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성 세미나

영어&영성 세미나 시즌1, 기억에 남는 문장들

작성자
정아
작성일
2021-08-12 12:28
조회
181
'우분투'를 주제로 8주간 이어진 <영어&영성 세미나 >시즌1이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성공회 신부가 쓴 '우분투'에 관한 책을 함께 읽으면서, '개인'과 '공동체', '나'와 '우리', '부분'과 '전체'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특히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개인’과 ‘공동체’가 아닌, 우분투식 ‘개인’과 ‘공동체’가 무엇일지 함께 고민해봤는데요,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것이 우분투가 말하는 공동체가 ‘아닌지’는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시작된 고민들은 각자의 마음 속에서 계속 싹을 틔워 나가겠지요.^^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함께 읽은 책에서 각자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뽑아 번역해보았습니다. 중간중간 뽑은 것이어서 이어지지는 않지만, 저희가 읽은 내용의 일부라도 나누고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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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자아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우분투의 개념 안에서 이 물음에 답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분투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제3의 존재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달리 말하면, 우분투는 개인과 공동체의 상보적 상태, 즉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분투는 타인에게서 무언가 얻는 것을 관계로 생각하는 불행한 경향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 그런 경향은 제3의 삶, 공동체적 삶을 탄생시킬 기회를 없애버린다.

우분투는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보이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가 실존의 현실임을 깨닫게 한다. 그 현실 안에서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우분투는 우리에게 관계와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문제를 탐구한 최고의 사상가들(사회 심리학자, 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또한 이런 관계 없이는 건강할 수 없으며, 행복이란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있는 곳에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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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가을, 피츠버그에서 열린 투투 대주교 기념 행사에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투투 대주교가 함께 하는 가운데, 나는 그가 세계에 준 위대한 선물, 즉 그가 제안한 기독교의 다른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제시하는 기독교적 삶에서는 어느 누구도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더 이상 기독교적 정체성은 정치 세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투투 대주교의 우분투에 기반한 기독교는 우리 자신을 기독교도라고 부르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투투 대주교의 증언이 국제적인 범위로 확장되면서, 그는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많은 타종교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갖는 기독교도가 되었다. 투투 대주교의 영성은 다른 이들의 신앙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타자성을 필요로 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다름은 그가 살아있는 신, 결코 인간의 규범이나 관습으로 귀속될 수 없는 신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실제로 나는 투투가 이런 충격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신은 기독교도가 아니다.” 이러한 통찰은 다른 종류의 기독교적 영성을 이해하고 있는 자의 관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영성은 경쟁적인 지식 체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 즉 뜻밖의 장소들에 신의 현존이 임하고 있음을 보라는 그 가르침에 의존한다.

투투 대주교에 대한 헌사에서, 나는 러시아의 신학자 니콜라스 베르쟈예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천국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심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여전히 누군가가 지옥에 있음을 알면서 어떻게 나만 죽은 뒤에 천국(우리의 모든 욕구가 충족될 그런 곳)에 갈 수 있겠는가? 누군가 영원히 이를 갈면서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아는 채로 어떻게 계속 천국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피츠버그의 청중들에게 우분투에 기반한 투투 대주교의 신학이 이미 이런 난제를 예상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우리 중 누군가 고통받고 있는 한 누구도 천국에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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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여러 면에서 진정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자연 환경에도 큰 피해를 준다. 우리는 자신이 하루에 물을 얼마나 쓰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하루에 4리터가 안 되는 물을 마신다. 몸을 씻고 화장실을 사용한 물을 합쳐도 16리터에서 20리터 가량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을 추가하면 그 양은 엄청나게 증가한다.

