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12월 2일 4학기 7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현화
작성일
2021-12-07 02:41
조회
483
<불티모아> 1224학기 7주차 수업 후기

드디어 『중론』 주석서인 찬드라끼르띠의 「쁘라산나빠다」 네 권 중 마지막 제 4권에 이르렀네요. 저는 제 1권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떻게 이걸 끝까지 다 읽지?’ 막막하고 걱정스럽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벌써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직도 공, 연기, 무자성이란 말들이 아리송하지만, 처음 보다는 중론의 언표에 익숙해지고  귀류 논증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그나마 공부한 보람이 아닐까 합니다.

중론25장 열반에 대한 고찰

열반에 대해 다루는 이 장은 중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해탈과 열반이란 말을 들으면 궁극적 실재로서 어떤 특별한 상태를 상정하게 되지요. ‘열반’(니르바나)이란 실체적인 어떤 것을 끊어버려 완전히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을 얻는 것, 영원하고 영속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축복과 행복이 깃든, 전적으로 판이한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말이죠. 그러나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열반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제거되지 않음, 획득되지 않음, 단멸하지 않음, 상주하지 않음, 소멸하지 않음, 발생하지 않음. 그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3게송)

나가르주나에게 열반은 분별의 남김없는 소멸, 즉 모든 희론의 적멸상을 의미합니다. 열반 속에는 어떤 것의 제거도 없고, 어떤 것의 소멸도 없으므로, 열반은 모든 분별의 소멸이라는 속성을 지닌다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분별의 적멸이라는 속성을 지닌 열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존재, 비존재, 그것들의 양자(兩者), 비양자(非兩者)의 속성을 지닌 열반을 분별합니다. 나가르주나 논사는 왜 그 분별들이 타당하지 않은지에 대해 차례로 논박한 후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윤회와 열반 사이에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열반과 윤회 사이에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19게송)

“열반의 끝과 윤회의 끝. 양쪽 끝 사이에 지극히 미세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다.”(20게송)

나가르주나는 윤회나 열반, 속박이나 해탈을 하나의 개별적인 실재로 만드는 궁극의 실재, 하나의 법(다르마)을 전적으로 부정하는데, 이것을 마지막 게송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열반은) 모든 인식의 적멸, 희론의 적멸, 길상이다. 어떤 곳에서도, 어떤 자에게도, 어떤 법도 붓다에 의하여 설해지지 않았다.”(24게송)

풀이하면 언어와 사유의 대상인 열반은 존재하지 않으며, 열반의 소유자인 열반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고, 사유의 주체인 열반을 인식하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고, 언어의 주체인 열반을 설하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열반을 자성을 소유한 존재로서 추구하므로 윤회를 초월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나가르주나는 어떤 법의 발생 또는 소멸을 분별하지 않거나, 어떤 법의 도달도 증득도 원하지 않으면 그것을 열반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고찰해온 제법들과 마찬가지로 열반 또한 무자성(공)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은, 세계는 분절할 수 없다

업과 과보에는 시간과 결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과 존재자는 결합되는가? 분리되는가? 존재와 시간이 더불어 시작되는가? 따로 있는가? 채운 샘께서는 지난주에 이어 ‘시간’에 대해 강의해 주셨습니다. 시공간은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지 획일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분할 가능하다는 전제를 부정합니다. 물처럼 흘러가는 것은 분할할 수는 없습니다. 질적인 변화를 생각할 때 시간 또한 분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분 1분이 모이면 5분이라는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찰나는 그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즐겨라’는 말이 있죠. 현재는 과거 미래의 인연조건에서만 지금입니다. 시간은 분할할 수 없으므로 순간이라는 어떤 시간의 단면은 우주 전체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도 우주의 전 시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내가 매순간을 산다는 것은 우주의 무한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분할은 오직 인간의 지성일 뿐입니다. 세계를 분할해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분별적 인식이라는 겁니다. 이는 경험적 세계에서는 유효하나 세계는 우리가 분절한 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돈오’는 분절되어 있지 않은 세계 전체를 한꺼번에 통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인식하지만, 돈오는 어떤 논리적 토대나 전제 없이 전체를 한 번에 즉각적으로 깨닫는 것이라서 몰록 깨우침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존재의 개별성과 더불어 내재된 전체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우주적 앎입니다. 깨달음은 순간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앎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능력으로 인식하기 어렵지만, 나가르주나에게는 분할 가능한 것으로서의 개별자인 현재가 없습니다. 시간을 분할할 때만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것이지 시간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인간 인식의 인과 때문에 시간이 만들어 집니다. 시공간은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간은 찰나로 분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시간을 재구성합니다. 인식에 따라 있는 것처럼 만들어지는 시간이지 경험을 벗어난 시간 자체는 없습니다. 이 세계는 개념적 조작으로 만들어 낸 허구, 꿈입니다. 사건들도 분할할 수 없습니다. 나비의 날개 짓이 어딘가의 태풍과 관련되듯이 모든 사건은 전체성 속에서만 인식됩니다. 모든 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의 행이 전체와 연관되기 때문에 함부로 행할 수 없습니다. 결국 철학의 문제는 세계를 자기 식으로 나누는 분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세계와 시간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한 찰라 한 존재는 모든 것과 연관됩니다. 깨우침의 순간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갑니다. 공은 없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공은 있음과 없음의 이분법을 넘어섰으므로 중도라 합니다. 실재론자는 분할할 수 없는 것을 분할해서 자성을 가진 것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해석의 문제이지 주어지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는 말씀은 시간에 자성이 없다(공)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전체 2

  • 2021-12-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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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6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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