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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탁NY 4학기 8주차(12.11) 공지 / 픽션에 대한 면역력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2-06 21:30
조회
563
 

 

에세이 초고 코멘트와 학술제가 함께 있던 7주차! 복작복작 바쁜 토요일이었습니다.(네, 제가 좀 혼미했습니다...) 길었던 일 년 과정이 어느덧 3주를 앞두고 있네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마지막까지 기운을 내어서 뭐가 됐든 함께 마무리해 보아요! 오전에 들었던 코멘트를 간단히 스케치해보겠습니다.

대체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돈이 되거나 스펙이 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 교훈을 주거나 윤리적인 모범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니체는 비극의 목적이 교육 효과에 있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했지요. 예술은, 그 중에서도 그 자체로 허구를 다루는 픽션은 실상 선과 악 도덕의 틀로 보면 무척 납작해지거나 아예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없이는 사회가 건강해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픽션에 대한 면역력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서 무척 쉽게 휩쓸리거나 무너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진짜 있는 일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 일이 정말 일어날 거라고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문학 속 인물들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지요. 주인공이 기상천외한 모험을 하거나 끔찍한 일과 연류되어도 우리는 이곳 여기서 살던 삶을 살아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직접 손에 잡히는 뭔가를 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약간의 여백만은 주지요. 이 현실에 너무 딱 붙어서 여기가 전부고 이 코드와 룰들이 정언명법이라는 경직된 생각을 좀 물렁하게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현실에서 픽션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거기에 충격 받아 무너지거나 확 동화되어 빠져버리지는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릴 둘러싼 많은 것들이 픽션이지 않을까요? 과학도, 종교도, 정치도 어느 정도의 가정과 이미지를 활용하고 나름의 장치들에 의해 부여된 서사 위에 구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도 팩트만으로 차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들어가 있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 감각 속에서 한 번 편집되고, 기억과 성향과 더불어서 어떤 부분은 터무니없이 과장되고 어떤 부분은 그냥 제거되면서 쓰여지는 것이 저희의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의 이야기성, 픽션의 현실성을 함께 볼 수 있다면 비슷한 일상을 비슷하게 살아가더라도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상기하는 것이죠.

소설은 생각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거기엔 늘 “쟨 왜 저러는 거야?”라고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사건이 가득가득합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왜 노파를 죽였고 왜 열병을 앓는 걸까? 운명은 샹린댁을 왜 가만 안 놔두는 걸까? 에이해브는? 오이디푸스는? 이런 사건과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소설은 그런 짓을 무용하게 만듭니다. 이상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삶을 이해시키는 것이 소설이기도 하죠. 그리고 실제로 세상에는 이해 안 되는 사람과 사건들이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이해브에게서 끌어내야 할 생각은, 저런 욕망은 너무 죽음의 선이야라는 교훈보다는 모든 사람이 집과 안전과 평화로만 끌리지는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물음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돈은 있고 봐야 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불안정과 실험과 체험에 끌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안정을 원한다는 건 내 믿음일 뿐이죠. 이처럼 소설은 세계에 대한 기존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지 않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우리 견해와 상식 바깥의 세계를 주입받고 감염됨으로써 면역력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불교와 글쓰기 강의에서 들었던 예술 이야기가 연결되어 떠오르네요. 채운샘은 세잔에 대한 로렌스의 해석을 가져온 들뢰즈의 설명을 설명해주셨는데요. 우산이 하나 있습니다. 우산 위는 우주 즉 카오스입니다. 우산은 바로 코스모스, 우리의 견해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견해로 조직한 우산으로 카오스에서 오는 비와 눈과 바람을 막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우산 없이는 추위와 혼란 속에서 미치거나 죽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은, 바로 그 우산에 구멍을 냅니다. 우산 안쪽으로 카오스가 침입하도록 하는 것이죠. 즉 견해의 집에 밖으로 창문을 뚫는 것이 예술입니다. 왜냐하면 우산과 집 안에만 계속 있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견해에 질식하거나 다시 카오스 상태로 가거나 도리어 미쳐버릴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카오스의 바람이 드는 창, 그것이 예술입니다. 가타리는 예술의 이런 힘을 두고 카오스모스라고 불렀습니다.

‘거칠게 전체를 보지 말고 디테일하게 소설의 한 부분을 파세요!’ 에세이쓰기와 관련해서 채운샘은 당부하셨습니다. 소설의 여러 장면이나 작가 설명 등을 길게 다루기보다는,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에 초점을 맞춰 명료하게 드러내 보자는 것이죠.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니체의 개념이나 니체의 관점이 뼈대가 되어서 출발해야 합니다! 각자의 코멘트는 소중히 접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학술제의 적극적인 청중이자 영광의 단체낭송의 주인공이셨던 샘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남은 3주 저희 함께 힘내봅시다!

 

공지

- <즐거운 학문> 끝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간단히’ 준비해옵니다.

- 아이스퀼로스의 <탄원하는 여인들>을 읽고 이야깃거리를 ‘간단히’ 준비해옵니다.

- <즐거운 학문> 강의가 있어요. 챙겨오세요~
전체 2

  • 2021-12-23 18:17
    iejy1h9n

  • 2022-01-16 01:14
    f5pyt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