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팬데믹 시대에 읽는 이반 일리치] 마지막 시간 후기들~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1-30 17:07
조회
207
'팬데믹 시대에 읽는 이반 일리치' 세미나가 지난주 수요일 짧고 굴게 3회로 끝이 났습니다. 마지막 세미나를 마친 세미나원 분들의 후기가 궁금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순전히 제 게으름으로 업로드가 늦어졌습니다~). 저는 도구와 제도에 대한 일리치의 접근방식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일리치는 도구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도구 자체의 성격이라고 말합니다. 시장과 기업이 그 주도권을 갖고 있건,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건, 대량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오늘날의 산업구조는 우리를 상품과 서비스에 중독된 예속적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구에 한계를 부과하는 것,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 convivial한 균형을 부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유와 해방에 대해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죠.
어떻게 '즐거운 절제와 해방하는 금욕'을 단지 사적인 라이프스타일이나 개인의 도덕적/종교적 신념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사회의 비전이자 우리를 길들이는 전문가와 제도와 자본에 맞설 정치적 아젠다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일리치의 텍스트는 이런 고민을 촉발시키는 것 같습니다. 정치와 윤리, 저항과 영성, 비판과 자기배려, 도구의 사회적 배치와 개인의 욕망을 동시에 문제화하도록 하는 사유의 틀을 일리치가 제시하기 때문이겠지요.
일리치는 팬데믹의 시대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영감을 제공합니다. 백신과 의료자원을 더 많이 생산하고 더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능동적으로 겪어낼 수 있는 것일까요? 백신의 개발이 바이러스를 근절하지 못하고, WHO 같은 국제기구들이 의료자원의 평등한 배분을 이뤄내는데 끝내 애를 먹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를 제압되어야 할 일종의 '도발'로 여기는 우리의 감수성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희소한 자원을 놓고 경쟁하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는 전문가들에 의존하고, 제도의 명령에 순응하게 되는 게 아닐지. 생각이 많아지네요! 아무튼, 저는 이만 줄이고. 다른 선생님들의 후기들을 만나보시죠!


저에게 ‘절제의 사회’는 ‘의존의 사회’로 이해됐습니다.

이 구절때문인데요.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서로를 보살필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해진다는 통찰을 공유하는 것뿐이다’
저희 엄마는 안씨 마을에서 성장했는데요. 그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생활 속에서 지혜를 얻고 그 집단에서 고유의 문화가 형성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공동체가 점점 해체되면서 노인이나 이웃을 통해 해결했던 문제를 제도화에 맡기고 점점 그것에 의존하게 되잖아요.
결국 일리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의존하며 공생의 방식을 찾는 삶의 미덕을 통해 제도화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말 아닐까요.
일리치의 생각은 늘 본질을 집요하게 들여다봐서 후련한 기분이 들고 희망적이기도 하지만 실천에 앞서 막막한 느낌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세미나를 통해 아직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이 감상을 안고 제가 하는 활동과 엮어내는 것을 시도해보렵니다~
그동안 건화, 정아, 민호, 난희, 지영샘의 지혜를 들을 수 있어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자주 보면 좋겠네요, 또 봐요 : )
- 영은샘

 

지난 시간에 이어, 절제와 공생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며 한 샘이 ‘우리는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래. 그렇지’라고 별 생각 없이 바로 동의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 맞나 싶습니다. 저 자신에게 너는 정말 너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기냐고 물으면, ‘아닌데...넓고 깊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생각하는데...’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면, 대체로 더 편하고·더 좋고·더 최신의 도구나 기술이 무엇인지 생각하거나 그것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반대로 낡고·불편하고·더러운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앞으로도 서로 즐겁기 위한 절제나 공생적 도구, 사회체계를 기술적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다거나 도구의 성격이라는 등의 관점에서 서두르지 않고 곰곰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른 아침 샘들과 함께 일리치를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 지영샘

 

