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세미나 후기 : "수많은 관계를 생성할 수 있는 먹기의 윤리"
지난 5월 21, 22일 클로즈업 : "육식의 시대, 먹기의 윤리를 생각하다"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기도 했고,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도 드문드문 올라오는 후기들과 연구실에서 오가는 풍문(?)을 통해 소식을 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불교, 소생, 적천수 세미나에서 활약 중이신 호정샘과 길드다 강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신 안혜진님께서 두번째 날 후기를 올려주셨죠(아직 확인하지 못하신 분들은 '깜짝세미나' 페이지에서 확인해주세요~!). 이번에 올리는 후기는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신 조한결님이 써 주셨습니다. 단순히 세미나에 대한 인상을 넘어서, 먹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는 학인으로서 본인의 고민의 지점들과 먹기의 윤리에 대한 통찰이 담뿍 담긴 후기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결님의 후기를 읽으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공부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후기를 읽고 저와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댓글도 꼭 남겨주세요~~ :)
수많은 관계를 생성할 수 있는 먹기의 윤리
조 한 결
0. 나에게 있어 육식이란
나는 한때 고기를 자주 먹었다. 이유는 허약한(혹은, 허약하다고 생각되는) 신체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고기를 포함한 단백질 음식을 잘 챙겨먹고, 체력을 기를 수 있는 운동을 꾸준히, 열심히 했다. 사실, 세미나 전에도 육식의 문제점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면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다른 존재보다 내가, 내 건강이 더 중요했다. 때문에 처음 남산 강학원에서 공부하며 생활할 때, 식단을 바꾸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내 몸이 약해질 것만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부하며 내가 왜 고기와 건강한 신체를 욕망하는지, 그 건강한 신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가며 나의 이기심에 새삼 놀랐다. 내가 원하는데로 마음대로 활동해도 지치지 않는 신체를 원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성공과 부를 얻고 싶었다. 또 육체적으로 강해져 물리적인 힘에서 밀리거나 기죽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기왕이면 몸매도 좋아 외모에 대한 자신감까지 줄 수 있으면 더욱 좋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한마디로 권력욕, 물욕, 성욕을 위해 건강한 신체가 필요했고, 고기가 필요했다. 여기까지 알아버리니 더 이상 외면하려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덕분에 고기를 먹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앞서 언급한 욕망 때문에, 혹은 그저 맛 때문에 종종 고기가 먹고 싶었고 그래서 먹었다. '어쩌다 한번은 괜찮아~'라면서. 그렇게 나와 잘 타협을 보며 지내던 중,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게 되었다. 내가 먹은 계란, 닭, 돼지가 어떤 삶을 살다가 내 앞에 왔는지 알게 되니, 우선 즉각적인 신체 반응으로는, 속이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다. 그리고 내가 도대체 무얼 먹은 것인가 자책하듯 묻게 되고, 뒤이어 내가 그동안 먹어온 동물들의 원한 섞인 원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혼자 책을 읽기만 했다면 이렇게 다시 고기 안 먹겠다고 몇 일간 다짐했다가, 시간이 지나 그때의 감각은 무뎌지고 다시 슬슬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후회하고 안 먹기를 반복했겠지. 규문에서 열린 '클로즈업 세미나'는 그런 '다짐-후회'의 윤회의 장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단지 식용 동물들에 대한 연민으로 먹고 안 먹고 할 문제를 넘어서, '먹기의 윤리'에 대해, 더 나아가 '세상과 관계 맺기'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문제의 장을 확장, 전환시켜버렸다.
