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클로즈업 첫날 후기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20-05-23 12:34
조회
221
 

육식의 시대, 먹기의 윤리를 생각하다


 

이 세미나가 열리기까지

는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원하시나요? 몇 날 며칠 버전? 당일치기 버전? 맘 내키는 대로 골라 들으세요.

- 몇 날 며칠 버전

공부는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머리 아플 때가 많죠. 그럴 땐 달달한 게 땡깁니다. 규문에 간식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규문 간식개혁 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1인 밴드가 등장해서 원맨쇼를 시작했습니다. 밀가루와 과자 금지. 그리고 매번 다른 명분으로 제공되는 아리송한 차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월요일엔 ‘불교샘들을 위한 보리차’, 꽤 그럴싸하죠.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도 생각나고. 버뜨, 수요일엔 ‘스피노자 샘들을 위한 보리차’, 토요일엔 ‘니체 샘들을 위한 보리차’, 일요일엔 ‘주역 샘들을 위한 보리차’.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우리 샘들은 웬지 차들에게 이용당한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됩니다. 이때쯤 우롱차가 등장합니다. 불교샘들과 코코 세미나와 몸 세미나와 명리 세미나와 불티 세미나를 위한 ……. 돌려막기로 바쁜 와중에 규문의 연구원들은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간식뿐 아니라 먹거리 전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즐겨 먹는 고기는 정말 좋아서 먹는 것일까? 우리는 음식을 어떻게 먹고 있는 것일까? 이 음식은 어떻게 해서 내 밥상에 이른 것일까? 어떻게 먹는 것이 잘 먹는 것일까? 등등. 이런 생각들을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선생님들과 다른 학인들과 나누고자 세미나를 하고 글을 써서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 당일치기 버전

세미나 시작 전,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황윤 감독의 “잡식 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를 보고, 맛있는 간식 겸 저녁을 먹었습니다. 주먹밥과 유부초밥, 향긋한 쑥국, 견과류와 과일들. 예상보다 빨리 밥을 먹는 바람에, 우리는 계획에 없는 산책을 했습니다. 멀뚱멀뚱 얼굴 보고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손발이라도 부지런히 놀려야죠.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입도 자연스럽게 열리고 마음도 열리는 거죠. 처음 보는 얼굴들과 익숙한 얼굴들이 초큼 덜 서먹해집니다.

 황윤 감독은 “우리가 먹는 고기가 어떻게 길러지는지 한번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한 점의 고기 속에 동물들의 눈물과 노동자들의 눈물, 막대한 축산분뇨로 오염되는 땅과 강의 눈물, 기아로 굶주리는 지구 저편 사람들의 눈물,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고기로 병들어가는 우리 모두의 눈물이 포함돼 있다”는 제작의도를 전했다. 보다 값싸고 많이 먹기 위해 생명들을 고통스럽게 길러내는 현대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은 무엇을, 어떻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먹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인간과 동물이 더불어 사는 생태계를 향한 귀중한 발걸음이다. (Daum – 영화 소개에서 인용)

 영화에서는 우리나라의 돼지들이 어떤 환경에서 사육되는지 보여지는데, 책보다 더 직접적으로 훅 들어오는 영상들 때문에 보는 동안 내내 긴장했습니다. 좁은 스톨에 돼지를 가둬놓고 기르는 축산 공장에서는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옛날 식으로 돼지를 기르는 돼지 농장에 찾아가 촬영을 하면서 감독은 살아있는 돼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돈까스를 좋아하던 감독이 돼지에게 정이 들면서 돼지고기는 고기라는 ‘보편적인 음식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돼지’의 시체가 됩니다. 나와 무관한, 대상화하던 물체에서 이야기를 담은, 나와 연결된 생명이 된 것입니다. 감독은 이제 고기를 마냥 즐겁게 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캐릭터는 단연, 오기창창해서 귀여운 남편이죠. 사실은 본인도 육식을 그리 즐기지 않고 그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육식에 반대하게 된 부인이 들이대는 카메라 앞에서 일부러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고기를 좀 편하게 먹자며 눈을 흘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잡식 가족의 딜레마가 아니라, 감독의 가족으로서의 딜레마가 느껴졌었죠. 영화에는 감독의 아이도 자주 등장하는데, 아이가 탄생하는 장면과 돼지가 탄생하는 장면, 아이가 쌔근쌔근 자는 장면과 돼지가 엄마 젖을 물고 평화롭게 자는 장면이 교차 편집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장가를 배경으로 한 이 장면을 보면서, 인간과 돼지가 모두 하나의 생명이라는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제 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겨우 하나의 생명일 뿐이면서, 소중한 생명이라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도 평온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고깃집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육식이 일상화된 이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고기를 먹고 있을까요? 고기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주로 단백질이라는 영양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 흘러나오는 육즙, 편리한 배달음식입니다. 맛과 건강에 대한 이미지로서의 고기가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미지로서의 고기, 소외를 낳는 먹기’/김혜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먹는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어 내 밥상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물이 생명이 아니라 인간 옆에서 가축으로 존재하는 한, 공장축산을 통한 값싼 상품으로서의 고기를 벗어나긴 어려울 것입니다. 공장 안쪽에서 가축이 고기가 되고 생명이 상품이 될 때 이런 고기를 먹는 우리는 어떻게 변할까요?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지만, 이러한 생물에 의해 환경 역시 변합니다. 생태학에 따르면 진화는 언제나 공진화(共進化)입니다. 고기로 태어나는 공장의 동물들과 그것을 먹는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공진화하고 있을까요? (‘고기들의 진화론’/성민호),

