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숙제방

[불교n] 0713 에티카

불교n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07-13 15:37
조회
519

불교n_에티카 2부 / 2015.07.13. 수경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고 개념을 형성하는 방법을 스피노자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그 중 감각과 기호를 통해 개념을 형성하는 1종 인식은 부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며, 다른 두 종의 인식은 적합한 관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2종 인식과 3종 인식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다만 스피노자가 2종 인식을 이성으로, 3종 인식을 직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어서, 어쩌면 수행자가 알음알이를 방편삼아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용되는 것이 2종 인식이고, 이에 깨달음을 얻은 뒤 세계를 보는 방식이 곧 3종 인식인가 싶기는 하다. 만약 그게 맞다면 2종 인식이란 곧 직관적 앎을 터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이 말도 맞다면 3종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종 인식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을 테고.

  2부 정리 44번부터 가만 읽어 내려가려니, 일단 스스로를 이성적 인간이라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한다고 믿는 우리 모두가 대개 1종 인식만을 발휘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겠다. 만약 스피노자가, 자기 신체(자신이 기억하는 바 그리고 사회적 통념에 따른 선판단 따위 포함)에 의해 파악한 일면만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1종 인식이라 부른 것이라면 말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곧 사물의 인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표현인데, 스피노자는 이를 두고 ‘사물을 우연적인 것으로 고찰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리고 이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2종 인식, 곧 이성이 설명되는데,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사물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지각하는 것이라 정의된다.

  정리 44. 사물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에 속한다.
  …계 1: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이러하다. 즉 우리가 사물을, 과거 및 미래에 관해서, 우연으로 고찰하는 것은 오로지 표상력에만 의존한다.
  …계 2: 사물을 어떤 영원의 상 아래에 지각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에 속한다.

   정리 44번의 증명에 따르면 이성의 본성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1부 정리 29번에 따르면 그것이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한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바로 그 자리에 그와 같이 존재함, 을 의미한단다. 신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의에 따라 존재하는 것도, 우연히 불쑥 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 내의 모든 사물은 특정한 질서에 따라, 자연 안의 무수한 연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운동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의 존재는 필연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필연성이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를 이루는 포괄적인 법칙 안에서 이 모든 것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임을 뜻한다. 인간 눈으로는 그럴 법하지 않은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무한한 신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법칙과 방식에 따라 거기 마땅히 존재한다는 거다. 이처럼 사물의 인과를 이해하는 것, 그것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 곧 2종 인식이다. 거꾸로 인과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그것을 우연적인 것으로, 예컨대 이유 없이 내게 일어난 불운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 그것은 1종 인식의 결과다. 가령 특정한 사건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인과를 충분히 고찰하고 이해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는 그 원인을 살피기 전에 고통스럽다는 감각 그 자체에 휩쓸러 마냥 괴롭다고 외치거나 혹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아 잘못을 전가할 텐데, 이럴 때 그 고통은 끝내 해소될 기회를 잃고 만다.

  이처럼 1종 인식은 편협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므로 이를 통해서는 적합한 관념에 이를 수 없다.(정리 41 “오류의 유일한 원인”) 반대로, 적합한 관념에 이르는 위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지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큰 연관관계 속에서 사물을 봄으로써만 우리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인식 구분에 따르면 단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 외의 모든 것을 다 오류로 치부하기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가 그 하나에 붙들리지 않고서 더 다양하게 지각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보다 적합해진다. 적합한 관념이란 차라리 보다 풍부한 지각들, 다양한 인식들의 연합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여기에 덧붙여 놓은 설명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사물을 고찰하는 것이 곧 사물의 필연성을 고찰하는 것이라는 말이 그것. 말하자면 이는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이라는 말일까? “이성의 기초는 개념들이며 (…) 이 개념들은 시간과는 전혀 관계 없이 어떤 영원의 상 아래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장을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스피노자가 신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곧 자연을 말하는 것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변용을 일으킨다고 말했음을 안다. 그러니까 현재 사물이 현상된 바에 고착될 게 아니라 그것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겪게 될 변용들까지 아울러 이해하는 것이 사물에 대한 진정한 이해이며 이를 이성의 본성이라 말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영원의 상 아래”라는 말은 전혀 다르게 읽혀야 한다. …대체 어느 쪽이 옳은 독해인지??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