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숙제방

고양이 수정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6-09-11 19:50
조회
340
2016.9.3 / 청년, 소세키를 읽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현암사) / 손지은

자각성 바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는 태어난지 얼마 안된 새끼 고양이다. 새끼 고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과 고양이는 나이를 셈하는 법이 다르니 인간의 기준으로 마냥 어리숙하게 봐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나름의 자기 관점과 세계관을 갖춘 영묘한 고양이다. 만일 인력거집으로 인연이 닿았다면 힘깨나 쓰는 고양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중학교 선생 집으로 인연이 닿는 바람에 머리깨나 쓰는, 심지어 사생을 짓는 고양이가 되었다.

고양이는 보통 주인 곁에서 주인인 구샤미를 비롯, 그 집에 드나드는 한가한 인간들을 관찰하며 ‘인간 혹은 문명인 관찰론’을 펼쳐내는 것을 주 일과로 삼고 있다. 주인집은 누추하지만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주인 구샤미가 세심하고 배려 넘치는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라서, 무디고 별 생각 없는 사람이라서 한량같은 인물들이 제집처럼 드나들듯 드나드는 아지트가 된 것이다.

이 집에 발걸음 하는 인물들은 미학자라던지, 이학사라던지 하는 교양인 무리로, 보통 사람은 못 알아먹을 저 그리스 아테네부터 중국 고승의 말까지 끌어와 대담을 나누는데 알고보면 허튼 소리 일색이다. 그 와중에 제정신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고양이라 할 수 있다. 고양이는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스스로 괴로워하는’ 인간 군상을 한심하게 여기지만, 고양이의 묘사를 듣고 있자면 어쩐지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 마음이 간다.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지켜야 할 예법도 없는 주인집에서 사람들은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이야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대부분 들어도 별 소득 없는 이야기들 뿐이지만 일당 백 한량들의 만담을 듣고 있자면 하도 엉뚱하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피식 웃음이 난다. 미래에는 자살이 정식 과목으로 등장할 거라는 둥, 개성이 발달하여 ‘나는 나, 남은 남’이 되면 결혼도 예술도 사라질 것이라는 둥, 한낱 가볍고 우스갯소리 같은 말들이지만 듣고 있다 보면 묘하게 설득되어 마치 앞날을 예언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한량들이 특별한 일 없이 모여서 쓸데없는 대화를 일삼는 것은, 실제로 소세키가 자신의 서재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열었던 ‘목요회’1 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구샤미가 소세키 본인을 본딴 것임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는 바이다(구샤미의 직업이 선생이라는 것, 위가 약하고 신경쇠약의 기미를 보인다는 것, 곰보로 고민했다는 것 등). 코털을 뽑아 원고지 위에 정중하게 심어 놓는다던지, 굴처럼 서재에 들러붙어 침 흘리며 졸고 있는 구샤미를 떠올리면 소세키가 어떤 인물이었을지가 그려져 웃음이 나면서도, 어떻게 자신을 이처럼 희화화할 수 있는 걸까 그 정신태도가 자못 궁금해진다.

<고양이> 해설을 쓴 장석주 선생님은 이를 두고 ‘당대의 교양주의가 가진 허세와 위선을 풍자하기 위해 자신의 분신까지 내세워 자기비하 한 것’이라 평하기도 했다. ‘당대의 교양주의를 풍자’한다는 의견에는 일면 공감이 가면서도 소세키가 ‘자기비하’한 것이라는 설명은 어쩐지 석연치 않다. ‘자기비하’라고 하더라도 소세키가 보여주는 태도는 일반적인 ‘(자신을 위축시켜 현실에 등돌리는)자기비하’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중의 고양이도 정확하게 짚어낸 바 있다. 어느날 구샤미가 거울에 곰보 자국을 비춰보며 “역시 추레한 얼굴이군.(427)” 하고 말하던 장면이다. 이에 고양이는 “자신이 추하다고 고백하다니 칭찬할 만한 일.(427)”이라며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도 없다.(427)’는 식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때, 자아가 위축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는 것만큼 약이 되는 일도 없다. 미추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로 용케 사람입네 하고 오늘날까지 거만하게 살아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생애 가운데 그걸 깨달을 때가 가장 다행스러운 시기다. 스스로 자신이 바보임을 아는 것만큼 존경스럽게 보이는 것은 없다. 이 자각성 바보 앞에서는 온갖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머리를 조아리고 황송해해야 한다. 당사자는 당당하게 자신을 경멸하고 조소하더라도, 이쪽에서 보면 그 의기양양한 모습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송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430)”

 

고양이(혹은 소세키)의 말처럼, 자신을 풍자하는 것은 ‘자기비하’적 경멸이나 조소가 아니다. 구샤미가 자신을 조소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사자 자신의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샤미는 곰보 자국을 감추려 하지도, 곰보 자국을 경멸하지도 않는다. 추레해 보이는걸 ‘추레하다’고 마치 남 얘기하듯 말한다. 이런 태도는 ‘자기비하’와 연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여유’와 연결된다.

고양이는 요령부득에 주변머리 없는 주인을 다소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지만, 주인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만큼은 ‘믿음직’하다고 말한다. 인간 문명 안에서는 그럴듯하고 옳아보이는 일도 한걸음 물러나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인 때가 많다. 이것을 잘 아는 고양이로서는 ‘자신이 바보임을 아는’ 인간만큼 존경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소세키가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웃음거리로 삼아 소설을 쓸 수 있는 것도 그가 바로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각성 바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를 비하하는 듯한 말을 해도 여기에는 ‘비루함’보다 ‘당당함’이 묻어난다. 자신이 바보임을 아는 이는 자신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묘한 환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자신을 껴맞추려는 가학적인 행위는 하지 않는다. 구샤미와 그의 친구들이 태평하고 여유만만인 것은 이런 정신태도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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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요회|소세키는 재능있는 문학인과 지식인, 예술인들과 ‘소세키 산방’이라 불리던 자신의 서재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모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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