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0906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9-12 20:20
조회
51
후기가 너무나 늦어져버려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벌써 내일이 수요일이네요. 니힐리즘보다도 저는 우선 저의 나태함과 싸워야 하지 않을지…. 각설하고 지난 시간 몇 가지 흥미로웠던 이야기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오

“방금 세계는 완전해지지 않았는가?”(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p.452)

‘위대한 정오’. 니체는 정오를 좋아했죠.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 세계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시간. 잉여가 없는 시간. 니체에게는 “자정이 곧 정오이기도”(차라투스트라, 530) 합니다. 이때 자정-정오란 명암의 대비가 사라지고, 모든 경계와 구분들이 해체되는 시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오는 세계의 완전함을 드러내주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한 상태와의 비교 속에서 이야기되는 완전한 상태는 아닐 것입니다. 세계가 완전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경계나 구분, 규정으로도 환원되지 않은 채 부단히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일 것입니다.

채운샘은 정오에 대한 니체의 사랑이 그의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는 매순간 잉여를 남기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죠. 다만 우리의 부적합한 인식이 그것을 고정된 상으로 붙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깨달음이란 고정된 인식을 넘어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직접 감각하는 일이 아닐까요? 세계가 멈춰있지 않음을 일별하는 순간. 채운샘은 반 고흐의 그림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 눈에도 고흐의 그림들은 그가 감각한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명상을 오래 한 사람들은 세계가 고흐의 그림처럼 감각된다고 말하기도 한다네요.

모든 위대한 철학자와 예술가는 구분과 규정을 넘어서 있는 세계를 감각한 자신의 경험을 다시 어떤 고정된 틀 안에 담아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요? 고흐가 자신이 감각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해야 했던 것처럼, 니체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만의 언어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언어로 붙들 수 없는 경험을 언어화하기 위해 ‘상징’을 사용합니다.

니체의 상징은 ‘비유’가 아니라 ‘힘’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니체가 비유에 의존하는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니체 자신이야말로 비유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에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며, 니체의 상징은 의미를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니체의 상징은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를 더 잘 인식하게 하는 대신, 그 독특한 뉘앙스가 지닌 힘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합니다.

의식은 6분의 1이다

니체는 ‘의식의 특권성’을 비판합니다. 이 부분이 가끔 아리까리 하죠. 이런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감각의 문제라면, 의식과 이성은 없는 건가?’ ‘그것들은 인간적인 착각의 산물일 뿐인가?’ 이러한 헷갈리는 부분들을 이번 주 강의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세계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구분하고 둘 사이의 우열을 가르는 데에 있습니다. 니체가 정오를 좋아했던 것은 정오가 이러한 구분의 무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의식이 허상인 것이 아니라 의식과 감각의 구분, 그리고 의식에 부여된 특권이 허구입니다. 채운샘은 의식 또한 감각의 일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해서, 인간의 인식을 이루는 여섯 개의 뿌리로 눈(眼), 귀(耳), 코(鼻), 입(舌), 몸(身), 뜻(意)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의식에 해당하는 ‘意’는 다른 감각기관들과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은 인식을 관장하는 초월적 주체가 아니라 인식을 구성하는 감각의 일종인 것이죠. 불교에 따르자면, 의식이 우리의 지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분의 1입니다.

세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달라지기 위해선 의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특권화하고 있는 의식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요? 명상이나 수행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신비로운 체험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언어표상의 사슬에 기대어 있습니다. 언어의 규정성 안에 포획되는 것들만 우리의 지각대상으로 출현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의 그물망에 교란을 주는 것, 채운샘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각을 하나 돌리’는 일이 특권적인 의식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니힐리즘

들뢰즈는 이번 4부에 나왔던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이 니힐리즘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들뢰즈는 이들의 다양한 면면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니힐리즘이라고 본 것입니다. 니체 철학에서 니힐리즘은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니체 자신의 철학조차도 니힐리즘으로 규정되곤 합니다. 비포는 니체 철학을 ‘해석학적 니힐리즘’이라고 규정하면서, “해석학적 니힐리즘은 세계를 존재론적 본질이 깃들거나 도덕적 진실이 드러나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활동으로부터 끊임없이 의미가 창조되는 장소로 인식하는 데서 비롯”(《죽음의 스펙터클》, p.112)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비포는 니체의 사유에 ‘본질’이나 ‘진실’, ‘존재론적 기반’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을, 말하자면 ‘능동적 니힐리즘’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이때의 '해석학적 니힐리즘'은, 신의 죽음 이후에도 가치의 전환을 거부하고 다른 우상, 또다른 존재론적 기반을 찾는 '보다 지체높은 인간들'의 니힐리즘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니힐리즘입니다. 이상주의나 낭만주의는 허무주의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또 다른 유형의 허무주의입니다. 문제는 각각의 니힐리즘이 지닌 힘의 질을 질문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의 니힐리즘과 니체의 해석학적 니힐리즘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요? 저는 4부 후반부를 읽으며 ‘웃음’이 키워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는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가?'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이여, 배우도록 하라. 웃는 법을!”(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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