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독중용법, 중용 22장~26장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2-19 22:39
조회
114
너무 늦었군요. (_ _)...... 요새 나사가 몇 개 빠진 것처럼 잘 집중이 안 되네요. 그래도 마음을 다 잡고 매일 아침 중용을 읽으면서 정신집중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독중용법과 22장부터 26장을 봤습니다. 우선, 독중용법을 다시 해석하려고 하니 잘 안 되네요. 하하;; 우쌤은 어느 글자들은 해석 안하셔도 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해석해야 할 글자들을 어떻게 해석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약간의 인터넷 해설을 참조했습니다. ^^;;

중용장구서 마지막 구절에는 처음 읽는 사람에게 얼마간의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해서 남몰래 감동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깨우쳐지지 않는다고 하니, 이 무슨 변덕인가요. 독중용법은 주자의 말들을 여기저기서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때 전후맥락이 조금 삭제된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독중용법의 편집자는 미상이지만,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영락제 시대의 호인이란 사람입니다.

독중용법에 따르면, 중용은 크게 여섯 마디로 정리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1장은 중화(中和), 2장부터 11장은 중용(中庸), 12장부터 19장은 비이은(費而隱), 20장부터 26장은 성(誠), 27장부터 32장은 대덕(大德)과 소덕(小德), 그리고 마지막 33장은 다시 중화(中和)를 주제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쌤은 이렇게 읽으면 너무 복잡하고, 저 같은 초학자를 위해서 세 마디로 정리해주셨습니다. 1장부터 19장, 그리고 20장(애공문정장), 21장부터 33장으로 세 가지로 구분해서 읽으면 한 번 읽어도 마치 중용을 세 번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讀中庸法

 

朱子曰 中庸一篇 某妄以己意 分其章句 是書豈可以章句求哉 然學者之於經 未有不得於辭而能通其意者.

 

주자가 말하길, 중용 한 편은 내가 망령되이 나의 뜻으로 그 장과 구를 나누었다. 이 책이 어찌 장구로서 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글의 맥락에서 얻지 않고 뜻을 통한 학자는 있지 않았다.

 

又曰 中庸初學者未當理會.

 

또 말하길, 중용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깨달아 앎을 터득한 적은 있지 않았다.

 

이회(理會)는 ‘깨달아 알다’란 뜻입니다.

 

中庸之書難看 中間說鬼說神 都無理會 學者須是見得箇道理了 方可看此書將來印證

 

중용 책은 보기 어렵다. 중간에 귀()와 신()을 말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 도리를 보고 마쳐나갈 수 있어야 바야흐로 이 책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인증할 수 있다.

 

讀書之書 須是且著力去看大學 又著力去看論語 又著力去看孟子 看得三書了 這中庸 半截都了 不用問人 只略略恁看過 不可掉了易底 却先去攻那難低 中庸多說無形影 說下學處少 說上達處多 若且理會文義 則可矣

 

책을 읽는 순서는 모름지기 대학을 보는 데 힘을 다하고, 또 논어를 읽는 데 힘을 다하고, 또 맹자를 읽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 세 가지 책을 다 읽었다면, 중용의 반은 해결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 다만 대강대강 간과하여 쉬운 곳만을 봐서는 안 되니 먼저 이 책의 어려운 것을 공략해야 한다. 중용에는 형과 영이 없는 것이 많이 설명돼있다. 일상과 가까운 것을 설명한 것은 적고, 하늘에 가까운 것을 설명한 것은 많으니 글의 뜻을 깨우쳐 알아가면 된다.

 

讀書先須看大綱 又看幾多間架 如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此是大綱 夫婦所知所能 與聖人不知不能處 此類是間架 譬人看屋 先看他大綱 次看幾多間 間內又有小間然後 方得貫通

 

책을 읽는 것은 먼저 모름지기 그 큰 줄기를 먼저 보고, 또 많은 세부적인 것들을 봐야 한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는 것이 큰 줄기이고, “부부라도 알고 능할 수 있는 바와 성인이 알지 못하고 능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이 세부적인 것들의 종류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집을 볼 때, 먼저 큰 줄기를 보고, 다음으로 많은 칸막이들을 보고, 칸막이들 안에 또 작은 칸막이들을 본 이후에야 바야흐로 관통(貫通)할 수 있다.

