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10.2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10-20 10:34
조회
91
오랜만에 ‘꽉찬’ 세미나였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던 분들이 다시 합류하셨기 때문이죠. 새삼 한분 한분의 커다란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론 결석 없이 끝까지(!) 함께 해요~~

저는 이번에 읽은 부분 중에서 109절, “자제와 절제, 그리고 그것들의 궁극적 동기”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처음 니체의 아포리즘을 접했을 때에는 이런 구절들 보다는 좀 더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구절들(도덕이나 학문 자유 같은 거대한 주제들을 다룬 구절들)에 주목했었는데, 《아침놀》에 와서는 오히려 조금은 덜 중요해 보이는 구절들에 눈길이 가네요. 여전히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의 구별은 똑같이 작동하고 있지만요^^;

109절에서 니체는 충동을 극복하기 위한 6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째로,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하면서 가능한한 오랫동안 불만족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충동을 약화하고 시들게”하는 방법. 둘째, “충동을 만족시킬 때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과”하는 방법. 셋째, “의도적으로 충동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면서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역겨움을 통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을 획득”하는 방법(그러나 이 경우는 “죽을 때까지 말을 몰아대다가 결국 자신의 목마저 부러뜨리고 마는 기수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넷째, “매우 고통스러운 생각을 만족 전체와 확고하게 결부”함으로써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생각 그 자체가 늘 즉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방법(저는 영화 《시계태엽오렌지》가 생각났습니다). 다섯째, “생각과 육체적인 힘의 움직임을 다른 길로 유도함으로써 많은 힘의 방향 전환을 시도”하는 방법. 여섯째,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회피하는 것, 규칙을 충동에 심는 것, 충동에 대한 포만감과 역겨움을 만들어내는 것,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을 연상함으로써 힘들의 방향전환과 육체와 정신 전체의 약화와 탈진을 불러일으키는 방법.

적어도 이 구절 안에서는, 니체가 이러한 여섯 가지 방법 중 무엇이 가장 능동적인 방식이며 가장 수동적인 방식인지를 논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려냄으로써 우리의 신체가 기능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자제와 절제가 시도될 때 우리 내부의 투쟁의 전선은 이성과 충동 사이에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충동과 그것의 경쟁자인 또 다른 충동 사이에 그어진다는 점이죠. 이 과정 전체에서 우리의 지성은 “우리를 괴롭히는 격렬한 충동의 경장자인 다른 충동의 맹목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저는 이 109절을 읽으면서 신체에 대한 저 자신의 무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신체는 이성과 의지의 통제를 따르는 무엇이 아니라, 서로 다른 충동들의 각축장인 것이지요. 우리가 의지로 충동을 억누른다거나 이성이 욕망에 굴복한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실제로 벌어지고 있던 것은 충동들 사이의 투쟁과 재배치였을 것입니다. 만은 경우 우리는 신체에 너무나 무지한 나머지 충동에 굴복 당한 이성이라는 망상 속에서 죄책감을 만들어내 스스로를 괴롭히며 모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사유의 영향 하에 있음은 신에 대한 믿음 따위가 아니라 신체에 대한 지독한 무지를 통해 증명되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불교가 ‘탁발’, ‘야외생활과 유랑’, ‘절제되고 선택된 식생활’이라는 생리학적 조치들을 그 계율에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는 이런 것들을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비하면 훨씬 덜해졌지만, 여전히 니체는 ‘막 던지는’ 것 같습니다. ‘아님 말고’라는 태도가 저변에 깔려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물론 “나는 여전히 문헌학자다”라고 말하는 니체는 모든 구절을 엄밀한 사유와 문헌학적 고증을 통해서 썼을 것입니다. 다만 확고부동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영원한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자만심 때문에 말을 삼키는 니체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는 거죠. 어떤 무구함 속에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 이것이 니체의 정직성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혼자 이런 망상을 하다가 ‘나도 니체처럼 막 던져야겠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좀 더 막 던지는 세미나가 되어도 재밌을 것 같네요~^^

다음 주 발제는 경아샘께서, 간식은 수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책은 《아침놀》 3권(234페이지까지)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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