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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NY 4학기 7주차(12.4) 공지 : 휘브리스를 넘어서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2-02 20:02
조회
564
 

 

어느새 훅 겨울이 왔네요. 12월에 들어섰고 저희 역시 어느새 에세이라는 마지막 여정을 통과 중입니다. 공지 먼저 하고 갈게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7주차에는 학술제가 있어서 오전에만 에세이 코멘트를 하게 됩니다. 에세이 초고를 목요일(오늘) 밤까지 홈페이지에 업로드해주시구요. 낭송 준비도 철저히 해주길 기대하겠습니다. 금요일 저녁 7시 특별 법문도 많이 참가해주시구요.

이번 시간에는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을 읽었습니다. 사실 문학도 그렇고 비극도 그렇고 문외한인 제게는 그저 평범하게 읽혔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중요한 감각 중 하나인 휘브리스에 대한 경계도 교훈적인 이야기처럼 읽혔구요. 또 조금 삐딱하게 보아서, 패전국의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는 특징도 그저 그리스식 국뽕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더욱더 재미나게 읽고 오신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의를 듣다보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선 왜 적국 페르시아인들이 주인공이어야 했는가? 간단합니다. 비극이기 때문이죠. 비극이기에 파멸한 패배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의 형식에서 타자의 상황이 묘사되고 이야기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인들’ 정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소아시아 부근은 사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언어도 문화도 어느 정도 엇비슷한 이웃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다르죠. 그들은 완전히 다른 언어와 생활방식과 서사를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영화 <300>을 보면 크세르크세스와 그의 부하들은 그리스 연합군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barobars, 즉 ‘그리스어를 말하지 않는 자들, 야만’이라는 의미의 타자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잘해야 부족 연합체였던 그리스인들은 그런 타자의 등장과 더불어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새로이 규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우리’와 더불어 ‘타자’라는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놓인 작품입니다. 두 의식은 사실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지요. <페르시아인들>은 ‘오토토토이otototoi’라는, 타자가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으로 끝이나는 극입니다. 우리 말로는 ‘아이고, 아이고’로 번역되어 맛이 안 살지만, 신들의 상징이기도 한 코로스들의 이러한 울부짖음을을 직접 보는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그저 통쾌하기만 했을까요? 채운샘은 타자의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타자는 나의 적인 동시에 나를 확인시켜주는 존재이지요. 그렇기에 그 목소리는 단지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의 목소리라는 깨달음까지도 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왜 패배했을까요? 그리스인들이 그들에게서 발견한 태도는 바로 휘브리스Hybris, 즉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가려는 오만이었습니다. 사실 휘브리스는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만일 인간이 유한하지도 필멸하지도 않았다면 그것을 넘어가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그 유한함으로 무한을 꿈꾸지요. 그런 욕망들에는 신들이 끼여듭니다. 그리스 신들은 분노, 질투, 폭력성, 사랑의 모습으로 인간의 마음에 슬쩍 편승하여 거기 움튼 충동을 가속하고 뒤짐질하는 존재입니다. 참 독특하지요. 신들과 인간이 한데 섞여 살아가는 세상. 하지만 그기는 해도 신들이 인간의 근본적인 기질이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운명, 모이라moira는 모든 신들보다도 위에 있지요. 제우스도 모이라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휘브리스의 경향은 인간만이 가는 인간 내면의 한 씨앗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고 하죠. “인간의 성격이 곧 그의 운명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기질과 성격 때문에 파멸한다는 것. 이러한 관념이 그리스 비극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치우친 존재입니다. 즉 기본적으로 내재된 충동 혹은 삶의 경향성이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부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우주적으로 세팅된 우리의 기질과 운명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때의 긍정이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한지는 질문해봐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치우진 기질이 그대로 방치되고 돌출되어서 한계를 넘어 표현될 때를 일러 그리스인들은 휘브리스라고 부르고 경계했습니다. 동양의 성리학자들도 그랬지요. 공부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자기 기질을 이겨낼 때까지!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업과 치우친 기질대로 살게끔 되어있지만, 그렇게만 살게 된다면 늘 휩쓸리며 윤회할 따름입니다. 우리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고 적어도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다면, 휘둘리더라도 다음에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한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유한성은 우선 부정이 아닙니다. 인간 삶에는 주어진 몫이나 나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인 운명이라는 넘을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채운샘은 유한성의 긍정을 사건의 긍정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때의 사건은 잠재적이고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힘들을 말합니다. 나보다 먼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나라는 욕구, 외모, 신체는 그것들의 구현일 뿐입니다. 사실상 겪어야 할 모든 것은 나보다 먼저 존재합니다. 만남, 헤어짐, 배신, 사랑, 미움, 죽음까지도요. 사건을 긍정함, 즉 운명애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조에 부스케라는 작가입니다. 참전 중 포탄을 맞고 깨어났을 때 하반신이 마비되었던 그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통증에 저항하던 중 한 가지 전환을 이뤄냅니다. 내가 왜 고통스러운가? 그것은 고통스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고통과 상처가 있었던 것이고, 삶은 나에게 그런 고통을 선사하는 것일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기꺼이 고통스러워해버리자! 그 이후 그는 들려오는 모든 소리, 찾아오는 모든 통증, 매번의 접촉에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겸허한 능동성은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삶은 불안하죠. 원래 그렇습니다. 니체가 거듭 말했듯, 언제나 낭비하고 합리성과 예상을 넘쳐흐르는 가혹한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건들의 다발이자 과잉인 삶을 두고 불안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것입니다.

지금처럼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시기, 우리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그러나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는 이 사건들은 어떤 자세로 맞이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단순히 없길 바라고 없애고자 하는 마음은, 사실상 괴로움을 덧댈 뿐 아니라 우리의 분과 몫을 넘어 통제하길 바라는 휘브리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방치하고 되는 대로 휩쓸릴 수만은 또 없지요. 우리의 자리에서 다가오는 사건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감지하며 매번의 중심을 잡아가는 것만이 중요한 실천이 될 것 같습니다. 공지를 마치겠습니다. 토요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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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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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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