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083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8-25 14:03
조회
128
이번 주에는 ‘영원회귀’ 개념을 본격적으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삶을 다시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하는데, 제가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면 삶을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실수를 바로잡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영원회귀는 제 망상과는 상반되는 질문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으며 시간 자체도 일종의 둥근 고리”라서 같은 것이 영원히 회귀한다면, 그래도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수 있느냐, 다르게 될 수 있다는 믿음 없이도 여전히 삶을 선택할 수 있느냐. 니체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회귀하는 것은 ‘생성’입니다. 영원회귀 개념은 차이가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존재론에 대한 사유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복’을 통해 자기 자신의 동일성과 세계의 동일성을 확인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세계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지만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기에 우리는 분열증에 걸리지 않고 세계와 나를 일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플라톤이라면 어떤 변치 않는 ‘본’에 의해 생성하는 것들의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말했겠죠.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반복이란 차이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안정’, ‘동일성’, ‘질서’를 출발점으로 놓고 ‘무질서’와 ‘불안정’을 ‘예외’나 ‘결여’로 파악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은 ‘안정’, ‘동일성’, ‘질서’야말로 예외적인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히 회귀하는 생성이 만들어낸 ‘준안정적 상태’이기 때문이죠.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은 생성이 한 순간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준안정적’ 동일성이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차이들을 주파해야 하듯, 모든 반복되는 흐름은 영원히 회귀하는 생성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본질은 흐름이며 동일성은 결과물일 뿐이죠.

삶은 차이의 영원회귀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보장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죠. 생성은 우리가 부여한 목적과 의미에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던진 돌은 시간이라는 ‘둥근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윤리적 ‘결단’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무의미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한 진정으로 윤리적인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겁니다. 그때의 윤리란 스스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다시 수확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겠죠. 무의미를 이해하고도 웃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어떤 보장이나 약속 없이도 무의미와 더불어 윤리를 창조해낼 수 있는 자만이 삶을 결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를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호정샘과 현희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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