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니체 4주차 후기

작성자
이소영
작성일
2017-08-18 17:10
조회
133
“코끝에 냄새가 바뀌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뀐 냄새를 맡는 것도 아니고 냄새 맡는 감각은 바꾸고 싶다고 바뀔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이 아리송한 질문 하나 들고 니체의 4번째 수업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뢰즈가 해석한 니체의 힘의지

들뢰즈는 니체의 힘을 유형학적으로, 발생적으로 나눠봅니다. 우선 유형학적으로 능동적(active) 힘과 반동적(reactive) 힘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에겐 반동적 힘이 더 친근한데 이는 안정적이며 자기보존적이며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따르는 힘입니다. 현상유지를 위해 유용한지 여부를 따지고 이익을 뺏기지 않으려는 힘입니다. 반동적 힘은 분란을 만드는 행동을 보면 맘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되든 안되든 해보려는 힘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그 힘을 제압하려하고 그 와중에 자기를 선으로 규정합니다. 타자를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는 반응적 힘인 거죠. 주로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호의를 가지며 자신을 약자와 동일시합니다. 반면 능동적 힘은 정복하고 제압하며 탈취하고 창조하는 힘입니다. 이 힘은 자발적으로 훔칩니다. 벽암록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훔치는 관계로 이야기했다네요. 배우는 자는 능동적으로 가르침을 훔칩니다. 가르치는 자의 문제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가르친 것이 없는 것도 훔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연한 방식으로 상대에게서 낚아채는 훔치는 힘이 능동적 힘입니다. 이런 힘이 드러나는 방식은 긍지(자부심)입니다. 긍지를 가진 사람의 평가는 고귀하냐 비천하냐입니다. 도덕적 기준이나 책임 같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협지나 고전에서 강자는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어도 상대가 강자임을 알아보는데 이런 감응(affection)이 능동적 힘의 소유자들의 긍지가 되겠네요. 허나 역사에서는 반동적 힘이 능동적 힘에 승리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는 능동적 힘은 갈등에 부딪치면 갈등을 밀어붙이는 반면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을 빼앗고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힘의 발생적 구분은 긍정과 부정입니다. 두 힘의 차이는 생의 다양성을 긍정하는가 아닌가입니다. 그러니 능동적 힘도 어느 순간 반동적으로 작동한다면 이는 부정의 힘이 작동했다는 것이고 반동적 힘도 능동적 힘으로 바뀌는 지점이 힘에서 긍정적 힘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힘은 한번 생겨서 영원하지 않습니다. 생은 끝없이 생노병사의 변화를 선사합니다. 그때마다 생의 다양성을 긍정할 수 있다면 이는 긍정적 힘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재산이 사라지고 건강을 잃었을 때 생을 비난하고 멋대로 살리라는 니힐리즘에 빠진다면 그 순간은 부정의 힘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을꺼라 생각하던 것이 없어질 때 사람들은 삶의 존재 이유를 잃고 우울증에 빠지거나 다른 의미 있음을 부여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공부의 의미를 찾으려한 제 공통과제 글에도 공부의 의미를 나름 부여하지만 부여된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의미를 설명하며 존재를 확인하기보다 그냥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간단한 이유를 이해하면 더 나을듯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는 이유는 단지 재미밖에 없다고 채운샘은 말씀하시네요. 참 명쾌하죠~ 그러네요. 재미있으니 하지 그 왜 뭐가 있겠습니까! 긍정적 힘을 쓰는 삶은 가벼울 수밖에 없고 웃음이 있으며 춤이 있는 디오니소스적 삶이 될 것입니다. 반면 부정적 힘은 삶이 무겁고 죄책감이 들며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의 다양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사는 게 너무 좋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이런 삶은 쉽게 지치지만 오히려 힘들어도 살아갈만하다고 느끼는 담담함이야말로 생이 내보이는 가벼움 일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림 적게 고요히 항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생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모습입니다.

자기극복 = 가치전환 = 창조 = 영원회귀

이 모든 걸 이렇게 묶어도 되는 건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 각자 수업을 들으셨으니 판단해주시고(^^;) - 이 모든 것에 중요한 맥이 흐르는 듯합니다. 그건 모두 반동적 힘을 능동적 힘으로 바꿀 수 있는지의 문제인거죠. 샘은 니체를 마지막 19세기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선언이나 운동을 단체로 그룹으로 하는 특성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전세기까지는 영웅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독특한 예술가나 정치가가 존재했습니다. 모네와 반고흐 같은 예술가에서 히틀러에서 나폴레옹에 이르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가 존재했지요. 니체도 그런 19세기 인물에 속할 수 있겠지요. 그들의 특징은 능동적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 보이는 긍지를 가집니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에게는 긍지보다 권력욕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요.) 그럼 이런 긍지를 만드는 힘을 가지려면 반동적 힘을 능동적으로 전환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조금 멀리 에피쿠로스까지 가보면 그는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원자들이 허공에서 떨어지다 어느 순간 미세하게 방향을 트는 지점(클리나멘)이 생기는데 그는 모든 존재에게는 자기 궤도를 이탈하려는 힘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탈의 힘이 자유인 거죠. 들뢰즈가 해석한 힘의지에서도 이렇게 힘이 방향을 바꾸는 어느 미분적(발생적) 지점이 존재합니다. 우리 눈에 꽃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동영상을 보면 꽃은 봉우리에서 꽃이 만개하고 꽃이 지는 생성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안정성에서 무언가 이탈하는 것이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며 이것이 생성입니다. 이런 힘은 주체가 한다고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의 복합체이므로 다른 힘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안정적인 상태를 이탈하려는 발생적 힘을 내재하고 있는 준안정적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안정적인 상태야말로 어떤 외부 마주침에서도 변화가 없는 상태이므로 한마디로 심심한 상태인거죠.

