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 복습] 자한 10~12, 17, 18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07-25 18:41
조회
140
2017.7.23 격몽스쿨 복습


이번시간은 자한 10장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10장은 안연이 공자를 예찬하는 장으로 주석이 아주 많이 달려있는걸 보아 중요한 장으로 여겨집니다. 배움은 무엇이고, 배우는데에는 어떤 경지가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이기도 합니다. 채운샘이 풀어주신 부분 중 중요해보이는 몇가지를 복습해 보겠습니다.


十. 顔淵 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 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競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안연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우러러 볼수록 선생님은 더욱 높아지고, 꿰뚫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며, 바라볼 때는 앞에 있었는데 홀연히 뒤에 계시는구나!”

부자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주셨다.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으니,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는데(나의 재능을 다하였는데), <선생님이> 내 앞에 우뚝 서 계시는 듯하구나. 내가 그를 따르고자 하나 행하지 못하겠구나”


+ 可欲之謂善 充而至於大 力行之積也 : 선인에서부터 채워서 대인에 이르기까지는 실천을 힘써서 행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선인’에서 ‘대인’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데요, ‘힘써서 행하면’ 마일리지가 쌓이듯 언젠가 대인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즉 ‘선인’에서 ‘대인’에 이르는 것은 노력여하에 따라 도달 가능한 일인 것이지요. 그러나 ‘대인’에서 ‘성인/신인’에 이르는 것은 노력한다고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안회는 노력해서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大人)까지 갔지만, 성인에는 이르지 못하여 아성(亞聖)이라고 불린답니다.

유가에는 이렇듯 배우는 자의 등급이랄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맹자 하편 25장>에 보면 유가에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경지를 등급별로 분류해주고 있는데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인 → 신인 → 미인 → 대인 → 성인 → 신인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것은 신인의 경지이고, 그 시작은 선인입니다. 맹자는 이 각각의 단계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주고 있습니다.

“일을 꾸미되 가증스럽지 않고 하고자하는 의지가 굳세다면 선인이라 이르며(曰 可欲之謂善), 선을 자기 몸에 소유하면 신인이라 이르고(有諸己之謂信), 선을 힘써 행해서 충만하여 쌓이고 꽉참에 이르면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서 있으니 밖에 나가 기다릴 필요가 없는 상태를 미인이라 이르고(充實之謂美), 충실하여 그 광휘가 밖으로 드러나 덕업이 지극히 성하여 더할 수 없다면 대인이 이르고(充實而有光輝之謂大),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함을 성인이라 이르고(大而化之之謂聖), 성스러워 알 수 없는 것을 신인이라고 한다(聖而不可知之之謂神).” (맹자 하편 25장) 


+ 夫子循循善誘 先博我以文 使我知古今, 達事變 : 선생님은 <나를> 잘 이끌어주셔서 먼저 나로 하여금 학문으로 넓혀주시고, 고금을 알게 해서 일의 변화에 통달하게 해주셨다. 

역사철학을 알면 살아보지 않아도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그 일의 변화를 통달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철학을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할까요? 우리가 사는건 기껏해야 100년이고, 우리의 경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허나 공부를 통해 경험 이상의 것- 세상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금의 변화에 통찰력을 얻는 것, 그것을 ‘달사변達事變’이라고 합니다. 경험은 한정적이고 딱 자신의 방식대로만 경험하게 되어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고 통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박문博文(배움을 넓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배우기만 해서는 안되고 실천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배우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나를 예로서 단속하는 것)을 약례約禮라 합니다.


+ 欲罷不能 :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지요ㅋ 멈출 수 없는 어떤 본능! 채운샘은 이것을 philosophy와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어요. philosophy에서 ‘philo’는 나도 모르게 끌리는 것을 말합니다. 철학은 지혜를 알고자 노력하는게 아닙니다. 누구를 좋아한다는건 ‘쟤를 좋아해야지’ 하고 마음 먹어서 끌리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마음이 그리로 가는거지요. 그래서 플라톤은 philosophy를 eros와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연인에 끌리듯이 나도 모르게 지혜에 끌리는 것! 공부를 에로스와 연결시킨 <자한>17장(子曰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아도 재미있겠습니다.


