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 mem!

[베짱이의 역습] 21세기 아담의 탄생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8-04-02 22:30
조회
113


21세기 아담의 탄생


권위를 혐오하면서 승인하는 나

나는 권위에 저항한다! 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 머릿속에서 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삐딱한 아웃사이더다. 나는 이러한 자기규정을 토대로, 거기에 부합하는 나 자신의 면모들만을 본다. 10대 시절 ‘진보 꼰대’ 선생들과 마찰했던 나,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윗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았던 나, 알바를 하면 늘 사장이나 점장에게 막대하기 힘든 불편한 존재가 되었던 나, 지시와 명령에 무의식적 차원의 거부감을 느끼는 나, 타인에게 함부로 힘을 행사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나. 나는 이런 조각들을 그러모아 ‘수직적 위계질서에 저항하고 자율과 수평적 관계를 선호하는 나’라는 이미지를 조립했다.

그런데 이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 조각들도 더러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조용하고 건실한 청년으로 알고 있다. 어디서든 ‘윗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눈에 특별히 거슬리는 존재였던 적도 없다. 군대에서도 선임들과 별 다른 트러블 한 번 일으킨 적이 없었으니. 명령을 받는 걸 싫어 하지만 그렇다고 능동적으로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살겠어!’라고 외치며 학교나 집, 직장으로부터 뛰쳐나오는 타입은 결코 아니다. 난 늘 권위의 ‘부당함’에 대해 불평해왔지만, 사실은 그것과 너무나도 매끄럽게 공존하고 있었는지도.

아무렴 어떠랴, 나는 고결한 아웃사이더를 꿈꾼다. 어떤 권위에도 무릎 꿇지 않을 거다! 그런데 요즘 들어,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져버린 나의 반응양식이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말이 되었든 ‘명령’이라는 형태로 주어지면 거부감부터 느끼고, ‘의무’라 생각되면 금세 의욕을 상실해버리는 나. 한마디로 나는 ‘강제’에 너무나 취약하다. 쓰고 싶었던 글도 마감이 정해지고 나면 버거운 ‘과제’가 되어버린다.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 어떻게든 미루고만 싶어진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꼭 권위와 위계질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관심 역시 때때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명령이나 규칙보다도 훨씬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러한 호의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때도 종종 있다. 나를 향한 호의와 관심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아니 감당하지 않으려드는 나. 이런 나의 모습을 긍정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어디서 뭘 하든 다종다양한 힘들이 내 삶에 작동할 텐데,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나는 언제까지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나의 저항은 어째서 점점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정말 권위에 ‘저항’하고 있었나? 어쩌면, 권위를 노려보면서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나, 또 다른 아담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은 단지 이러할 뿐이다. 즉, 신이 우리에게 자연적 지성을 통해 독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계시해주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담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계시한 것뿐이다.”(스피노자, 19번째 편지)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담이 자신의 자유를 상실한 것은 그가 신의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금지’로밖에는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선악과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인간의 신체와 결합할 때 인간의 신체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뿐이다. 신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유용한 앎을 계시했을 뿐인데, 아담은 그것을 복종이나 위반을 내포한 도덕적 명령으로 ‘해석’한 것이다. 아담과 같은 무지한 해석자는 모든 것들을 도덕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무지야말로 이들이 받고 있는 벌이며 부자유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해석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나는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도 금지는 금지 아닌가? 신이 그렇게 말하는데, 벌거벗은 나약한 인간 아담에게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었을까? 아담의 사유를 불가능하게 한 것은 ‘신의 목소리’가 지닌 위압적인 힘이 아니었을까? 명령과 금지, 억압,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 이런 것들은 우리 주변에 실재하지 않나? 분명히 지금 여기에는 ‘쓸모’를 가질 것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고, 우리에게 힘을 행사하는 사회적 코드들이 있고, 소비와 결부된 환상을 생산하고 주입하는 자본이 있다.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를 금지로 받아들인 아담을 탓할 수 있을까? 신의 계시를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공허한 긍정론과 어떻게 다른 거지? 정도가 내가 느낀 반발심이다.

