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0.26 공지~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10-19 19:24
조회
87
2017.10.19 <시골의사(1919)> 단편집


이번에 읽은 작품은 <시골의사(1919)> 단편집입니다. 마침 카프카 작품을 애니매니션화한 작업이 있어 강렬한 영상으로 세미나를 시작했지요. 야마무라 코지가 해석한 <시골의사>는 으스스한데 어딘지 웃음 코드가 있는 영상이었어요. 그 질감이며 속도감, 인물들의 표현, 의사의 이중 나래이션, 마지막 장면의 얼굴이 바뀌는 작가의 해석도 훌륭했구요. (전 특히 환자 집 앞에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채 노래부르는 성가대가 좋더라구요ㅋ) 다시 한번 보고싶으신 분은 이곳을 클릭 >>  https://www.youtube.com/watch?v=ZDjmW-gIsKs




# 카프카의 시간관

<시골의사(1919)>단편집에 나오는 작품을 영상으로 떠올려보면 굉장히 강렬한 느낌입니다. 살인이나 흡혈의 이미지, 매캐함, 차가움, 탁함, 소리나 색채가 극화되서 눈보라가 갑자기 멈추고 마차가 적막한 달빛 아래 있는 등 장면들이 갑자기 비약되고 급변하지요. 선민샘은 이 단편집이 ‘시간’을 연구하기 좋은 작품이라 하셨어요. 순식간에 환자의 집에 도착하는 시골의사, 출발은 늘 갑작스럽고 모피옷을 입고 나왔다가 벌거숭이로 겨울의 눈보라 속을 떠도는 모습하며.

이렇게 표현한 걸 보면 실제로 카프카가 느낀 세계도 그런 점이 있었을 터인데, 카프카는 어떻게 ‘시간’을 사유하고 있었길래 이런 구도로 작품을 써나간걸까요. 근대인에게 익숙한 직선적 시간관이나, 원형의 시간관으로는 잘 해석되질 않아요. 작품에 등장하는 노는 아이들이나 유목민은 시간을 교란시키기도 하고, 오드라데크는 시간을 타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기도 하죠. 재칼은 죽음의 시간을 완성시키는 존재처럼 읽히기도 하고요. 사냥꾼 그라쿠스는 죽어서도 현세를 돌아다녀서 죽어도 죽었다고 볼 수 없지요.

죽음 혹은 끝이라는걸 윤색해버리거나, 결론을 짓지 않음으로서 끝을 열어젖혀 버리는, 카프카가 창출하려던 시간관이 무엇인지 더 고민해봐야 겠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벤야민의 카프카론도 시간을 다루고 있는데 다시 읽어보면 좋겠어요. 불면과 꿈, 돌연한 출발, 무한한 지연, 죽음 그 이후, 등등 카프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아 작품을 꿰어내는 것도 흥미로운 숙제가 될듯 합니다.


# 관료주의

<만리장성의 축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보의 양에 따라 층층이 단계가 나누어집니다. 전체의 설계도를 꿰고 있는 지도부, 그 전모를 다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 중간 관리자, 미장이, 막일꾼 등 정보에 따라 세계를 보는 시점이 다른 자들이 등장하지요. 카프카가 생각한 관료주의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막연히 황제의 명령을 받아 장성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을 쌓고자 하는데에는 분명 인간의 욕망도 작용하지요. 인간은 장성을 쌓지만 갇혀있는걸 참지 못합니다. 설령 그게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것이라 해도 말이지요. 그렇게 부분 부분 축조되는 장성이 하나로 연결될 리 없습니다. 누군가는 열심히 명령을 수행하여 장성을 쌓지만, 그 빈틈으로 새어나가며 끝까지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들도 있지요.

장성 안에 머무는가, 밖에서 유목하는가- 사실 어디에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거 같습니다. 그냥 우리는 다 숨쉬려고 합니다. 한 인간 안에는 장성을 쌓고 거기에 의탁하고자 하는 본성도 있으며, 반대로 출구를 찾으려는 본성도 있지요. 때문에 인간은 제도와 절차를 통해 계속 장성을 쌓아나갈테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빈틈도 만들어냅니다. 그 빈틈이 순간순간 제도를 고장내기도 하고요.

카프카가 생각하는 관료주의란 뭘까요. 개인이 소거된 추상화된 인간들은 문서로써 접촉하고, 체계를 잘 갖춘듯 하지만 거기에선 오해가 일어나고 지연되기도 합니다. <유형지에서>의 장교는 탐험가에게 열심히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죠. 헌데 말로써 빈틈을 점점 메꾸고 설명이 완벽해질수록 그것은 기능을 상실하고 종국에는 터져버리고 맙니다. 관료주의란 완벽한 체계로 돌아가던 것이 아니라 빈틈을 통해 삐그덕거리며 작동하고 있던 무엇이었을까요?


 # 목적 없는 수단

가장은 왜 오드라데크에 대해 근심할까요? 어쩌면 이 작품은 ‘시간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사람들은 오드라데크의 언어적 기원을 묻고 그것을 근거로 증명해보이려고 하지만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보면 그 기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원은 목적과 출발지로서 의미가 있는데 원점에 가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저 출현해서 움직이는 무엇이 있을 뿐입니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연속성’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아들을 낳고 다시 아들을 낳아서 아버지라는 기호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죠. 헌데 오드라데크는 집 주변을 얼쩡거리면서 그 기호에 포착되지도 않고 기호를 교란시키기도 합니다.

