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시간] 태백 8, 10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6-01 15:50
조회
126
8.子曰 興於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에서 흥기하며”

興 起也 詩本性情 有邪有正 其爲言 旣易知 而吟詠之間 抑揚反覆 其感人 又易入 故 學者之初 所以興起其好善惡惡之心而不能自已者 必於此而得之
흥(興)은 흥기하는 것이다. 시는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사악한 것도 있고 바른 것도 있는데 그 말한 것은 이미 알기 쉽고 읊는 사이에 억양을 반복하면 그것이 사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쉬우므로, 배우는 초기에 선함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스스로가 그만둘 수 없게 한다.

立於禮
“예(禮)에 서며”

禮 以恭敬辭遜爲本 而有節文度數之詳 可以固人肌膚之會 筋骸之束 故 學者之中 所以能卓然自立而不爲事物之所搖奪者는 必於此而得之
예(禮)는 공경하고 사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그리고 형식을 절제하고 수량을 재는 것에 상세함이 있어 사람의 피부와 근육과 뼈의 묶임을 견고하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중에 탁월하게 서서 사물에 흔들리고 빼앗김을 당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예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成於樂
“악(樂)에서 완성한다.”

樂有五聲十二律 更唱迭和 以爲歌舞八音之節 可以養人之性情 而蕩滌其邪穢 消融其査滓 故 學者之終 所以至於義精仁熟而自和順於道德者 必於此而得之 是學之成也
按內則 十歲 學幼儀 十三 學樂誦詩 二十而後 學禮 則此三者 非小學傳授之次 乃大學終身所得之難易先後淺深也 程子曰 天下之英才 不爲少矣 特以道學不明 故 不得有所成就 夫古人之詩 如今之歌曲 雖閭里童稚 皆習聞之而知其說 故 能興起 今 雖老師宿儒 尙不能曉其義 況學者乎 是不得興於詩也 古人 自灑掃應對 以至冠昏喪祭 莫不有禮 今皆廢壞 是以 人倫不明 治家無法 是不得立於禮也 古人之樂 聲音所以養其耳 采色所以養其目 歌詠所以養其性情 舞蹈所以養其血脈 今皆無之 是不得成於樂也 是以 古之成材也 易 今之成材也 難

악(樂)은 오성과 십이율이 있는데 번갈아 노래하고 갈마들며 화답하며 그러면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팔음의 마디는 사람의 성정을 기를 수 있다. 그래서 때를 씻어주고 찌꺼기를 녹여준다. 그리하여 배우는 마지막에 뜻이 면밀해지고 인(仁)이 익어 자연히 도와 덕에 조화롭게 따르게 되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얻게 되니 이것은 배움의 완성이다.
내칙(內則)을 상고해보면 ‘10세에 어린이의 예의범절을 배우고 13세에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우며 20세 이후에 예를 배운다고 했으니 이 세 가지는 소학(小學)에서 배우는 순서가 아니고 대학(大學)에서 종신토록 행하여 얻는 바의 어렵고 쉬움, 먼저와 나중, 얕고 깊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정자 말씀하셨다. “천하에 영재가 적지 않으나 다만 도학에 밝지 못해 성취가 없다. 옛 사람들은 고시를 지금의 가곡처럼 알아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라도 모두 익히 그것을 듣고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능히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나이든 스스와 유생들도 오히려 고시의 뜻을 알지 못하니 하물며 배우는 사람에랴. 이는 시에서 일어서지 것이다. 옛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는 것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예가없음이 없었다. 지금은 폐기되고 무너져 이 때문에 인륜이 밝지 못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예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의 음악은 소리는 귀를 기르고 색은 눈을 길렀으며 노래와 영송은 성정을 함양하고 춤추는 것은 혈맥을 길렀다. 지금은 모두 그것이 없으니 이것은 악에서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인재를 이루기 쉬웠은 지금은 인재를 이루기가 어렵다.

10.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하면 난을 일으키며 사람이 인하지 못한데 그것을 너무 싫어하면 난을 일으킨다.”

好勇而不安分 則必作亂 惡不仁之人 而使之無所容 則必致亂 二者之心 善惡雖殊 然 其生亂則一也
용맹을 좋아하고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키며 이나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여 그를 용납하지 못하면 난을 일으키니 두 가지 마음은 선악이 비록 다르지만 그것이 난을 일으키므로 마찬가지다.

 

 

이번에 읽은 것 중에 다른 사람의 불인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불인을 용납하지 못하는 엄격함은 오히려 난을 유발하고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면 매번 그래도 나는 ‘이편’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매번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나와 멀다는 이상한 자기반성 같은 것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면서 ‘저편’에 있는 불인(不仁)한 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 자체가 아주 엄격한 이분법에 갇힌, 그래서 오히려 어지러운(亂)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 시간에는 술이장 시험을 아주 길게 보았죠. 시험답안지 쓰다가 손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ㅠㅠ 밥 때가 되어서도 발분망식하여 작성한 답안지는 다음 시간에 채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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