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7월 10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7-06 14:06
조회
134
꿀같은 방학은 잘들 보내셨나요^^? 정신없이 또 한 주가 지나갔네요. 벌써 7월이고, 다음 주면 또 새로운 시즌이 시작됩니다. 공지에 앞서서 지난 시간 채운샘 강의를 조금 복기해보겠습니다.

이번에 채운샘은 강의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각자가 니체를 읽으며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부분을 이야기해볼 것을 제안 하셨습니다. 자유정신, 자유의지 등의 개념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신 분들도 계셨고, 기독교라는 키워드를 통해서만 니체를 만나게 되는 게 문제로 느껴진다고 하신 분도 계셨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와서 전보다 집중도가 떨어진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또 니체와 어떻게 만나야할지 아직 그 접점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고요. 채운샘 강의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많이 건드려주었지만, 저는 각자가 니체를 읽으며 부딪친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그 시간 자체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다 같이 소리 내서 읽고 토론하기에도 바빠서 서로가 어디에 꽂혀 있는지, 어느 지점에서 막혀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강의시간이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공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달까요?

그 와중에도 모두가 비슷하게 느끼고 있던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낯선 형식(아포리즘)에서 오는 어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전체적인 맥락은 잡히지 않고, 뜬금없이 이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고, 그럴수록 집중력은 떨어지고…. 『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에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저는 독자로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당혹감을 느낀 것이 저 뿐만은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세미나 때 짧은 아포리즘이 연이어 나오는 대목에 대해서는 농담 삼아 ‘이때 니체가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라고 말하고 넘어가기도 했었죠.

그런데 채운샘은 오히려 체계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은 이해의 완벽함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요? 채운샘은 음악과의 비교를 통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악기들이 내는 모든 음들을 이해해야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죠. 음악의 즐거움은 음악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음악을 감상하듯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일까요? 혹은 반대로 질문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완벽한 체계를 원하는 것일까요? 막상 수학 공식처럼 완벽한 체계에 의해 쓰여진 책들은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것입니다(니체를 읽을 때는 체계 없음이, 스피노자를 읽을 때는 완벽한 체계가 독서의 장벽이 되는 현실입니다ㅠㅠ). 아마도 문제는 우리가 다양한 형식들에 동시에 변용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되지 못한 데에 있을 것입니다. 채운샘은 니체가 흩뜨려 놓은 파편들을 나름의 방식대로 맞추면서 가는 것 자체가 사유의 즐거움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흔들리고 길을 잃는 것을 너무 피곤해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러한 종류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니체는 ‘방법’을 부정한 철학자라고 합니다. 형이상학은 개념을 정치하게 정의하고 그러한 개념에 따라서 엄밀하게 사유를 전개할 때 철학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완벽한 방법적 구조가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죠. 그러나 니체는 세계를 설명한다고 나서는 모든 것들을 의심했습니다. 사실 철학은 세계 안에 있고 특정한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죠. 그런데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세계를 재현할 수 있다고 나설 때 항상 그 기원은 은폐되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니체가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을 비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죠. 그런 점에서 체계와 방법을 무시하는 아포리즘 형식은 그 자체로 니체의 철학적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체는 개념의 선험적 정의를 통해 세계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니체의 질문은 ‘어떻게 세계를 설명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것이 삶에 소용이 되게 할 것인가’라고 합니다. 삶을 규정하는 선험적 정의가 삶 위에 군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것들을 삶에 대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 이때의 ‘삶’은 생성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한 순간도 머물러있지 않고 우리의 몸은 한 번도 같은 것을 겪지 않죠. 형이상학은 이러한 머물러있지 않은 세계를 견뎌내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삶의 유용성의 관점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이러한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세계를 더 능동적으로 살아가게 하는지, 혹은 그것을 부정하게끔 하는지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에도 방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구성적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는 ‘소여’를 거부했습니다. 선/악, 자유, 관습, 신앙…인간 등 모든 것을 ‘주어진 것’의 관점에서 보지 않았죠. 그러므로 니체에게는 어떤 주어진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능동적으로 구성해나갈 것인가가 문제가 되죠. 소크라테스 이후 형이상학의 과제는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올바른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니체는 모든 것의 존재성은 자신의 힘을 확장하려고 하며,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기쁨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수동적이 되며, 스스로 구성해낼 수 있을 때 우리의 역량은 그만큼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유가 삶에 유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완벽한 체계를 수립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유가 스스로의 생을 끊임없이 구성해내는 과정이 될 때 그것이 삶에 대해 유용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니체 읽기가 완벽한 이해라는 도달점으로 향하는 과정이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힘의 증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채운샘은 ‘니체 읽기에 척도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놓인 현실에 유용한 해석들이 있을 뿐이겠죠. 채운샘은 각자가 흥미롭게 읽은 아포리즘을 해석해 와서 ‘더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더 멋진 해석’을 두고 경쟁해볼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세미나를 더 재밌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세미나를 보다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해 보아야겠다는 뻔한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거나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언제든 제안해주세요^^)

다음 주 공지 나갑니다. 모집 공지에 적어놓은 것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의 6, 7장을 읽어오시면 되고, 발제는 은남샘이 맡아주셨습니다 :) 간식은 지난번에 안 정해서 제가 문자로 통보(^^;)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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