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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문 도쿄 답사 : 2.11 조시가야 묘원과 민예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7-02-23 21:07
조회
193

둘째날 : 조시가야 묘원과 민예관 


1. 숙소

사실 출발하기 전 규창이와 나는 숙소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숙소를 예약할 때 우리는 커다란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리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규창이와 나는 거실에서 적당히 이불 깔고 자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에게 주어진 거실 따위는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빌린 숙소는 깔끔하지만 좁은, 각각 격리된 세 개의 방이었다. 방은 세 개고 사람은 11명, 그리고 그 중에서 남자는 규창이와 나 2명. 아무리 봐도 불길한 조건이었다. 우리 둘만 사라져주면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캡슐 호텔로 가라’거나, ‘밤 동안 어디든 가서 놀다 오라’는 등의 농담(반 진담 반?)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를 가엾게 여긴 채운쌤이 같은 방을 써주시기로 했고, 덕분에 우리는 도쿄 밤거리를 떠도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채운쌤과 ‘산마을 놈들’의 3박이 시작되는데….

사실 모두의 우려와 달리(?) 규창이와 나는 아주 편안한 밤들을 보냈다. 매일 야식을 먹고, 음악도 듣고, 책도 조금 읽고! 화장실을 나올 때 머리카락만 정리하면 별 문제 없었다. 사실 고생은 채운쌤이 다 하셨다. 규창이는 이를 갈고, 나는 코를 골고… 다음번에는 정말로 캡슐호텔을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은 정말 좁았지만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두서없이 늘어놓자면 커피포트, 인덕션, 전자레인지 냉장고, 드라이기, 비데, TV, 심지어 먼지제거용 테이프까지! 좁은 공간을 실속 있게 사용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특기인 것 같다. 좁은 공간에 빈틈없이 주차해놓은 차들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본받아(?) 좁은 숙소에서 많은 일들을 했다. 탁상과 소파를 치우고 매트리스를 깔면 잠자리가 되고, 한구석에 몰아놓은 바로 그 탁상과 소파는 아침마다 식탁이 되었다. 심지어 둘째날 저녁에는 11명이 한 방에 둘러앉아서 에세이 발표까지 했다(!) 아무튼 별로 정들만한 숙소는 아니었지만 좁은 대로 지낼만했다.


2. 길 찾기

아마 혜원누나가 쓴 여행 첫날의 후기를 읽었다면 “언제쯤 지도에서 가라는 길을 따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혜원누나의 가벼운 탄식(?)과 “지도에서 가라는 길을 따라가겠다는 그 생각을” 버리라는 채운쌤의 일갈을 보았을 것이다. 분명 길 찾기는 여행의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여행과 같은, 가야할 곳이 정해져 있는 답사 형식의 여행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날그날의 목적지가 빼곡히 정해져 있는 마당에 마냥 헤매는 것을 긍정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러나 물론 길 찾기에만 얽매인다면 그것 또한 여행을 망쳐버리는 일일 것이다. 길 찾기의 어려움은 바로 이러한 애매함에 있다.

둘째날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많은 15.9km(출처-내 아이폰)를 걸은 날인만큼 길 찾기가 특히 더 문제가 되었다.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너무나 완벽을 기하면 오히려 여행이 삭막해져버리는, 길 찾기의 아이러니가 우리를 (사실은 주로 혜원누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우리의 길 찾기는 숙소를 나서는 순간 시작되었다. 우리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인 료고쿠역은 오에도 선과 소부 본선이 지나가는 역인데, 혜원누나도 언급했지만, 서울 지하철과는 달리 도쿄의 지하철은 환승역의 서로 다른 두 선이 지하에서 연결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오에도선과 소부 본선은 서로 떨어져 있는 각각의 료고쿠역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도쿄에선 ‘료고쿠역에서 만나자’라고만 약속을 하면 낭패 볼 수 있다.)

