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29. 교언영색(巧言令色)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6-28 11:35
조회
699
29. 교언영색(巧言令色)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교묘한 말과 아름다운 얼굴색에는 仁이 드물다."  (論語, 學而)
루쉰의 글 중에 <동냥치>(《들풀》)라는 것이 있다. 이 글 속에서 화자는 동냥질 하는 아이를 만난다. 그런데 화자의 눈에 그 아이가 도무지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불쌍해 보여야 무엇인가 적선할 마음도 생길 것인데 도무지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성가시고 밉다. 몸짓들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보시할 마음이 없다. 나는 그저 보시하는 이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성가셔하고, 의심하고, 미워할 뿐이다.”

엊그제 격몽스쿨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 구절을 읽으며 위 내용이 떠올랐다. 구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던 것 같다. 동냥질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행위이다. 상대의 호의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탓에 도움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행위이다. 동냥치를 미워하는 마음 역시 알 것 같다. 도움을 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묻게 된다. 정말로 그대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가. 그대가 필요로 하고 또 상대에게 받고자 하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무엇이 그토록 그를 또 나를 애걸하게 만드는 것인가.

배운 것에 따르면 존재는 이미 충만하다. 어떤 존재도 결핍을 미리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것이 없다, 저것이 없다 좌절하여 구한다. 돈을 구하고 사회적 지위를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뿐인가. 믿음, 사랑, 우정, 신뢰, 명예… 이 모든 것들을 끝없이 구한다. 뭣이 중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각자에게 중한 것을 놓치지 않고자 말과 행동을 꾸며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령, 심지어는 누군가는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말을 꾸밀 수 있지 않는가. 같은 이유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 놓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렇다면 신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가령 ‘교묘한 말과 아름다운 얼굴빛’으로 얻고 유지되는 신뢰라면 그것은 결국 기만이 아닌가. 상대의 신뢰를 열렬히 구하지만 실은 최선을 다해 그를 기만하고 있는 경우도 가능한 것 같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교언영색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쓰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위가 무엇이 문제일까 싶다. 하지만 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의 본래의 덕성을 해치지 않는 일. 진실하다는 것은 저 자기 본래의 마음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교언영색자(巧言令色者)는 어떠한가. 주자에 따르면 교언영색자는 사욕(私欲)을 키운다. 그리고 본래 마음의 덕, 곧 仁을 잃는다.
교언영색자는 그 마음의 주인이 외부에 있다. 외부의 어떤 강력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바라고 또 없으면 안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 자기를 속이고 말과 표정을 꾸미게 된다. 호의를 베푸는 일조차 때로는 위험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호의를 베풀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에 실은 타인에게 비난받지 않기를 바라고 내게 거슬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배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때로는 무수한 ‘좋은 마음’들이 나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교언영색(巧言令色), 어렵고 어렵다. 더군다나 때로는 따뜻한 시선과 말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기도 하다. 그런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럼에도 또한 자기의 교묘한 말과 좋은 낯빛에 스스로도 속게 되는 일이 태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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