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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수치심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17-11-06 14:14
조회
28
수치심

죽는 게 정상이고 산다는 게 예외적인 환경인 독일군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랑신. 강제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살았지만, 전쟁이 종결되고 환경이 바뀐 러시아군이 운용하는 수용소에서도 빵 부스러기를 모아 주머니에 넣거나 너무 자주 씻고 있는 유대계 프랑스인 여의사인 프랑신. 2차 세계대전이 러시아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게달리스트들은 처음으로 가시철조망 안에 수용된다. 게달리스트들은 그 수용소에서 프랑신과 만나게 되었다. 안정된 지금의 전쟁 난민들을 수용한 수용소에서 자살이 빈번히 발생한다. 자살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게달리스트들은 이곳의 난민들이 이제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왜 자살을 하는가에 대해 의아해 한다. 프랑신은 이 곳 유대인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시간이 있고, 수치심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유대인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수치심을 느끼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녀도 수치심을 느낀다고 고백하면서 그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신해 죽은 거 같아 느껴진다고 한다. 실제로 죽은 자들이 그녀 대신 죽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프랑신은 왜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죄인이 된 기분일까?

프랑신은 죽음이 상식인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운명이라고 여겼는데 우연히 살아났다. 죽음을 기다릴 때는 스스로 죽으려 하지 않았다. 그 곳에서는 죽지 않으려고 저항하거나 체념하여 그냥 기다리는 선택만이 가능했으니까. 살아남아 옮겨진 수용소에서는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 자기 자신의 죽음에서 옆 사람의 죽음을 돌아보게 된다. 자신은 우연히 살았는데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이 터무니없는 죽음들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혼란 속에 머물게 된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런 대량 학살을 겪고도 이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과 이런 과거와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이 증상은 이유를 찾기 어렵기에 계속될 것이라는 예상 앞에서 살 수도 있는 지금 그들을 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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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7 10:14
    수치심은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에 대한 어떤 신학적 해석도 불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운명에 치명적이었지요. 또한 그 감정은 엄청난 책임감을 동반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토론에서 이 문제가 많이 의논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