육식이나 채식이냐가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먹거리를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면, 인간이라는 한 종의 욕망을 무한 증식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먹고 먹히는 것이 모두 생명이라는 점에서 동등하고, 이중 어느 하나가 변하면 생태계도 바뀐다는, 우리는 모두 연결된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책임감 있는 먹기란 어떤 것일까요? (죄책감에서 책임감으로/구혜원)

 


먹는 것을 둘러싸고 연구원들의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세미나에 참가한 우리들도 고기에 대한 각자의 체험을 간략하게 나눠보았습니다. 특별한 날 포상처럼 주어지는 이벤트성 고기, 먹으면 속이 불편해지는 고기, 품이 덜 들면서도 폼나게 한 상 차릴 수 있는 고기 요리,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준비하고 먹게 되는 요리로서의 고기, 너무나 맛있는, 진리로서의 고기(고기는 진리죠), 노력에 비해 얻는 쾌락이 큰 고기, 값싸고 푸짐한 한 끼 식사로서의 고기 등등. 누군가에게는 음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노동의 재료라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수고하신 많은 이들의 공덕을 생각하며

세미나 공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산성을 늘리려는 경제 논리에 의해 ‘삶’을 빼앗겨버린 동물, 빨리 더 많은 수익을 올려서 ‘건물주’가 되고 싶은 농장주, 한국에서 팔자를 고쳐보려는 외국인 노동자, ‘먹는 고기’를 소비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힘쓰는 고기’로 되어가고 있는 우리.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얽혀 있습니다. 특히 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연관된 노동이나 육식의 카르마는 둘째 날 세미나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 같으니, 그 내용도 기대해 주세요. 저는 낚시밥 하나 툭 던지고 갑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웬델 베리는 먹는 것과 관련해 도시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냐는 질문에 책임감을 갖고 먹으라고 답합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한 소비자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생산과 유통, 소비의 그물망에서 이미 생산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농작물과 축산물을 생산해도 소비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생산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비가 생산물의 질과 양을 결정합니다. <고기로 태어나서>의 저자 한승태의 말처럼 우리가 고기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음식산업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그냥 주변에 고깃집이 많고, 고기 요리가 먹기도 주문하기도 쉬워서 먹는다면 우리는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무책임한 수동적 소비자일 뿐입니다. 웬델 베리의 말처럼 책임감 있게 먹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비자로서 저의 중요한 선택 기준은 가성비입니다. 가격 대비 질. 가격과 질 사이에서 밀당을 하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곤 합니다. 이때 내가 선택하는 먹거리의 질이 내 삶의 질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면 저의 선택은 달라질까요?

 


세미나를 하면서 내내 음식을 먹기 전 읊는 공양 게송이 떠올랐습니다.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이들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육고기로 내 앞에 존재하기 이전에 닭이었고 돼지였고 개였고 소였을 이들. 나와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삶을 영위하다 죽을 존재들. 그들이 영위할 삶에 관여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조건으로서 내가 작용한다면 어떻게 더 그들이 자기 본성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처럼 그냥 돼지가 아니라 십순이, 뚱순이, 용순이, 돈수를 떠올린다면 지연샘 말대로 필요한 만큼 먹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을 뿐 아니라, 그들이 좀 더 좋은 조건에서 길러지도록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늘 접하는 고기들이 어떻게 생겨나서 내 앞에 이르게 됐는지, 내 몸에 들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걸 먹은 나는 또 어떻게 그 음식의 생산에 관여하는지 이 연결과 순환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얼 하는지 알고 행동하는 것. 호흡하는 나를 알고, 걷는 나를 알고, 먹는 나를 아는 것. 명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렷하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행동하고 그 과보를 달게 받는 것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돼지가 고기로 되기까지 그 과정에 얽힌 온갖 인연들(햇빛, 공기, 물, 생산과 소비와 유통 과정에서의 노동, 돼지의 희노애락 등등)을 내 몸에 받아들이고 그 인연들로 인한 충만한 만족감은 물론이고 부작용까지를 당연하게 감내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체 3

  • 2020-05-23 16:58
    빠른 후기 감사합니다~ㅎㅎ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이들의 공덕... 저는 명상 시간에 '음식을 앞에 두면 그만 정신을 잃고 만다'는 말이 계속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정신을 잃지 않고, 그것에 얽힌 업을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 2020-05-24 14:39
    새삼 '잘먹겠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는 식사 전의 인사(의례, 기도, 선언?)가 낯설게 느껴지네요. 저는 그럴 때 그저 요리를 해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어쩌면 내가 먹는 것, 나에게 먹히는 음식이 영위했던 삶과 "그 과정에 얽힌 온갖 인연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먹는 일에서조차 주인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과, '잘 먹는 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 하나의 과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 2020-05-25 11:42
    크으 멋진 후기네요 샘!
    저도 책임감 있게 먹어야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웬델 베리의 말이 콕 들어왔습니다.
    단지 양심의 가책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먹는다는 것은 돼지가 고기로 되기까지 그 과정에 얽힌 온갖 인연들(햇빛, 공기, 물, 생산과 소비와 유통 과정에서의 노동, 돼지의 희노애락 등등)을 내 몸에 받아들이고 그 인연들로 인한 충만한 만족감은 물론이고 부작용까지를 당연하게 감내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이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