매주 수요일 아침 3회 세미나를 통해 만난 쌤들과 일리치, 돌아보니 금방 지나갔네요. 역시 함께, 주어진 시간에 약간의 과제를 부담하면서 하는 공부가 활력을 준다는 것을 또 느낍니다. 줌이라는 도구도 이렇게 활용하니 아주 생산적인 도구로 쓰여질 수 있군요.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번 세미나에서 새삼 느꼈던 것은 ‘아파르트헤이트’ 즉 분리라는 개념을 일리치가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비기너스 세미나에서 ‘그림자 노동’을 읽었을 때 일리치가 네이딘 고디머의 소설 ‘버거의 딸’을 소개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소설의 주인공은 어떤 ‘병’을 앓고 있는데, “자신이 누리는 건강하고 평범한 삶의 조건이 곧 타인의 고통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외면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하죠. 일리치는 이 병이 ‘감상성의 결핍’에서 온다면서 감상성이 결핍된 사람은 아파르트헤이트(분리)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 ‘감상성의 결핍’을 두고 우리가 마구 의견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감상성의 결핍이 좋은 거냐, 나쁜거냐..^^
일리치에게 ‘도구’란 상식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금방 알 수 있는 도구보다 훨씬 광범위한 차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됐습니다. 학교, 병원, 교통 수단, 심지어 온갖 제도들까지를 포함하는 차원이라는 것을요. 이런 도구들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고, 이미 이런 도구들로 형성된 ‘나’를 또 도구화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은 도구화된 나와 그 나를 벗어나려는 나와의 분리 속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감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제의 사회’ 중 쌤들이 발췌하신 부분들도 매우 인상 깊었고 제가 밑줄 친 부분과도 많이 겹쳤습니다. 그중 세미나에서 거론되지 않았던 부분을 옮겨볼까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늘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변화가 없는 사회라는 것을 사람들은 참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절제적 재구축이 추구하는 것은 강제적인 변화의 속도를 제한하자는 것이다. 무제한의 속도 변화가 생기면, 에 근거한 공동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다시 반복하여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동료들의 회고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법이다. 모든 환경에 대해 영향을 주는 변화에 속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 가속화되면, 그러한 판단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즉 법에 근거한 사회는 붕괴된다. 사회적 통제는 주민의 참가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게 되고, 전문가가 수행하는 기능으로 전락한다.” (절제의 사회151~152P)
이 부분에서 일리치는 ‘법’을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다시 반복하여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동료들의 회고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무시무시하고 난해한 ‘법’이 이렇게 일상적인 감각으로 간명하게 정의되다니! 맞다, 법은 원래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야,라는 깨우침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면서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문제를 두고 아스케시스, 대항품행을 논할 때, 그 윤리가 바로 일리치가 말하는 ‘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법이 작동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윤리적 주체를 생산해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뭔가, 일리치는 ‘속도’를 눈여겨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천천히’라는 말을 니체도 그렇게 좋아했구나 싶군요. 사랑하는 나의 사상가들은 모두 자기 말로 깊은 울림을 주는 진리를 전해주네요. 배움의 즐거움이 금욕의 즐거움과 하나되기를~~
- 난희샘

 

