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시간] 옹야 1~2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2-29 12:17
조회
326
공야장 시험 후, 옹야를 처음 들어갔습니다.  1, 2밖에 못한 것은 주가 너무 길어서였죠.

 

1. 子 曰雍也 可使南面.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중궁(옹)은 남면하게(군주, 제후 등의 높은 자리에 앉게) 할만하다.

南面者, 人君聽治之位, 言仲弓, 寬洪簡重, 有人君之度也,

남면이라는 것은 임금이 정사를 듣는 자리입니다. 중궁은 관대하고 포용력이 있으며 세세히 간섭하지 않고 신중하여서 군주의 법도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仲弓 問子桑伯子 子 曰可也 簡.

중궁이 자상백자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간략함도 괜찮다.

子桑伯子, 魯人, 胡氏以爲疑卽莊周所稱, 子桑戶者, 是也, 仲弓, 以夫子, 許己南面故, 問伯子, 如何, 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 簡者, 不煩之謂,

자상백자는 노나라 사람입니다. 호씨는 장주가 칭한 바 있는 자상호라는 사람이 이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중궁이 선생님께서 자신을 남면의 자리에 인정하셨으므로, 자상백자는 어떤지 물은 것입니다. ‘가(可)’라는 것은 겨우 괜찮지만 미진한 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간(簡)이라는 것은 번다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仲弓 曰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大簡乎

중궁이 말했습니다. 늘 신중하고 삼가면서 남에게 간(간략함, 소탈하고 대범하게 행함)을 행하고, 이것으로 백성에게 임한다면 또한 괜찮지 않겠습니까. 간략함에 거하면서 행동도 간략하면 너무 간략한 것이 아닙니까.

言自處以敬, 則中有主而自治, 嚴, 如是而行簡, 以臨民則事不煩而民不擾, 所以爲可, 若先自處以簡, 則中無主而自治, 疎矣, 而所行, 又簡, 豈不失之大簡, 而無法度之可守乎,

스스로 평소에 신중함으로 하면 내면에 중심이 있어서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엄하며, 이와 같이 행동이 간략하고 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린다면 일이 번다하지 않고 백성들도 동요하지 않으니 그것이 가하다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만약 먼저 스스로 평소에 간략함으로 한다면, 내면에 중심이 없어서 스스로 다스림이 엉성하게 되며, 행동하는 바가 또한 간략하면 어찌 너무 간략해서 법도가 지킬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家語, 記伯子, 不衣冠而處, 夫子, 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 蓋大簡者, 而仲弓, 疑夫子之過許與,

『공자가어』에서 백자에 대해 기록하기를 의관을 갖추지 않고 집에 거처하자 공자께서 그가 사람의 도를 소와 말 같은 지미승과 같게 하고자 한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백자는 너무 간략한 자라, 중공이 선생님께서 지나치게 관대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子 曰雍之言 然.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옹의 말이 맞다.

仲弓, 蓋未喩夫子可字之意, 而其所言之理, 有默契焉者故, 夫子, 然之,

중궁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가(可)라는 글자의 뜻을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그 말하는 이치가 암암리에(은연중에) 부합하는 것이 있으므로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신 것입니다.

程子, 曰子桑伯子之簡, 雖可取而未盡善故, 夫子, 云可也, 仲弓, 因言內主於敬而簡則爲要直, 內存乎簡而簡則爲疏略, 可謂得其旨矣, 又曰居敬則心中無物故, 所行, 自簡, 居簡則先有心於簡, 而多一簡字矣, 故, 曰大簡.

정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상백자의 간략함은 비록 취할 만하지만 선이라고 하기엔 미진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괜찮다고만 하신 것입니다. 중궁은 이 말로 인하여 내적으로 신중함을 주로 하면서 간략하다면 아주 핵심적이고 바른 것이 되지만 내면에 간략함을 유지하면서도 또 간략하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소략한 것이 된다고 하신 것이니 그 뜻을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평소에 신중하다면 마음속에 외물이 없으므로 그 행동이 스스로 간략한데, 평소에 간략하다면 먼저 마음에 간략함이 있으므로 한 가지 간략하다는 글자가 많은 것이니 지나치게 간략한 것입니다.