1.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미나를 통해, 먹기의 윤리를 말하기 앞서, '먹는다'는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에게 먹기란, '내 몸에 유익하거나 내 미각 쾌락을 만족시켜주는 음식을 입에 넣어 소화시키는 행위'였다. 지극히 나 하나에만 초점이 맞춰진 개념이었다. 그런데 내가 먹는 '그것'은 어떻게 지금 내 앞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가령, 치킨을 먹는다고 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치킨이라는 '음식'이 아니었다. 닭라는 생명체, 즉 인간과 더불어 사는 자연의 구성원이었다. 닭이 부모 닭으로부터 나와서 자라나고, 도축되어 유통된 뒤, 요리되어 지금 내 앞에 '음식'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먹는다'는 것은 결코 나 하나에만 국한된 행위일 수 없다. 일차적으론 먹는 나와 먹히는 닭과의 관계를 낳는 행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와 맺어진 수많은 다른 관계 -그 닭을 기른 농장의 노동자와 농장주, 그 농장의 온갖 시설을 만든 설계자, 닭의 도축과 유통에 참여한 사람, 치킨 업계와, 내가 주문한 그 치킨 집 사장님과 종업원과의 관계- 또한 낳는다. 때문에 '먹기'는 곧 '관계 맺기'인 셈이다. '먹는다'는 행위는 나와 세상이 관계를 맺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인 것이다.
2. 업(業)을 짓는 정치적 행위
따라서 먹는다는 행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정치적 행위이다. 그 음식에 수많은 산업이 관련되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가령, 나를 포함한 소비자가 치킨을 더 싼 값에 먹고 싶고, 그래서 싼 치킨을 구매한다면, 치킨 업계는 치킨 가격을 내리기 위해 더 싼 육계를 원할 것이다. 그럼 육계업자는 육계의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한정된 공간에 더 많은 닭을 구겨 넣을 것이고, 더 많은 성장 촉진제를 먹여 성장 기간을 줄이려 할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닭들이 좁은 사육공간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 또 너무 빠른 근육 성장 속도를 내장기관이 따라가지 못해 병에 걸려서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또한 닭의 단가를 줄이기 위해 육계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봉급 또한 줄어들 것이다. 나는 단지 좀 더 저렴한 치킨을 먹고 싶었을 뿐인데, 그 결과는 닭과 육계 노동자의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 그들의 삶만 악화되는 것일까?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닭은 내가 먹게 되고, 더 적은 수입으로 어려운 삶을 살게 된 노동자는 내가 사는 사회의 구성원이다. 결국, 내가 한 선택의 영향은 나에게 돌아온다. 나에게 돌아와 쌓이는 나의 행위, 이렇듯 먹기는 내가 짓는 업(業)인 것이다.
3. 음식의 대상화가 낳은 감각적 중독
오늘날 음식은 우리에게 어떻게 감각되고 있을까? 음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맛'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영양'이나 '가격'이 떠오를 것이다. 요컨대 현대인에게 음식은 미각적 쾌락과 영양분을 제공하는 '상품'인 것이다. 먹기는 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맛과 영양을 구매하는 '소비'이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음식은 처음부터 음식이고 상품인 것은 아니었다. 자연에서 호흡하며 삶의 영위하던 나와 같은 생명체였다. 그런데 오늘날 식문화는 음식의 생산과정과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때문에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음식이 내 앞에 온 것인지 모르게 되고, 우리는 그것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얼마짜리인 상품으로서 음식'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대상화'해 인식하게 된다. 이런 배치 속에서 음식과 내가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아마도 '상품-소비자'가 전부이지 않을까.
