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마지막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2-02 18:52
조회
537
아우구스티누스는 답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 그리고 그 이전 초기 기독교의 성윤리는 비교적 단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들어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는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나 그것을 행위로 옮기는 방식에서 유죄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욕구는 무의지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과정과 그 방식에는 의지가 개입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리아누스가 문제 삼는 것은 무절제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절제된, 규범에 따르는 부부 사이의 성행위는 합법적인 것으로 정당화됩니다. 펠라기우스파는, 기독교적 윤리에 양자택일이 강요된다고 보았습니다. 양성의 구별은 천지창조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느님에 의해 정당화된 ‘좋은 것’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근원적,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거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들을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성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사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적 시스템을 넘어서 그러한 주체성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처럼? 그는 단순한 계율이 아니라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의 형식에 개입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러한 작업에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육욕의 문제를 ‘의지’와 관련시킴으로써. 그에 따르면 타락 이전에도 성관계는 존재했으나, 거기에는 육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성행위가 존재하는데 리비도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의지’가 그 행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입니다. 의지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는 성행위. 저로서는 잘 상상하기 어렵습니다만, 이러한 모델은 리비도를 주체의 내부에 있으면서 주체의 의지를 흔드는 위험스럽고 수상쩍으며 유혹적인 힘 같은 것으로 파악하도록 합니다. 자기에 대해 반항하는 주체의 탄생!

여기에서 푸코는 행위와 의지와 욕망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지점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욕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탐욕스러운 괴물 같은 것이 되고, 의지는 욕망에 흔들리면서도 행위에 대해 완전히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역설이 생겨납니다. 의지는 순수하고 자유롭다고 여겨지는데, 역설적이게도 의지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해방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언제나 의지는 욕망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동요하게 되기 때문이죠. 의지와 욕망으로 분열된 이러한 주체는, 끊임없는 심판 앞에 놓이게 되고, 끝내 자기 자신과 떳떳하고 가벼운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욕망을 근절할 수도, 그렇다고 그것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는 의지를 방해하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의지에 대한 이러한 관념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매순간 현행적 실존 속에서 자기 자신이 남김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 그러하여 보다 고귀하고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순수한 의지를 통해 악한 욕망을 제압하거나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절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 이것을 놓치게 될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또 맹신하면서 자신의 편협한 의식 안에 갇히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공지가 너무나 늦었습니다. 내일은 <육체의 고백> 부록을 읽고, 한 학기를 정리하는 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혜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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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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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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