“그 어느 경우에나 상품이나 도구의 정기적 혁신은 새로운 것이라면 모두 더 좋다고 믿게 하는 신념을 조장한다. 이 신념은 현대 세계관의 핵심이 되었다. 사회가 이러한 망상에 의해 존속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시장화된 상품 각각이, 그것이 만족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욕구를 낳는다는 점이 망각된다.”(149쪽)
일리치가 주는 울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세미나 중에, 일리치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도구들을 분석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근본적일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아마도 일리치의 분석이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즉 우리의 감수성과 욕망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힘들과 조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마디로, 도구들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들과 뗄 수 없는 우리의 주체화 방식이 일리치에게 중요했던 것. 우리를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간으로 만드는 장치들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우리의 현재를 질문하는 일이 일리치의 작업이었던 거다.
일리치는 다소 강하게 말한다. 문제화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문제를 은폐하고 심화시킬 뿐이라고. 산업주의가 낳은 문제들을 ‘산업주의적 심성의 해결책’, 즉 ‘기술주의적 대응’(107쪽)으로 맞이한다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못하다는 거다. 가령 코로나를 백신이나 방역으로 이겨낸다는 생각, 탄소문제를 원자력으로 해결한다는 생각, 교육불평등을 더 공정한 경쟁으로 해결한다는 생각 등. 이 모든 것은 표면적인 자리바꿈에 불과하다. 진단의 실패로부터 나온 어처구니없는 돌팔이 처방에 불과하다. 진짜 문제는 보다 미세하고 비근한 곳, 우리의 감성, 상상력, 상식, 일상의 언어, ‘좋다’는 것에 대한 판단,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는 생각 전반에 깔려있고, 우리는 여기에서 한계를 물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응은 무능을 심화할 뿐이다.
“가령 환경위기라는 문제도 생산의 총산출이 감소하지 않는 한, 오염방지대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음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피상적인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대책은 폐기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고, 미래를 미루거나, 빈민에게 쏟아버리게 만드는 경향을 낳을 뿐이다.”(101쪽)
나의 관심사인 환경문제도 마찬가지다. 일리치는 비행기와 버스가 자원 고갈이나 오염 없이 달린다 해도, 그 비인간적인 속도가 인간 본래의 이동성을 퇴화시키고 시간 소비를 강요할 것이라고 말한다.(110쪽) 또한 아무리 공정과 복지가 제도적으로 개선되어도, 우리 안에 ‘더 나은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희소성을 향한 과열된 경쟁과 대다수의 결여는 심화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있던 것을 퇴물이자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경향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그것은 신상 아이폰이나 새 패션뿐만 아니라 병원이나 학교 등의 제도, 상품, 담론 전반에 해당한다. 우리는 우리를 관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만드는, 즉 전문가나 제도나 서비스의 개입 없이는 배움이나 건강이나 심지어 오락마저도 영위할 능력이 없게 만드는 힘들에 대해 따져 묻고 어떻게든 포착하고 나눠야 한다. 일리치는 그 작업을 ‘반관리연구’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과 도구의 관계를 여러 차원으로 분석하는 것이다.”(155쪽) 그리고 우리가 우리 손으로 설정한 한계를 부여하는 일이다.
일리치의 말대로 이런 연구는 때로는 심리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지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생각의 흐름에 다른 길을 낼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모임을 조직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이번 깜짝 세미나가 작지만 그런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요일 아침 일찍, 함께 읽은 책을 바탕으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새로 한 생각을 나누고, 일상을 돌아보는 일은, 일리치가 말한 의미에서의 ‘배운다’는 것의 한 모습이지 않을까? 소감을 나누면서 알았다. 이렇게 모여서 우리 자신의 절제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 우리가 더 기쁘고 능동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일리치는 정말로,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이야기하게 하는 사람이다. 후기가 좀 길어졌지만, 마지막으로 감동적인 한 구절을 나누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각자 생식, 소비, 낭비를 제한할 필요를 인정해야 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 일을 해준다든가, 치료자가 우리를 유식하거나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든가 하는 기대를 근본적으로 축소해야 한다.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서로를 보살필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해진다는 통찰을 공유하는 것뿐이다.”(106쪽)
- 민호

 

이번 주에 읽은 3, 4, 5장에서, 일리치는 과도한 풍요,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우리 삶의 균형을 파괴하고 우리를 무능하게 만들고 있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의 생산이 지배적이 되면 소비자에게 허용되는 선택이 제한됩니다. 이를테면 자동차가 교통을 독점하면 도보나 자전거에 의한 이동은 배제되고, 사람들은 걸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합니다. 장의사가 생겨나면서 시신을 다루고 매장하는 모든 과정을 그들이 통제하고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일리치는 “사람들은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그들의 집을 짓고, 사자를 묻는 능력을 타고난다”(113쪽)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파괴된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절제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배움은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며, 이를 위해 다시 제도나 도구에 의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고요.
일리치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진 않지만, 이러한 통찰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해결을 위한 정치적 절차와 법적 절차를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들이 함께 고민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한 고민 가운데 하나로 일리치가 제시한 ‘언어 사용’에 관해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일리치는 정치적 전복의 가장 중요한 요체로 ‘일상언어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꼽고 있는데요, 언어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을 세심하게 점검해보는 것에서 시작하고, 이는 곧 생각의 메커니즘을 되짚어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3주간 ‘짧고 굵게’ 일리치와 만났던 시간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네요. 책을 읽으며 갖게 되었던 여러 생각과 고민들을 나눌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건화샘의 말처럼 일리치의 글은 읽고 나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지네요. 일리치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기대해봅니다.
- 정아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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