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 Q 5.31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5-29 01:25
조회
190
170531 절차탁마 Q 공지사항

마슈레는 스피노자의 사유를 ‘발생으로서의 사유’라고 했습니다. 사유를 일종의 운동으로 본 것이죠. 인식은 인식을 하는 ‘운동’입니다. 즉 개념을 떠올리고 또 질문 하나를 거기서 떠올리기, 그런 운동 과정 자체가 철학인 것입니다. 진리가 있어서 우리가 거기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도, 혹은 최초의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도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인 최초에서부터 점점 더 오염되는 이미지를 제기하지만, 사실 최초의 것은 깨끗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숙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이때 미숙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혹은 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알려주면 그 ‘알려줌’을 ‘금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도움 되고 무엇이 해가 되는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알려주는 것을 제약으로 받아들인다면 존재는 계속해서 미숙한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지적한 것 중 하나는 인간이 자신을 그런 제약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유롭다고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그것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 자체를 자유라고 여기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충동이 발생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욕구하는 자신은 자유롭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가 보기에 미숙한 것이고 무지한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해서 어느새 인간처럼 화를 내고 욕망하는 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상상적 인식을 보편적 인식으로 둔갑시켜 버리는 것이죠. 미신.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와의 서로 사랑하는 메커니즘을 일컫습니다.
스피노자는 신앙이 인간에게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인간이 어긋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계율로서 신앙은 꽤나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차원을 넘어서 신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입니다. 그는 철학과 신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철학의 몫이라고 말하죠. 그의 생각은 지금에 와선 당연해 보이지만 교회권력이 존재하는 당시에는 이단으로 취급받던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신앙이 철학과 분리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시기였고, 스피노자는 그런 시대에 균열을 낸 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 읽으면서 실체, 속성, 양태 개념이 가장 헷갈렸습니다. 조별 토론에서 아무리 책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살펴봐도 도통 정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ㅠㅠ 우선 주의해야 할 것은 신과 속성, 양태를 위계지어서 더 완전한 것에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갈래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과 속성과 양태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는 없습니다. 우선 실체는 자기 원인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자기원인은 자기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데 존재의 원인이 바깥에 있지 않을 때 실존은 본질을 함축하고 자기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실체입니다. 반면 다른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만이 증명되는 것, 가령 어느 신들보다 더 전능하다고 하는 신은 사실 실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실체 개념을 놓고, 속성과 변용을 봅시다. 우리는 속성의 차원이 아니면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성이 실체보다 앞선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고 합니다. 실체-속성-양태는 어떻게 보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념은 다르고, 그러므로 어떤 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효과도 다릅니다. 속성을 말할 때, 우리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 중 사유속성의 한 양태입니다. 지성이란 외부의 물질적인 접촉 없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정신속에서 만들어내는 관념은 항상 신체에 대한 관념이라고, 스피노자는 곧 2부에서 말할 겁니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각하는 본질이 하나가 아니며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신체로 인식하는 세상만을 갖습니다. 실체는 그 수많은 속성에 의해 구축되죠. 그렇게 구성된 실체는 자신의 속성으로 세계를 도출해내는 내재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태란? 변양된 모드, 변용된 모드가 양태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생산하고 그 생산에 의해 신 또한 생산되는데 양태는 무수한 생산의 모드인 것. 변용을 통해서 존재하지 않는 개체란 없습니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동시에 일어나죠. 물체가 A라는 신체와 결합되는 순간 물체도 A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변용하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 한순간도, 단 하나도 멈추지 않고 변용되기에 이 세상도 나도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그런 세상을 끊임없는 인과성, 즉 무한양태로 설명합니다.
스피노자의 논의는 사실 데카르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체와 정신을 나누어 생각하는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스피노자의 논의도 없었을 테니까요. 데카르트는 연장/사유라는 실체를 생각해냅니다. 몸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고, 그중 제어권을 가진 것은 후자라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몸과 생각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인간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순수하게 정신만이 제어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데카르트가 생각해 낸 것은 정신과신체를 연결하는 송과선이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요, 자기 사유에 모순이 드러나면 다시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상상적인 것을 덧붙여 억지로 봉합했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런 엄밀하지 못함을 비판합니다. 데카르트가 연장만을 수동적이고 부활성적이라고 여기는 것에 반해 스피노자는 둘 중 하나라도 수동적이면 나머지 하나도 수동적이라고 데카르트의 사유에 수정을 가한 것입니다. 정신에 어떠한 특권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펼쳐진 자연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요. 이때 우리가 문제 삼을 것은 실존하는 다른 양태와 얼마나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양태의 역량을 기르는 것, 이것이 윤리적 문제인 것입니다. 변양들은 모두 다른 것들 안에 있으며, 전체는 부분들이 생산될 때마다 다시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은 <에티카> 2부 정리 13번까지 읽어옵니다.
과제는 1부 실체, 속성, 양태를 정리하고 2부에서 물체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간식은 현희쌤, 현숙쌤
후기는 미영쌤, 현숙쌤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7-05-30 13:14
    저기 정리된 글 베끼고 시퍼라....아....정리하는 것두 이리 힘드네(T^T) ....숙제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