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글쓰기 숙제방

10.7 장자와 글쓰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07 12:47
조회
47
181007 장자와 글쓰기 공통과제 / 우언, 외물 / 혜원

 

외물과 언어

 

<장자>에는 주로 기대를 저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혹은 자신이 한지도 몰랐던 기대를 자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령 부모를 정성스럽게 봉양하는 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를 칭송하지만 장자가 보기에 이미 그는 부모와 세상의 사랑을 받는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마치 순임금에게 덕이 넘쳐나서 사람들이 그에게 모인 것이 아니라, 그가 ‘노린내 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행위에 대응하는 기대가 녹아있다. 그것은 개인이 ‘반드시 부모의 사랑을 받겠어’ 라고 생각하며 부모를 봉양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가로지르는 사회적 코드를 따라 생각하고 행위하니까 말이다.

외물 편은 그런 “외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고 시작한다. 외물에 기대를 거는 것은 마치 당장 배가 고픈데 훗날 돈을 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돈이나 명성 따위는 뒤로 미룰 수 있지만 굶주림은 뒤로 미룰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언젠가 빌릴 수 있는, 받을 수 있는 돈이나 명예를 기대하며 지금 당장의 고통을 참거나 자기 자신을 그런 고통에 내주지 않던가? 언어의 평면에서 보면 당장 다음에 빌릴 돈과 지금의 굶주림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실정이 아닌 언어상의 이야기고, 그 언어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언어라는 도구에 휩쓸려 실상을 곧 잊고는 한다. ‘언어는 도구’라고 할 때 그 도구는 단지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다. 사실 무슨 도구를 쓰느냐가 전부일 수도 있다. 비쩍 말라버려서 작위를 얻은 사람에 대한 말을 듣고 말라죽은 사람이 반은 되었다는 이야기는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말라죽은 사람들은 지금의 고통이 나중의 높은 지위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죽어갔다.

그리고 <시>와 <예>를 기준으로, 그러니까 철저히 사회적 기준에 맞게 살았던 유가의 말로는 후대에 칭송받는 게 아니라 도굴꾼의 천국이 되었다. 죽은 다음의 순장품을 캐며 경전의 시를 읊는 도굴꾼의 이야기를 유가가 보면 참 가슴 뜨끔할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건 단지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비쩍 말라죽는 사람들, 도굴꾼이야말로 유가와 문명의 말로이니 말이다.

장자는 도구를 쓰면 잊어버리라고 한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으면 올무는 잊어라. 이 이야기를 처음에 들었을 때는 도구에 연연하지 말고 목적에 충실하라(!) 정도로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장자가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도구가 목적인줄 알고 본말전도를 수시로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쓸모가 없어진 도구에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게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인간은 자꾸 자기가 허기졌다는 사실을 잊고, 그건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 결과 자신을 고통으로 내몬다.

그때 장자가 말하는 것은 ‘쓸모없음’의 지대다. 혜자가 말하는 쓸모없는 장자의 말은 사실 꼭 필요한 지대다. 발을 딛는 곳 외에 나머지가 모두 없어진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조급함에 떨면서 그 한 걸음이 내딛고 있는 게 마치 목적인양 거기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장자가 하는 “쓸모없는 말”은 그런 전도를 방지한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도구를 보라. 그래야 그것과 맺는 관계 역시 창조적으로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쓸모가 없는 지대는 쓸모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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