+ 盡心盡力 不少休廢 然後 見夫子所立之卓 :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쉬지 않은 연후에야 선생님이 우뚝 서계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위대함을 알아볼 수 있으려면, 그걸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안연이 공자를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탁연함을 알아보는 경지에 이르른 사람이기 때문일테지요. 안연은 성인이 되는걸 목표로 삼았습니다. 어떻게든 성인이 되겠다, 마음을 먹어야 안연의 경지에라도 갈 수 있습니다. 깨달아야지, 해야 깨달음 근처에라도 간다는 것! 공부에는 발심이 정말 중요하다는걸 다시금 일깨워주는 문장이 아닐 수 없지요.


十一.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공자께서 병이 심해지자, 자로(子路)가 문인으로 가신(家臣)을 삼았다. 

병이 차도가 있자 말씀하셨다. “오래되었구나, 유(由)가 사기(거짓)을 행함이여! 나는 가신(家臣)이 없어야 하는데 가신(家臣)을 두었으니,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또한 내가 가신(家臣)의 손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니네들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내가 비록 큰 장례(葬禮)는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설마 길거리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十二.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沽之哉 我 待賈者也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훌륭한 옥이 있다면 그것을 궤짝에 넣어 보관하시겠습니까(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①‘값 가’자로 해석할 경우] 좋은 가격을 구해서 그것을 팔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나를 잘 발휘할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②‘상인 고’자로 해석할 경우] 좋은 값을 쳐주는 상인(군주)을 구해서 그것을 팔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값을 쳐줄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나는 나를 알아보고 인재로 등용해줄 군주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 미옥(美玉)은 공자님의 재능을 비유한 것입니다. 자공은 공자에게 묻습니다. 재능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고 은둔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잘 써주기를 기다리는건지. 이런 질문은 자공과 공자 사이에 어느정도 지적 소양과 캐미가 통해야 가능할거 같습니다. 정말 옥을 팔거라고 생각하면 노노~ ㅋ


+ 賈자를 ‘값 가’자로 해석할지, ‘상인 고’자로 해석할지에 따라 뉘앙스가 조금 달라집니다. ①’값 가’자로 해석할 경우 공자는 ‘때’만 만난다면 언제든지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적극적인 언표로 비춰집니다. ②’상인 고’자로 해석할 경우 ‘팔긴 팔아야겠다만.. 나를 알아봐주는 군주가 있으려나’ 하는 쓸쓸한 뉘앙스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十七. 子曰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덕(=學)을 좋아하는 것이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十八.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饋 止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吾往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학문은>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 것과 같다. 한 삼태기 때문에 이루지 못해도(거기서 그치더라도) 내가 <스스로> 멈추는 거다. <학문은> 비유하자면 <움푹 파인> 땅을 평평하게 하는 것과 같다. 비록 한 삼태기를 엎어서 나아가더라도 내가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다. 

 

+ <자한>편에서 이 이후로는 공부 이야기가 주로 나옵니다. 18장은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그치는 것도 결국 한 줌의 흙만큼의 노력이라고 전합니다. 공부는 (비유하자면) 움푹 파인 땅에 한줌의 흙을 덮는 것으로 시작해야 나아갈 수 있지요. 반면 흙 한줌이 모자라 공부를 완성을 못하는 것도 결국 자기가 거기서 멈춘 것입니다.


+ 中道而止 則前功盡棄 其止其往 皆在我而不在人也 : 길을 가는 중간에 그치면 앞에 쌓은 공이 남김없이 버려진다. 멈추거나 나아가는건 다 나에게 달려있는거지 남에게 달린게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 중간까지 가서 그만두면, 중간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는 계속 가지 않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중간까지 읽다 덮어버리면 두 달 뒤에 펼쳤을 때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 것과 같지요.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것 ^^ 그래서 중도에 그만두면 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멈추는 것도 계속 하는 것도 다 나에게 달린 일이지, 남에게 달린게 아니니 自强不息함을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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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5 19:24
    깔끔하게 편집해서 올리니 읽기가 편하네요. ^_^ 욕파불능!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 17장과 연결되는 내용인 것 같아요. 배우는 것을 식색을 탐하듯이 하는 것이겠죠? 물론 그러면 식색에 더 이상 미련하게 매달릴 것 같지 않을 것이고 ㅋㅋㅋ 상상하기가 어렵네요. @.@

  • 2017-07-27 06:32
    아름다운 편집~^^ 각종 경지가 있지만 도달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이 100년이라니 0ㅁ0 마일리지 쌓기도 바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