반응적 힘이 능동적 힘으로 벡터가 전환되는 지점에서 가치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가 느끼던 세상의 공기와 냄새가 달라집니다. 드디어 코끝에 냄새가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건데........이러려면 영토를 고수하면 안 됩니다. 연어나 코끼리 같은 동물은 살지 못하는 환경이 되면 죽음을 무릎 쓰고 먹이감이 있는 곳을 찾아 이동을 합니다. 익숙한 자리를 떠나야 하며 좋았고 사랑했던 곳에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느끼며 자신이 머문 자리가 불쾌해져야 합니다. 이를 니체는 ‘자기경멸’이라고 말하는데 이 순간 다른 힘이 작동하며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반응적 힘은 새로운 것을 만나기를 두려워합니다. 허나 능동적 힘은 모험이나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힘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촉발시키고 작동시킬 뿐 인거죠. 이렇게 말하면 마치 우리가 의지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문제 같지만 이는 우연한 마주침을 가져다주는 삶의 다양성이 주는 필연에 의해 우리 안의 다른 힘들이 촉발될 때 가능합니다.

다른 힘을 구성해 낼 수 있어 지금 순간을 Yes!로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린 지난 과거마저 긍정할 수 있습니다. 긍정은 언제나 또 다른 긍정을 촉발하기 때문이죠.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대표적 게임 주사위 놀이가 그런 거죠. 지금 나온 수는 이전에 나온 숫자에 의미를 만들어줍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주사위를 던지고 하늘은 우리에게 다시 그 주사위를 던져주며 숫자는 계속 바뀝니다. 이렇게 매번 던지면서 숫자들이 늘어나고 숫자가 새로 생길수록 이전에 던져진 숫자의 의미도 바뀝니다. 인생 역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사건을 맞고 그 사건은 이전 사건과의 배치를 통해 의미가 정해집니다. 관계 속에서 의미가 정해질 뿐입니다. 예전에 사건이 “그랬었다”로는 과거가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의 상처나 아픔은 그대로 일지라도 지금 내가 다른 힘을 작동시키는 순간 과거의 사건은 “나는 그것을 원했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이 긍정의 힘이며 어느 순간이든 다시 와도 긍정할 수 있는 영원회귀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입니다.

생명은 안정이나 안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안정적 상태를 지루하게 느낍니다. 그보다는 어떤 힘이 자신에게 와도 이를 구부리고 바꿔 자신의 힘을 다른 것에 작용하도록 하려는 자발적 제압이 힘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자기극복’입니다. 자기극복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이지는 무언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넘어 선회하는 것이고 과거를 달리 해석하며 한 번 더 yes로 과거를 소환할 수 있는 영원회귀 입니다. 지고하게 지켜야하는 가치란 없습니다. 모든 가치는 천 개의 민족이 자신의 힘의 의지를 드러낸 결과일 뿐입니다. 다른 민족의 가치를 답습하는 순간 그 민족은 사라지고 다른 민족만 남습니다. 보존은 평가와 해석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평가와 해석이야말로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가치도 다음 세대에겐 밟고 넘어가야할 가치일 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용어와 다른 냄새로 세상을 평가하고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극복하는 자는 가치를 전환할 수 있는 자이며 이들은 새롭게 가치를 창조하며 어느 순간이든 Yes라고 말하는 영원회귀의 정신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이행해야할 ‘위버멘쉬’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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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과잉이다! 우리는 인식으로 삶을 규정하고 붙들려하지만 삶은 우리의 인식을 매번 벗어나 새로움을 줍니다. 그 안에 불안 공포 노여움도 있고 즐거움 행복도 있습니다. 매 고비 무엇을 선물할지 모르는 삶의 넘치는 그것이 삶을 과잉으로 만들어줍니다. 인식으로 삶을 단죄하려는 이성이나 의식에 의존하기보다 삶의 행, 불행에 조금 더 여유로운 무사심을 가질 수 있다면 삶은 언제든 제 때 죽는 순간이 될 수 있다고 샘이 말합니다. (아쉽게도 이 멋진 말은 저에 해석이 아니지요......) 삶에 어떤 의미도 없음을 못 견디는 게 우리들이랍니다. 그런데 그런 인식으로 규정된 무엇을 내려놓는 순간 우린 신체는 새로운 느낌의 감각세계를 선사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감각으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면 생이란 참으로 재미난 곳이 될 것입니다.^^
전체 2

  • 2017-08-22 03:01
    한때 왜 공부하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없으면 공부를 못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부가 그냥 싫었던 거였습니다. ㅋㅋㅋ;;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수동적인 반응인 것 같네요. 그런 점에서 공부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냐, 재밌어서 하는 거지! 라는 말이 참 공감되고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 2017-08-24 13:25
    '과잉'에 꽂히신 소영샘ㅎㅎㅎ 존재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조차도 가능하게 하는 생성의 과잉! 과잉에 대한 샘의 해석이 어떻게 변주되어갈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