 

간가(間架)에 대해 우쌤은 집의 뼈대를 이루는 칸살들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간(間)은 세로축(?)의 나무이고, 가(架)은 물건을 널어둘 수 있는 가로축(?)의 나무입니다.

 

又曰 中庸自首章以下 多對說將來 直是整齊 某舊讀中庸 以爲子思做 又時復有箇子曰字 讀得熟後 方見得是子思參夫子之說 著爲此書 自是 沈潛反覆 遂漸得其旨趣 定得今章句擺布得來 直恁麽細密

 

또 말하길, 중용의 첫 장 이하로 비교하여 말한 것이 많으니, 이것이 매우 정리되어 있다. 내가 옛날에 중용을 읽을 때 자사가 지은 것으로 여겼는데, 또 여러 차례 다시 자왈(子曰)”이란 글자가 있으니, 읽어가면서 생각을 많이 한 후에 바야흐로 자사가 공자의 말을 참고로 해서 이 책을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로부터 책 속에 깊이 빠져들기를 반복하여 마침내 점차적으로 책 속에 담긴 뜻을 얻고, 정하여 지금 장구를 얻어 펼칠 수 있게 됐으니, 이처럼 세밀하게 되었다.

 

침잠반복(沈潛反復)은 중용장구서에도 나왔는데, 주희가 책 읽을 때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물속에 빠지듯 텍스트에 깊이 빠져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近看中庸 於章句文義間 窺見聖賢述作傳授之意 極有條理 如繩貫棋局之不可亂

 

요사이 중용을 보면, 장구의 뜻 사이에서 성인과 현인이 저술하고 전수한 그 뜻을 볼 수 있으니, 그윽히 조리가 있는 것이 마치 바둑판에 먹줄이 관통하듯 어긋나있지 않다.

 

바둑판에 먹줄이 관통한 것 같다는 말은, 주희 자신이 정리한 대로 읽으면 바둑판에 가로줄과 세로줄이 일정하게 쳐져있듯이, 분명하게 구분하고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中庸當作六大節看 首章 是一節 說中和 自君子中庸以下十章 是一節 說中庸君子之道 費而隱以下八章 是一節 說費隱 哀公問政以下七章 是一節 說誠 大哉聖人之道以下六章 是一節 說大德小德 末章 是一節 復申首章之義

 

중용은 마땅히 여섯 개의 큰 마디로 봐야 한다. 첫 장은 일절로 중화(中和)를 설명한 것으로, 군자중용 이하로 열 개의 장까지이고, [그 다음] 마디는 중용군자의 도()를 설명한 것으로 비이은(費而隱) 이하 여덟 개의 장이고, [그 다음] 마디는 비은(費隱)을 설명한 것으로 애공문정(哀公問政) 이하 일곱 개의 장이고, [그 다음] 마디는 성()을 설명한 것으로 대재성인지도(大哉聖人之道) 이하 여섯 개의 장이고, [그 다음] 마디는 대덕(大德)과 소덕(小德)을 설명한 것이고, 마지막 장이 [그 다음] 마디이니, 다시 첫 장의 뜻을 펼친 것이다.

 

問中庸大學之別 曰如讀中庸求義理 只是致知功夫 如謹獨修省 亦只是誠意 問只是中庸 直說到聖而不可知處 曰如大學裏也 有如前王不忘 便是篤恭而天下平低事

 

중용과 대학의 구별을 묻는다면, 말하길, 중용을 읽는 것은 의리를 구하는 것이니, [대학으로 보면] ()를 확장하는 공부이고, 신독수성은 또한 [대학으로 보면] 성의(誠意)에 해당된다. 묻기를 중용에서는 단지 성에 도달하는 것만 얘기하고, 알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말하길, 대학은 안에 이전의 왕을 잊지 못하겠노라.”와 같은 것은 바로 공손함을 돈독히 하여 천하를 평탄히 하는 것의 일이 된다.”이다.

