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1학기 2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17-02-25 17:18
조회
271
절차탁마Q 『국가(정체)』 제2주차 후기 2017.2.25. 이정수

플라톤의 『국가(정체)』 두 번째 시간입니다. 발제에 이어 조별토론과 전체토론, 발제문에 대한 채운샘의 코멘트 이후에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가이아, 우라노스를 비롯한 여러 신의 이름들과 글라우콘, 트라시마코스 등 대화편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ergon, arete 등의 용어들이 한바탕 어우러지는 소화하기 쉽지 않은 강의였습니다. 채운샘의 강의는 모두 담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이라, 과감하게 생략하고^^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싶은 부분을 요약합니다.

1.시대적 배경

기원전 8세기경, 철기문명이 확산되면서 생산력이 발전하자 인구가 급증하고 소유와 축적이 발생하며 분쟁도 증가한다. 헤시오도스에 이르면 더 이상 호메로스와 같은 전쟁이나 영웅의 이야기대신 삶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분쟁에 휘말리고 욕망과 가치들이 상충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때 판단의 기준으로 가져온 것이 ‘신들의 질서, 제우스의 질서’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군주권 확립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비극의 시대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신이 주는 몫’에 토를 달며, 인간이 기준으로 삼고 있던 신들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노모스(관습, 법)와 피지스(자연, 본성)의 대립이 일반화되면서 신들의 질서를 더 이상 따르지 않는 권력자들과 욕망을 가진 자들이 등장한다.

헤시오도스의 시대가 되면 정의의 관념, 제우스의 공정에 대한 관념이 강조되면서 인간의 행위를 정의(디케)라는 척도로 판단하는 사고가 시작된다. 헤시오도스는 군주권의 본질이 정의에 있음을 사고했지만 그 정의가 왕의 특권에 의해 확립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왕의 특권이 자의적인 이상, 디케는 폴리스를 이끄는 정치적 관념이 되기 어렵다. 폴리스가 발전하면서 이제 디케는 법으로 나타나게 되고 공공의 법이 정의의 원리를 대신하게 된다. ‘철의 시대’에 이르자 강자는 히브리스(오만)에 의해 지배되고 사회에는 부정의가 판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디케는 귀족가문의 힘을 제어하고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확립하며 공정한 몫을 분배하고 합의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 된다.

2.플라톤과 국가(정체)

플라톤의 시대는 로고스의 시대, 비극의 시대, 변론과 설득의 시대, 노모스와 피지스가 부딪치는 가운데 무엇이 올바른지 질문을 던지는 시대였다. 비극과 같은 예술은 갈등상황을 보여주는데서 끝나지만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은 소크라테스이다. 그의 저작은 ‘소크라테스를 기억하고자 하는 자기의식이자 후세에 던지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정체)』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철학적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며, 당시 대중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작품은 이러한 대중적 견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을 구하는 구도로 되어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소크라테스적 전통이 담겨져 있다. 소피스트들이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비해 소크라테스는 연설이나 주장대신 ‘나는 모른다’는 전제하에 상대방에게 질문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것들 속에서 질문을 끄집어내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소크라테스적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거대한 우주에 대해 모르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를 가진 존재이므로 마땅히 배워야 하고, 그 배워나가는 과정이 앎에 이르는 지적인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은 부단히 계속되어야 한다.

『국가(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 정의의 상태와 관련해서 의술을 비유로 많이 들고 있는데, 여기에는 몸의 상태와 정신의 상태가 같이 간다는 기본전제가 있다. 몸의 건강상태란 균형과 조화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병이 된다. 의사가 몸의 균형을 이루는 삶의 양식을 조언해주듯, 철학자는 혼이 좋은 상태에 이르지 못한 원인을 깨닫게 해서 본인 스스로 혼의 최선의 상태를 이루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또 도덕과 기술의 비유도 자주 등장하는데 올바른 사람과 기술자는 지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3.‘올바름좋은 삶

플라톤에게 ‘좋은 삶’의 문제는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최선의 조직(정치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는 ‘최선의 삶을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삶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아테네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한 사회의 질서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보여준다. ‘개인의 삶과 공적인 삶의 완벽한 일치’ 그리고 ‘개인의 혼의 최선의 상태와 국가의 최선의 상태’가 플라톤의 ‘이상’이다.

