀이라고 인식하는 건 매 순간 기억 속에서 그걸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그 대상이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흐물흐물하게 기체적 상태로 보이게 된다. 그건 지각과 감각 작용에 과거 전체의 기억이 개입해 들어오는 거다. 우리는 정신을 뇌 속에 인식할 수 있는 관념이 있어서 대상을 만나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일대일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관념을 실체적으로 떠돌아 다니는 원자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데 불교와 현대철학은 그걸 부정하고 관념들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를 고민한다.

베르그손이 흥미로운 건 신체는 모든 인간과 동물들은 신체적 차원에서는 유용성을 따른다. 자기 종을 어떻게 보존할까,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가, 무엇이 나를 해칠 것인가를 판단하는 지점에서는 즉각적인 본능에 따라 판단한다. 이런 판단이 이루어지려면 기억이 개입한다. 수많은 평면의 기억이 있다. 어떤 차원의 기억까지 관계해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신체의 현재 행동이 다르다. 자기 유용성에 묶여 있으면 즉각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자기 유용성에서 벗어나서 주체와 대상의 분별이 흐려지는 의식의 차원에서 행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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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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