육류나 우유를 얻기 위해 가축에게 먹이는 곡물을 포함하면 그 수치는 더욱 어마어마해진다. 소를 먹여 쇠고기 100그램을 얻기 위해 10,000리터가 넘는 물이 필요하고, 1리터의 유유를 얻기 위해서는 2,000리터에서 4,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당신이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은 더욱 안 좋다. 커피에 넣을 설탕 한 스푼 분량의 사탕수수를 기르는 데 50컵의 물이, 커피 자체를 기르는데 140리터의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후에 마시는 브랜디 한 잔을 만드는 데는 2000리터라는 놀라운 양의 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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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전통종교들에는 성(聖)과 속(俗), 영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 사이의 형식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적 삶과 종교적 표현은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세계와 매일의 삶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세계는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세계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영성은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물을 마시는 것, 요리하는 것, 농장이나 사무실 또는 학교에 가는 것,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는 것. 영성은 이러한 삶의 모든 측면들에 스며들어 있다. 종교적 의례들은 으레 탄생과 죽음 같은 특정한 삶의 중대사들을 관장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영적 세계관은 모든 인간사와 삶의 부분들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훨씬 더 광범위하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다른 세계 종교의 신도가 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신앙으로부터 같은 것을 기대한다. 언어, 사고방식, 사회적 관계, 마음가짐, 가치, 욕구, 공포를 포함하여 그들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영적 경험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은 세계를 의미로 가득 채우고 공포와 위기의 시기에도 자신들을 지탱해줄 영적 세계관을 열망한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기독교의 영성은 아프리카만을 위한 우주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전 세계로 하여금 영적인 의식의 회복에 동참하도록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에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피조물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통찰하도록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신과의 만남이 어떤 예외도 없이 삶의 모든 측면에서 발견되기를 열망한다. 종교를 삶의 한 부분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서양인들은 이러한 전체론적인 관점에 당황스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은 아프리카 기독교의 영성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아프리카적 세계관과 서구적 세계관의 대조적인 가치들은 서로의 관점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 서양인들은 인격의 형성에 있어서 공동체적 경험이 지닌 가치에 대해 배울 수 있고, 아프리카인들은 그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보다 심오한 자각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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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항상 기분 좋게 느껴지지만, 외부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은 늘 충격적이다. 시몬 베유는 오직 바깥에서 영혼을 관통하는 것만이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드러나게 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통을 통해 우리 감각을 뚫고 들어오는 것도 같은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입맛대로, 또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입맛대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무언가가 이를 뚫고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

베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움, 사랑, 괴로움과 같이 자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베유에게 개인적인 것은 본질적인 가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아에 감염이 되어 더는 보편성과 영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주관적 관점이 만들어낸 환상에 영향을 받고, 그러한 관점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서 생겨난다. 오로지 비개인적 지성, 이타적 감정,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는 고통만이 우리의 협소한 정체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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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 대한 공동체적 이해로부터 우리는 우분투가 기독교 영성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우분투는 삶이 선물이라는 계시를 현실로 만든다.

- 우분투는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자가 바로 신이라는 신비를 드러낸다.(로마서 8:26, 27)

- 우분투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잘 될 것이라는 공리를 실현한다.

- 우분투는 숨겨진 것이 결국에는 드러난다는 진실을, 신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 우분투는 삶의 모든 것이 신과의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 우분투는 ‘성서와 전통’이 신의 존재를 매개하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하지만 공동체적 본성 때문에 신은 어느 한 단어, 상, 생각, 경험으로 한정지어질 수 없다.

- 우분투는 신과의 관계가 변화하면 기도의 내용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의 현존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한다.

- 우분투는 신이 우리와 어떻게 상호관계를 맺고자 하는지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신의 벗이 될수 있다는 혁명적인 발상이기도 하다.

- 우분투는 어떤 형식의 영성이든 항상 관계성이 반영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 우분투는 기도하는 자가 조화로운 목소리와 같음을, 다른 목소리들과 어우러지지 않고는 들릴 수 없는 목소리와 같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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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4 14:48
    천국은 단순한 사후세계가 아니라 결국 관계의 산물이군요! 기독교의 교리를 이렇게 해석하니까 정말 풍성한 거 같아요. 내가 정말 많은 것에 기대어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 아름다운 문장,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