 

본문에는 근독수성(謹獨修省)이라 나왔지만, 근독(謹篤)과 신독(愼獨)은 통합니다. 이에 대해 우쌤은 전에 아마 신(愼)자를 쓴 황제가 있었을 것이고, 황제 이름에 들어간 글자를 원래 쓸 수 없기 때문에 신(愼)자 대신 근(謹)자를 쓴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22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이어야만 능히 그 성()을 다할 수 있고, 능히 그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성()도 다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고,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 더불어 참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는 뜻은 성인이 일일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하도록 만든다는 것이고, 우쌤은 다르게 말하면 자화(自化)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호변(虎變)이라 글자도 말씀해주셨는데, 마치 호랑이가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확 긴장하듯, 성인의 존재감만으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화(化)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만물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맹자로 보면 애물(愛物)과 같은 단계라고 하셨습니다. 맹자에는 친친(親親) 다음이 인민(仁民), 인민(仁民) 다음이 애물(愛物)로 나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찬(贊)은 ‘돕다’의 뜻입니다.

삼(參)은 숫자 3의 의미도 있지만, ‘참여하다’의 의미로 있습니다. 여기서는 ‘참여하다’의 의미로 쓰여서 “참”으로 읽었습니다.

22장까지는 천도(天道)와 생이지지(生而知之)를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저희 같은 학이지지(學而知之) 이하의 단계들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23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그 다음은 우리가 겪는 각각의 사건들을 다하는 것이고, 각각의 사건들에 능히 성실함이 있게 되면, 성실함은 겉으로 모양이 잡히고, 모양이 잡히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만이 능히 화()할 수 있다.

 

기차(其次)는 주석을 참고하면, “대현(大賢)이하 무릇 성(誠)이 지극하지 않음이 있는 사람들을 말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곡(曲)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단편적인 사건들을 말합니다.

형(形)은 내면에 쌓인 성(誠)이 저절로 외부로 드러나서 ‘각이 잡힘’을 뜻합니다.

저(著)는 군계일학(群鷄一鶴)과 비슷하게 여럿이 모여 있어도 그 중에 하나가 눈에 띔을 뜻합니다.

명(明)부터는 대인(大人)의 단계입니다. 여기까지는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물을 감흥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화(化)는 다른 존재를 질적으로 다르게 하는 것으로 《대학(大學)》에서 얘기하는 신민(新民)과 같습니다.

 

24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蓍龜 動乎四體 禍福將至 善必先知之 不善必先知之 故至誠 如神

 

지극한 성()의 도()는 앞날을 알 수 있으니, 국가가 장차 흥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국가가 장차 망할 때에는 반드시 괴이한 조짐이 있으니,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고, 통치자의 사지에서 움직인다. 화와 복이 장차 이름에 선함을 반드시 먼저 알고, 불선함을 반드시 먼저 아니, 그러므로 지극한 성()은 신묘하다.

 

우쌤은 길조와 흉조의 리스트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벼의 머리(?), 이삭(?)이 원래 한 줄기에 하나가 매달려야 하는데, 두 개가 매달리면 그 해의 풍년을 알리는 길조입니다. 서양에서는 흉조로 보던 것들도 동양에서는 길조로 보는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25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이란 것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는 마땅히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성(誠)은 사물이 스스로 이루어지는 까닭인데, 이것을 노자로 보면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도(道)는 첫 장의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도(道)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자도(自道)의 도(道)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할 행동들입니다.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君子 誠之爲貴.

 

()이란 것은 물의 끝이자 처음이니, ()하지 않으면 어떤 물도 없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성()한 것을 귀히 여긴다.

 

종시(終始)는 성(誠)의 작용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천하의 만물은 모두 실질적인 이치가 하는 바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성(誠)과 같은 이치가 먼저 작동하기 때문에 만물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이란 것은 스스로 이룰 뿐만 아니라 만물을 이루는 것이다. 자신을 이루는 것이 인()이고, 만물을 이루는 것이 지()이니 성()의 덕()이고, 안팎의 도()를 합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놓는 것이 마땅하다.

 

주석을 참고하면, “성(誠)이란 비록 스스로를 이루는 것이나, 이미 스스로를 이룰 수 있으면 자연히 다른 사물에도 미치니, 도(道)가 또한 저기에도 행해진다.”라고 돼있습니다. 여기서 우쌤은 자연급물(自然及物)에 주목하셨는데, 이런 말을 쓴 까닭은 주희도 정치나 교육이건 억지로 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시조지의야(時措之宜)를 두 글자로 압축해서 얘기하면, 시중(時中)입니다.