 

2. 哀公 問弟子 孰爲好學 孔子 對曰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애공이 물었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호학(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았고 두 번 다시 잘못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고 말아 지금은 없습니다. 그리고는 호학(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遷, 移也, 貳, 復也, 怒於甲者, 不移於乙, 過於前者, 不復於後, 顔子克己之功, 至於如此, 可謂眞好學矣, 短命者, 顔子, 三十二而卒也, 旣云今也則亡, 又言未聞好學者, 蓋深惜之, 又以見眞好學者之難得也,

천(遷)은 옮긴다는 것입니다. 이(貳)는 ‘다시’입니다. 갑에게 화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고 앞에서의 잘못을 뒤에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자가 자신을 극복한 결과가 이와 같은 것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호학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程子, 曰顔子之怒, 在物不在己故, 不遷,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 不貳過也, 又曰 喜怒在事, 則理之當喜怒者也, 不在血氣則不遷, 若舜之誅四凶也, 可怒在彼, 己何與焉, 如鑑之照物, 姸媸在彼, 隨物應之而已, 何遷之有, 又曰如顔子地位, 豈有不善, 所謂不善, 只是微有差失, 纔差失, 便能知之, 纔知之, 便更不萌作,

정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자의 노여움은 외물(사건, 상황)에 있었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옮기지 않은 것입니다. 선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알지 못한 적이 없었고, 그것을 알면 다시 행하지 않았으므로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상황 속에 있으므로 그것은 이치에 마땅한 기쁨과 노여움입니다. 혈기(자신의 성질머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옮기지 않은 것입니다. 가령 순임금이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할 때 노여워할 만한 것이 저들에게 있었으니 자신이 무엇을 관여하겠습니까. 마치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예쁘고 추한 것은 사물에 있어, 그 사물에 따라 응할 뿐입니다. 무엇이 옮길 게 있겠습니까. 또 말씀하셨습니다. 안자와 같은 경지라면 어찌 불선이 있겠습니까. 불선했다고 한 것은 다만 미세하게 약간의 잘못만 있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잘못이 있으면 곧 그것을 알 수 있었고,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고쳐서 싹이 나지 않게 했습니다.

張子, 曰慊於己者, 不使萌於再, 或, 曰詩書六藝, 七十子, 非不習而通也, 而夫子, 獨稱顔子爲好學, 顔子之所好, 果何學歟,

장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스스로 꺼림이 있으면 싹이 다시 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시(詩)와 서(書)와 육예(六藝: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70 제자가 익혀서 통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공자께서 유독 홀로 안자만 호학으로 칭했으니 안자가 좋아한 것이 과연 어떤 학문입니까.

程子, 曰學以至乎聖人之道也, 學之道, 奈何, 曰天地儲精, 得五行之秀者, 爲人, 其本也, 眞而靜, 其未發也, 五性, 具焉, 曰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 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 動而七情, 出焉, 曰喜怒哀懼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生鑿矣, 故, 覺者, 約其情, 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而已, 然, 必先明諸心, 知所往然後, 力行以求至焉,

정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배워서 성인에 이르는 길입니다. 배움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생명력의 정수를 쌓아 오행의 빼어남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됩니다. 그 본질은 참되고 고요한 것이 아직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는 오성이 구비된 것이니 그것을 인의예지신이라 합니다. 형체가 이미 생기고 나서 외부적인 것들이 그 형태에 접촉하고, 그 내면이 흔들려 그 마음속에 움직임이 일어나면 칠정이 발하게 됩니다. 이것을 희노애구애오욕(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함, 미워함, 욕심)이라고 합니다. 감정이 이미 치성해지고 더욱 요동치면 그 본성이 상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감정을 단속해서 중도에 합당하게 만들어서 마음을 바로 하고 그 본성을 기를 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그 마음에 밝히는 게 있어서 가는 바를 안 후에 힘써서 지극함을 구해야 합니다.

若顔子之非禮勿視聽言動, 不遷怒貳過者, 則其好之篤, 而學之得其道也, 然, 其未至於聖人者, 守之也, 非化之也,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今人, 乃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所以爲學者, 不過記誦文辭之間, 其亦異乎顔子之學矣,

가령 안자의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말라’는 것과 ‘노여움을 옮기거나 두 번 다시 잘못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은 그 좋아함이 두터워서 배움에 도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에는 아직 미치지 못해서 의식적 노력으로 지키기만 했지 아직 저절로 화하는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 것입니다. 만일 몇 년이 더 있었다면 얼마 안가서 질적 변화를 이뤘을 것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성인이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고 배움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배운다는 것의 방법이 겨우 그 글들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그것은 안자의 학문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난주는 경사스럽게도~ 필기와 암송 모두가 훌륭히 통과하였죠. 아주 즐거운 성탄절 시험(!)이었습니다. 모두 도착해서는 그 맛있는 케익간식도 손을 못대고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결국 그것이 아름답고 훈훈한 결과로 이어졌더랬습니다.  격몽식구들, 아주 장하여요.

돌아오는 일요일은 신정(2017년 1월 1일이군요!)으로 휴강합니다. 잘 쉬고서 고 다음주, 새해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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