우리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헤맸다. 첫 번째 목적지인 소세키 산방은 와세다역 근처에 있는데, 료고쿠에서 와세다로 가기 위해서는 오에도선을 타야만 한다. 그런데 이를 헷갈린 우리는 소부 본선으로 갔던 것. 다행히 와세다에서 소세키 산방까지 가는 길은 작년에 고생 끝에 몸에 새겨놓았던지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는데, 날씨도 맑고 맛난 편의점 도시락으로 배도 충분히 채운 우리는 소세키의 묘지가 있는 조시가야 묘원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작년처럼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없었지만, 이때부터 우리는 미묘하게 계속 길을 잃고 다시 찾기를 반복했다. 분명 이날 걸은 15km 중 많은 부분이 이 구간에 속할 것이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도쿄를 헤맨 뒤 내가 얻은 단순한 해답은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것이다. 구글 지도는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을 알려주지만, 결코 우리를 안심하게 두지는 않는다. 지도가 알려준 정확한 길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도를 다시보고 ‘현위치’(채운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이 기능을 처음으로 ‘발견’하셨다는 후문)를 끝도 없이 체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구글신이 알려주신 정확한 길을 따라가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다. 그런데 이에 비해 부정확하고, 때로는 건성건성인 현지인의 길 안내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현지인이 못 알아듣는 말로 설명하며 어떤 방향을 가리킨 이상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믿어버리면 된다. 믿어버리고서 다시 길을 물어봐야 할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유유자적 걸어가면 된다. 혹시 걷다보니 영 딴 곳에 와있더라도 길을 알려준 그 사람을 욕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는 다음번 안내자가 또 적당한 방향을 가리켜줄 것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길을 묻는 일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나는 몹시 짧은 일본어로 무작정 길을 묻고는 (당연히 일본어로 되돌아오는) 대답을 알아듣지 못해서 애를 먹고, 또 길을 알려준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ㅠㅠ). 길을 알려주는 말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길을 묻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조시가야 묘원을 찾아갈 때가 특히 그랬다. 조시가야 역과 조시가야 묘원은 꽤 거리가 있고, 조시가야 묘원이 주택가 사이에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시가야’나 ‘조시가야 역’이 아니라 ‘조시가야 묘원’의 정확한 위치를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도 ‘묘원’ 혹은 ‘묘지’가 일본어로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몰랐던 것. cemetery니, tomb이니 안 되는 영어를 동원해봐도, 손으로 동그랗게 묘지를 그려봐도, 누구도 알아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은 핸드폰 메모장에 묘지(墓地)를 한자로 그려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 방법은 통했고 우리는 묘지가 일본어로 ‘보치(ぼち)’라고 발음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지인에게 길 묻기’는 일본을 여행할 때 특별히 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혹시 이 사람들의 DNA에는 친절함이 녹아 있는 게 아닐까? 길을 물어보면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기본이고, 길이 복잡하거나 우리가 영 못 알아먹는 것 같으면 하던 일을 잠시 미루고 목적지까지 우리를 데려다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날만 해도 ‘장금이’를 좋아한다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조시가야 묘원 앞까지 데려다주셨고, 메지로역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덩치 큰 아저씨가 메지로역까지 데려다주셨다. 얏빠리 신세츠나 니혼진데스네!

3. 조시가야 묘원과 민예관(+학습원과 도쿄대)

소세키 산방에 대해서는 이번에 그곳을 처음 방문한 이응누나가 보다 신선하게 이야기해주리라 믿고, 나는 다음 행선지였던 조시가야 묘원과 민예관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조시가야 묘원에는 소세키의 묘가 있다. 조시가야 묘원은 『마음』에 나오는 선생님의 친구 K가 묻힌 장소이기도 하다. 우선 놀란 것은 묘지가 민가에 몹시 인접해있다는 점이었다. 앞에서 말했던 장금이를 좋아하는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작은 언덕을 넘자 주택과 빌라로 둘러싸인 조시가야 묘원이 등장했다. 우리는 먼저 소세키의 묘를 찾았다. 여전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으로 소세키의 묘에는 시들지 않은 꽃들과 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도착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소세키의 묘를 측량하고 사진 찍는 아저씨가 있었다. 우리는 소세키가 생전에 좋아했다고 하는 백합을 바쳤고, 영감을 구걸하며 참배했고, 누군가는 그 옆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했다(?) 날씨가 너무 맑아서 그런지 묘지에 왔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조시가야 묘원을 나선 우리는 소세키가 1914년 <나의 개인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던 학습원(의 정문)을 구경했다. 아마도 학습원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고등학생 무리가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기에 우리도 괜히 한번 따라해 보았다(그러다 엄한 경비 아저씨에게 쫓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메지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부야로 이동했다. 말로만 듣던 시부야(!) 채운쌤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양아치들은 거기 다 모여 있었다. 교복 입고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사람들(코스프레인걸까?)과 신체의 온갖 부위에 구멍을 뚫은 사람들. 도쿄에 상경한 산시로의 기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아무튼 압도당했다.



그런데 시부야를 거쳐서 우리가 향한 곳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야나기 무네요시의민예관(民藝館)이었다. 민예관은 말 그대로 전문 예술인이 아닌 민중들이 만들고 사용하던 일상적인 공예품들을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해서 전시한 작은 박물관으로, 1934년에 창립되었다. 원래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에서 수집한 공예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곧 있을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회수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기념품 상점에 있는 엽서로만 만나볼 수 있었다(ㅠㅠ). 그렇지만 민예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졸한’ 전시품들은 작은 저택처럼 보이는 건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박물관 자체가 전시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민예관에는 셋째날에 갔던 엄청난 스케일의 국립박물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었다. 민중들이 아무런 자각 없이 사용하던 공예품을 수집하고 전시함으로써 미학적으로 의미화 했던 야나기 무네요시 본인의 서재가 다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보다도 나는 민예관의 화장실에 감동했다. 너무 깔끔하고 편안했던 나머지 모두를 기다리게 하고 말았다;;)


5시에 문을 닫는 민예관을 나와서 우리는 도쿄대로 향했다. 작년에 이어 밤에 방문한 도쿄대는 여전히 멋졌다! 우리는 산시로 연못을 밝을 때 보고 싶다며 안타까워했지만, 마지막 날 다시 방문한 산시로 연못은 우리의 환상을 간단히 부숴버렸다(자세한 건 마지막 날 후기에서 확인하시길). 일본판 김밥천국과도 같았던 ‘도쿄대 앞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작성 : 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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