 

26

故至誠無息

 

그러므로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

 

무식(無息), 쉼 없음을 우리로 가져와서 보면 매우 갑갑하지만, 우주의 작동으로 보면 당연합니다. 조금의 간단(間斷)이라도 있으면 우주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不息則久 久則徵

 

쉼이 없으면 오래되고, 오래되면 징조가 드러난다.

 

구(久)는 중용(中庸)을 행하는 것이 항상됨을 말하고, 징(徵)은 구(久)를 행한 것이 밖으로 드러남을 말합니다. 세주를 참고하면, 내면의 여유로움이 밖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이 징(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순(純)이란 글자도 있는데, 이것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노자에서 도(道)를 묘사할 때, 위와 아래가 구별되지 않는 순연한 하나의 덩어리로 설명하는데, 그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징조가 드러나면 멀리 퍼져나가고, 멀리 퍼져나가면 넓고 두터워지고,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넓고 두터운 것은 만물을 싣는 바이고, 높고 밝음은 만물을 덮는 바이고, 멀고 오래됨은 만물을 이루는 바이다.

 

우쌤은 재물(載物)과 복물(覆物), 성물(成物)에 주목하셨습니다. 박후(博厚)의 작용이 만물을 싣는다는 것에서 땅과 같다고 하셨고, 고명(高明)의 작용이 만물을 덮는다는 것에서 하늘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유구(悠久)는 다른 말로 화육지공(化育之功)으로 노자의 생지육지(生之育之)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하고, 높고 밝음은 하늘과 짝하고, 멀고 오래됨은 헤아릴 수 없다.

 

무강(無疆)이란 표현은 천장지구(天長地久)와 같은 뜻입니다. 노자에서 우주의 작용을 묘사할 때 천장지구(天長地久)로 표현한 것처럼, 만물이 생기고, 자라고, 다시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음을 무강(無疆)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이와 같은 사람은 보지 않아도 빛이 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을 변화시키며, 함이 없어도 만물을 이룬다.

 

장(章)은 보통 ‘글’, ‘문장’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아름답다’의 의미로 쓰여서 미(美)와 통용됩니다.

변(變)은 나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위를 변화시키는 성인의 감화를 뜻합니다.

성(成)은 성물(成物)입니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 不貳 則其生物 不測

 

천지의 도()는 한 마디로 다할 수 있다. 만물을 이루는 것은 둘이 아닌즉 만물을 생하고 키우는 것은 헤아릴 수 없다.

 

본문에서 말하는 한 마디는 성(誠)입니다.

위물(爲物), 생물(生物)을 노자로 본다면, 도(道)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悠也久也

 

천지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래된다.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星辰 繫焉 萬物 覆焉 今夫地一撮土之多 及其 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一券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今夫水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生焉 貨財殖焉

 

지금 무릇 저 하늘은 작은 것들이 많아 헤아릴 수 없는 데 이르고, 해와 달, 별들이 저기에 걸려있고, 만물을 덮는다. 지금 무릇 한 움큼의 흙이 많아 넓고 두터운 데 이르면 높은 산을 실어도 무겁지 않으며, 강과 바다를 거두어도 새지 않으니 모든 만물을 싣고 있다. 지금 저 산은 한 주먹만한 돌이 많아 넓고 큰 것에 이르러서는 초목이 자라고, 금수가 거처하고, 온갖 보물이 거기서 나온다. 지금 무릇 물은 한 국자가 많아져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데 이르면 자라와 악어, 교롱, 물고기, 자라가 살고, 재화가 거기서 증식한다.

 

소(昭)는 ‘밝다’의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여기서는 ‘반짝이다’라는 뜻으로 “조”로 읽습니다. 우쌤은 이 글자는 시에서 가슴으로 그리워할 때 쓰이는 글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하늘에 박혀있는 많은 별들을 묘사하는 글자입니다.

측(測)은 보통 ‘재다’, ‘헤아리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앞에서도 측(測)을 천지의 운행의 헤아릴 수 없음의 뜻이었지만, 여기서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詩云 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 所以爲文也 純亦不已

 

시경에 이르길, "오직 하늘의 명이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는구나." 대개 말하길,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이다. "! 드러나지 않는구나. 문왕의 덕의 순일함이여." 대개 말하길, 문왕이 문왕이 된 까닭이니, 순일함이 또한 그치지 않는다.

 

목(穆)은 보통 ‘화목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심원(深遠)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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