분명 우리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규정짓고 제약하는 힘들은 실재한다. 나는 항상 이러한 힘들이 ‘실재한다’는 데에서 멈췄다. 나의 경우 내게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는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자율을 중시하는 대안학교를 다니며 상대적으로 구속력이 덜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자유로웠느냐고 묻는다면 ……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대안학교에서 마주한 것은 결국 여기에도 권위와 강제는 ‘실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들을 내걸어봐야 학교인 한 구속과 억압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이 만큼이나 자유롭구나’가 아니라 ‘결국 여기도 다르지 않구나’를 느꼈다. ‘구속’과 ‘권력’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옥죄었다. 여기가 내 생각이 멈추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실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과 거부를 통해서 밖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맞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권력이 실재한다’는 것은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권력은 언제나 매우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나를 가로지르는, ‘나’로 규정되기 이전의 힘들의 투쟁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어떤 실체로서의 권력도, 그것과 무관한 자리에 있는 나도 없다. 내게 작용하는 힘들 이전의 나는 없고, 내 해석과 무관한 힘(권력)도 없다. 따라서 유효한 질문은, ‘거기에 권력이 존재하는가’나 ‘그것은 정당한 권력인가’가 아니라, ‘권력은 지금 나를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는가’, ‘나는 권력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이다. 스피노자는 ‘그가 할 수 있었던 것’과의 관계에서 아담을 비난하거나, 그가 신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아담의 해석이 얼마나 무력하고 궁핍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아담은, (아담도 아닌) 나는 권력을 ‘주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위반’과 ‘거부’ 외에 어떤 다른 저항의 가능성도 차단해버린다. 다른 해석과 다른 관계 맺기의 시도가 불가능해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권위와 의무, 강제가 싫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안학교라는 공간이 지닌 가능성들을 활용하지도, ‘학교’라는 틀 자체를 떠나보는 실험을 하지도, 나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부와 부정 외에는 할 게 없었다. 그러나 거부하는 동안에도 나는 이미 그러한 힘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무력한 방식으로.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뭐든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라,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다’ 따위가 아니라, ‘신조차도 너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게 아니었을까. 사실 권위에 대한 나의 반감과 의무에 대한 거부는 저항이라기보다는 회피에 가까웠다. ‘나는 그런 걸 원한 적 없다’고 변명하면서 내가 마주친 힘들을 회피했던 것이다.

클리셰가 된 나의 무기력

우리는 거부에 능하다. 좋아하는 건 애매해도 싫어하는 게 뭔지는 확실하다. 명령하고 강요하는 꼰대들,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무의미한 노동,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공허하고 기만적인 긍정론, 너무나 고된 가장 보통의 삶 ……. 우리는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 혹은 거부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의 거부와 부정은 유쾌하지가 않다. 우리의 싸움은 목숨을 건 전면전보다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적을 노려보는 냉전에 가깝다. 싫은 건 분명한데, 다른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마땅히 답할 말이 없다. 사실 우리는 싸우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쓸모도 갖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쓸모에 대한 저항이 아니고, 아무생각 없이 놀러 다니는 것은 노동에 대한 저항이 아니다. 그런 식의 반응적 행위양식은 어떤 새로운 해석도 구성해내지 못한다. 그저 거부하고 외면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존 및 재생산하고 있을 뿐. 우리의 존재는 투쟁과 저항을 통해 고양되는 대신, 거부와 부정을 통해 쪼그라든다. 우리가 집요하게 다른 힘들을 쳐내는 동안 새롭게 구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와 내 또래들을 가로지르는 묘한 무기력함. 또 이 지긋지긋한 무기력감 얘기다. 나는 그저 내가 별로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호기심 없는 둔감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또래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억압도 결여도 없이 자라다보니 매사에 절박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나와 우리의 무기력증은 사실 낯선 힘들에 자신을 내주지 않으려는, 자기보존에 대한 병적인 집착의 결과물인 것은 아닐까. 지금 여기의 우연한 마주침들 속에서 자유를 구성하기보다는, 반쯤 자유로운 이전의 엉거주춤한 상태에 계속 머물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 아닐까. 자유와 강제를 각각 실체화시키고, 서로에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늘 반쯤밖에 긍정하지 못하고, 반쯤밖에 자유로울 수 없다. 지겹다.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럴듯한 말들로 삶을 적당히 긍정하면서 반쯤이라도 정직하기 위해 스스로를 비웃는, 전적으로 공허한 삶이.

대체 어떻게 나의 이름으로 말하고 나의 시도를 통해 삶을 긍정하며 살 수 있는 걸까? 안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자유’인가 ‘편안한 삶’인가, 라는 식의 선택지는 가짜라는 걸. 그런 방식으로밖에 문제를 구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확실한 건, 이제 내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글 : 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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