이렇게 일면적 관계로 음식을 인식하고 소비하면, 이 음식도, 나도 자연으로부터 왔다는 자연과의 관계성을 놓치게 된다. 즉,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내 존재적 범위를 축소시키고, 스스로를 존재적으로 왜소하게 만들며 자연과 고립된 존재가 된다. 자연이라는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소외됨을 느끼는 고립감인 것이다. 이렇게 고립감을 느끼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혹은 잊기위해 쾌락을 찾게 된다. 쾌락은 그 속성상 외부와의 관계성을 단절시키고 존재를 고립되게 한다. 그럼 또다시 이를 잊고 벗어나고자 쾌락을 찾게 된다. 때문에 일면적 관계는 감각적 쾌락의 중독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실제로 먹방을 찍고 이를 보는 사람들의 심리를 관찰해보면, 사람들은 음식과 먹는 행위를 미각 쾌락을 자극하는 마약처럼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나와 음식의 일면적 관계로부터 비롯된 '음식=맛'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먹기'는 음식이 주는 예측 가능한 자극에 자신을 내맡기는 중독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4. '미각 쾌락을 주는 상품-소비자' 관계를 넘어서
맛을 탐닉하는 중독 상태와 맛의 자극에 의존하는 예속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음식=맛', '상품-소비자'라는 일면적인 관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을 넘어선 관계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과거 수렵민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곰을 죽입니다. 현실의 눈에는 인간이 곰을 죽이는 광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화적 사고의 눈으로 보면, 곰이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벗고 순수한 영혼으로 돌아가는 중대한 전환의 순간으로 이해됩니다. 그들 앞에서 남겨진 곰의 몸은 인간에 대한 소중한 선물인 셈이므로 정성스럽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해체를 할 때 잘못해서 뼈나 힘줄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소중한 것을 받으면 그렇게 할 겁니다. 교환을 하거나 직접 구입한 것과는 달리 선물에는 상대방의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경우보다 훨씬 더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 『곰에서 왕으로』 / 나카자와 신이치 씀,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112p)
수렵민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자신이 먹는 것과 자기 자신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취하고 또 내줘야 하는 자연의 조건에 대한 이해 속에서 그들은 음식을 다른 존재가 준 선물로 이해했다. 즉, 수렵민에게 '음식-나'의 관계는 '자연의 선물-수혜자이며 동시에 나 또한 그 자연의 일부'였고, 음식과 이와 같이 관계 맺을 때 맛을 중독적으로 탐닉하는 일은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감각적 쾌락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훨씬 다양하게 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렵민에게 식사 시간은 자연의 감사함과 위대함을 느끼는 시간이며, 자신 또한 이 자연의 일부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을 통해 충만감을 얻는 시간일 것이다. 이런 즐거움 앞에서 순간적인 맛의 쾌락은 정말 미미한 감각에 불과할 뿐이다.
5. 수많은 혀를 갖자!
이렇게 '미각 쾌락을 주는 상품-소비자'라는 관계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중독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맛의 감각적 쾌락 이외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게 된다. 더 많은 '음식-나'의 관계를 생성해낼수록, 미각 감각적 맛 이외의 새로운 차원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새로운 혀'를 갖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더 많은 혀를 갖게 될수록 중독과 예속을 부르는 오늘날의 자극적인 맛은, 맛에 대한 우리들의 새로운 취향들 앞에서 시시하고 밍밍하며 매력 없게 느껴질 것이다.
새로운 혀를 얻기 위해 우리는 똑똑해져야 한다. 우선, 음식에 대해서, 음식이 우리 앞으로 오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내고 -사실 이 점이 더 무서운데- 음식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식품업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았을 때, 나는 왜 음식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했으며, 음식과 일면적인 관계밖에 맺지 못한 체, 수동적인 소비자로밖에 행동할 수 없었는지 알게 된다. 그다음으로 현대 도시의 식문화 이외의 다양한 시대와 문화에서 영위해 온 지혜로운 식문화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인류에겐 앞서 살펴본 과거 수렵민, 인디언, 불교, 이슬람과 같은 식문화 스승들이 있다. 이들에게 음식이란 무엇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어떤 먹기 윤리를 세웠는지 알아간다면, 그래서 이들이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알아간다면, 이들의 지혜를 빌어 자신의 먹기 윤리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윤리에서 우러나오는 오묘한 맛을 즐길 수 있는 혀도 갖게 되지 않을까?
저도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고기에 대해서는 그저 권력욕, 물욕, 성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니 그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기꺼이 또는 열심히 무관심으로 대처해왔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혀를 갖자는 결론에서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한다고 써주신 것에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그 안다는 문제, 지금까지 알기를 거부해왔던 것을 안다는 문제는 어쩐지 혼자(혼자 돈을 벌고 혼자 월세를 내고 혼자 밥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서는 만만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고, 어렵지만 다짐들도 해보는 일들이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먹는 것에서의 책임감, 혹은 고귀함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먹는것을 정말 관념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이번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먹는 것에 대해 정말 무지했다는 것도 말이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