당시의 아테네는 도덕적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현실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한다. 갈등과 분쟁의 증가 속에 사실논리가 도덕원리와 충돌하면서 사람들은 도덕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이상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인간이 도덕을 소유하고 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도덕원리를 따라야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에게는 ‘좋은 삶을 이해하는 것이 좋은 삶’이다. 즉,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활동해야 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어떤 것의 기능이 가장 최선의 상태에 있게끔 하는 것이 arete(훌륭함)인데, 실제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arete)이 곧 앎(episteme)이다. 농부의 arete가 농사가 최선의 상태로 지어지는 것을 아는 동시에 실제로 그렇게 농사를 짓는 것이듯 선한 사람의 arete는 가장 잘 살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올바름이란 ‘폴리스에 살면서 사회관계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처신들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올바름이 뭔지를 아는 자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자이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혼의 영역이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 욕망, 기개(격정)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라는 상태에 있다. 올바른 자는 지혜, 절제, 용기를 통해 혼이 치우치지 않도록 최선의 상태로 존재하게 한다. 곧 혼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혼을 최선의 상태에 놓는 자이며 그가 바로 가장 잘 사는 자이고 올바른 자이다. 앎과 행위능력은 일치하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자기의 arete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자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폴리스의 책무이다.

사람들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가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따라오는 평판이라고 생각하지만, 올바름을 지킨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결과이다. ‘무지해서 벌을 받는게 아니라 무지가 벌이며’(스피노자) 지혜롭고 현명해서 복을 받는게 아니라 지혜롭다는게 곧 복이다. 나의 행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 그 자체가 보상이고 처벌이다. 통치자에게는 최선의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바로 보상이자 결과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올바름을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올바르다고 평가하는 방식대로 산다. 이것은 도덕적인 원리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분리해놓고 결과에 더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결과를 고려해서 행위한다 해도 바라는 대로 그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음에도 결과에 비추어 행위를 선택한다. 이것은 올바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올바름의 키워드는 ‘이해’다. arete는 episteme다. 행위능력은 인식이다. 이해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올바름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올바르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은 자기의 ergon(기능)을 가지고 있고, ergon을 최대한 발휘하는 역량이 arete이며, techne(기술, 전문지식)가 있어야만 ergon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기술에 성립한다. 영혼의 ergon은 영혼이 최선의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각자의 영혼을 최선의 상태로 이끄는 것일 뿐 보편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너의 영혼을 돌보라”고 요청하지 ‘영혼 일반’을 돌보라고 하지 않는다.

‘현실은 신이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신을 기준으로 자기 행위를 하는 것이지 인간의 로고스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혼의 최선의 상태가 이것이니 이렇게 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각자가 스스로 이성을 가지고 어떤 것이 혼의 최선의 상태인가를 물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의 기능을 다한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이며 ‘잘 산다’는 것은 삶 자체로 충만한 것이다. 삶 자체로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재물이나 외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영혼을 통해서이다. 영혼이 최선의 상태에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잘 사는 것’이다. 어떻게 내 영혼이 최선의 상태로 존재하게 할 것인가? 이것은 각자가 ‘인간으로서의 arete, 자신의 위치에서의 자신의 arete’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리스인들은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생각했다. 장인정신을 가지고 삶 자체를 재료로 이것을 최선의 상태로 다듬어 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잘 사는 것’, ‘eudaimonia, well-being, 행복’을 위한 ‘존재의 미학!’

 
전체 2

  • 2017-02-26 19:43
    개인이 가진 혼이 국가적 차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 하지만 그래도 폴리스를 잘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의 혼이 최선의 상태에 놓일 수 있는지는 아직 와닿지가 않네요. @.@ 플라톤이 얘기하는 사회적 모델은 어떤 건지 충분히 고민해야 겠군요...!

  • 2017-02-28 10:46
    영혼의 최선의 상태를 추구한다는 게 관념적인 말로만 들렸는데, 평판이나 보상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삶에 대한 고민에서 도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네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우리를 더 설득시켜 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