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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공통과제 (4부-1)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5-12-03 15:12
조회
431

불교n 2015.11.30 에티카 4부 (~정리31) 수영


정리21. 어떤 사람도 존재하고 행동하며 생활하는 것,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욕구하지 않고서는 행복하게 존재하고 선량하게 행동하며, 또한 선량하게 생활하기를 욕구할 수 없다.


정리21의 증명에 따르면 ‘행복하게 살고 선량하게 행동하는 등에 관한 욕망은 (감정의 정의1에 의해) 인간의 본질 자체, 즉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노력(코나투스)’다.(252) 앞에서 우리는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 즉 “각 사물이 홀로 또는 다른 것들과 함께 활동하는, 또는 활동하려고 애쓰는 능력이나 노력”이 사물의 주어진 혹은 현실적인 본질임을 배웠다. 그리고 이런 현실적 본질에 따라 존재는 행복하게 살고 선량하게 행동하고자 한다는 것이 위의 정리 등에서 말하는 내용인 것 같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에게 ‘행복하게 존재하고 선량하게 행동’하는 것은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따질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에게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이고 존재에게 가장 이로우며 또 유덕하다. 스피노자에게 덕은, 그리고 이성은, 존재가 그 본질에 따라(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 이상이 아니다. 거꾸로 우리는 특수한 목표나 소망을 위하여, 그 수단으로서 덕이나 이성을 요청하지 않는다. 사물이 각자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이상 유덕하지 않을 수 없고, 이성의 지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정리24. 참으로 유덕하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분명 본성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존재가 살아가지 않음을 욕망(이것도 욕망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 이를 이해하는 것이 4장에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스피노자는 ‘자살하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행위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기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그렇게 행위한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를 태만히 한 것이며, 무엇보다 ‘자기 본성과 반대되는 외적 원인들에 완전히 정복된 사람들’이다. ‘무력한 정신’이라는 표현 역시 같이 등장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존재인 것일까. 이런 저런 말을 하고, 행위하는 것을 추동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외적 원인인 것인가. ‘무력한 정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외적원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작용한다’는 것과 ‘작용을 받는다’는 것의 개념에 관해 배웠다. 우리 자신이 “단지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 내부에서 발생하거나 우리의 본성에서 생길 때”, 달리 말하면 외적 원인의 영향에 따른 사건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는 ‘작용을 받는다’고 말한다.(160쪽) 허나 스피노자가 주시하고 있는 점은 인간,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전적으로 ‘작용을 한다’는 상태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 사물, 그것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과 무관한 자리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인간이 오로지 자기의 본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변화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항상 수동적 감정(수동)에 예속”한다.(정리4, 정리4 계) 더군다나 수동적 감정의 힘과 성장, 지속은 우리의 코나투스보다는 외적 원인의 힘에 한정된다고도 한다.(정리5) 이와 관련된 내용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배운 바 있다. 인간이 갖는 관념은 언제나 신체 변용의 관념. 그러니까 외부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에 따라 우리는 자기에 대해서나 이 세계에 대해서 단편적이고 혼란한 관념들을 형성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자기 본성에 따라 살지 못하고 ‘외적 원인들’에 완전히 정복되었다는 것은 저 단편적 인식들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연적으로 형성되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강력하게 존재를 좌우하는지 등을 살펴보기도 했다.(각각의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며, 반대되는 감정에 의하여 분열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 또 어떠한 감정에도 빠져있지 않은 사람은 사소한 자극에 의해서도 이리저리 쏠리기 때문이다.(165))


감정 역시 표상의 문제이고, 어떤 단편적이고 혼란한 표상이 우리들을 움직이고 있을 때, 이를 멈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더 강력한 표상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든, 상황이 바뀌든, 하여 우리는 다른 표상들에 좌우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같다.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변한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황은 단지 다른 표상이 우리의 마음에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변화 등을 실체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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