목적적 시점을 지닌 아버지는 역사학자들과 비슷합니다. 역사는 목적을 중심으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걸러버리지요. 아들이 될 것과 되지 못할 것. 이 시간적 연속에 아버지에 목적에 맞지 않게 끼어든 오드라데크. 오드라데크가 시간을 타지 않는 존재라면 가장은 시간을 의식하는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시간관이 지정학적으로 자기를 설정해가며 차곡차곡 발전을 향해 가는 것이라면, 오드라데크는 목적이 없으니 시간 자체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시간관에 끼워맞춰지지 않는 것이지요. 선민샘은 이런 특징을 ‘목적 없는 수단’이라 하셨어요.

그러고보면 카프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듯 해요. 의지나 의욕을 불태우는 인물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플랜을 짜고 움직이기보다는 조건에 즉각 반응하며 길을 내고, 아무런 출현의 예고 없이도 돌출적으로 등장해서 일정 구간만 동승하는 등. 의지나 계획을 가지고 무얼 하기보다 조건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고 가는 비인간적 면모가 돋보이지요. 잘 보면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은 이니셜 정도로 표기되거나, 이렇다할 개성이나 성격도 없고, 능동인지 수동인지 잘 구분되지 않아요. 그래서 코드화하기 어렵지요. 전 이번에 읽은 작품 중 <열 한명의 아들>이 참 좋았는데, 앞에 한 설명이 뒤에서 곧바로 전복되어 표상화할 수 없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학술원의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 페터도 이 조건 속에서 한 걸음을 걷는게 중요하지, 결과를 예측하고 어떤 의지를 내지는 않지요.


# 자유 vs. 출구

성연샘의 발제문을 보며 ‘자유’와 ‘출구’의 근본적인 차이는 뭘까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학술원에의 보고>는 이 두 가지를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있어요. 원숭이 페터는 왜 동물원이 아니라 쇼무대-서커스장-으로 가고자 했을까요. 단순히 철장에 갇혀있고 싶지 않아서? 이걸 살펴보기 위해서는 페터가 선택한 ‘서커스장’이 뭔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거 같아요.

실로 쇼무대는 인간이라는 관객이 있고, 인간화된 언어로 무언가를 발표한다는 점에서 학술원과 비슷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건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게 말하지만 페터의 행위는 인간의 언어 안에 다 포섭되지 않습니다. 그는 발표를 마치고 암컷 침팬치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요. 페터의 변신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어요. 실로 그가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변신의 과정에는 완료가 있을 수 없겠지요.

페터가 철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을 모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없는걸 ‘배워서’ 출구를 마련한 것이지요. 패터에게 있어 ‘자유’와 ‘출구’를 구분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배움’입니다. 자유는 ‘공간적’ 이미지입니다. 망망대해의 바다, 사방이 뚫려 있는 어딘가를 꿈꾸게 하죠. 반면 출구는 늘 배우는 행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배우는 중에는 출구가 열리지만 배우는 일이 끝나면 출구도 곧바로 닫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출구는 ‘시간적’입니다.

<법 앞에서>의 시골사람도 문 앞을 떠나지 않지요. 그는 어쩌면 문 너머의 자유를 꿈꾸는 자이기보다 지금 문 앞에서 문지기 곁을 배회하며 작은 출구들을 죽을 때까지 만들었던 자는 아닐까요? 카프카에게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내 앞에 있는 작은 출구를 만들어내는 일밖에 없었던거 같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망망대해의 자유를 갈망하거나 겨우 작은 출구를 하나를 열고 거기에 머무는걸 자유라고 생각하곤 하죠. 반면 페터는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철장에 자신을 가둬넣은 인간들을 수단 삼아서라도.


읽어올 부분은 <어느 단식 광대(1924)>입니다. ‘예술’에 관련된 작품들이라 하네요.

<첫번째 시련> .. 아무나

<작은 여인> .. 이응

<어느 단식 광대> .. 성연, 수경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 지니

여기에 보태어 다음 시간에는 어떤 주제로 단편들을 엮어볼지 자신의 키워드를 잡아옵니다. 카프카 시즌3의 미션은 키워드를 통해 비평문을 써보는 것ㅋ 재미난 키워드들로 다음주에 만나요~

이번주 후기와 다음주 간식은 보영~ 후기는 3일 안에 부탁드릴게요 //-// (하트)
전체 3

  • 2017-10-20 14:41
    '아무나'란 보영? / 글은 오지게 짧은데... 읽을 때도 힘들고 쓸 때도 힘들고 세미나에서도 힘든 카프카님입니다. 다음 번에는 내 기필코...!

    • 2017-10-21 23:37
      아앗! 보영은 작은여인/요제피네 둘 중 하나였던거 같은데..! 읽어보고 맘에 드는 작품으로 ^ㅇ^

  • 2017-10-20 17:18
    우리 각자가 만나는 카프카들이 있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열한 명의 아들들이 가진 리듬을 재미있게 포착해내다니, 이응은 대단! 그럼 입구도 출구도 없는 카프카의 미로 속을 다음 주에는 더 많이 해매보도록 해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