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숙제방

동화인류학 파이널 에세이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11-22 00:47
조회
89

오후 1시 예정이었던 다큐멘터리 촬영일정이 오전 11시로 갑자기 당겨져서 부득이하게 세미나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습니다ㅠㅡㅠ


미리 과제 올립니다. 아쉽지만 동화 세미나에서 샘들과 다양한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






누이동생, 오빠의 탈주선을 그리다


다수의 잘생긴(!) 오빠를 거느린 여동생에 대한 대중들의 선망. 베컴 부부의 딸 하퍼 그리고 영화배우 클로이 모레츠가 그 예다. 대중들은 여동생인 그들이 아버지와 오빠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이며 남자친구를 데리고 올 때 그들이 나서서 그 남자친구에 대한 검증을 호되게 하길 기대하는 등 따뜻함과 든든함(?)을 예찬한다. 이 때의 오빠들은 아버지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즉 아버지의 질서 속에서 ‘약하고 무능력’한 여동생을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태도를 재생산한다. 그런데, 동화 <열두오빠>에서의 오빠들에게 여동생은 아버지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탈주선이 된다. 하나는 여동생이 오빠들의 하녀와 창녀로 기능해 ‘왕자'의 신분을 벗어나 아버지로부터 탈영토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빠들이 ‘아버지의 아들인 인간’에서 벗어나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도주선을 발명하는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로 작동하는 것이다.

 자, 그럼 <열두 오빠>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자식 열두 명을 모두 아들만 낳아버린 왕은 선언한다. “앞으로 태어날 열 세 번째 아이가 딸이라면, 열두 왕자를 죽여 공주의 재산을 크게 해 주고 온 왕국을 공주 혼자 갖도록 하겠소.” 왕의 선언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것 보다는 ‘열두 왕자를 죽인다’는 예고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그를 자신의 통제 및 소유물로 여긴다는 것이므로, 아버지의 ‘질서 체계' 안에서 그의 힘을 재생산할 열 두 명의 아들을 여전히 그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라도 ‘죽인다'라는 경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동생은 사실 오빠들을 제압하기 위한 아버지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오빠들은 아버지가 아닌 여동생에게 분노한다. “계집아이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하다니! 맹세코 복수를 하리라. 만약 계집아이가 눈에 띄면 어디서건 붉은 피를 흘리고 말리라.” 오빠들의 존재를 알아버린 여동생은 그 길로 스스로 오빠들을 찾아 곧장 길을 나선다. 아버지의 위협에 쫓겨난 오빠들은 분노하며 여동생을 벌주겠다고 다짐하는 반면, 여동생은 자신이 떠나오는 그 자리에 대해 별다른 미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여동생은 아버지의 질서를 물려받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길을 나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여동생은 오빠들과 ‘이성관계'를 맺는데, 그 방식은 창녀와 하녀의 형태로 나타난다. 공주가 길을 나설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다름 아닌 오빠들의 ‘속옷'이다. 한 명도 아닌 열두 오빠들의 속옷을 여동생 한 명이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은 오빠들 모두와의 성적관계를 암시하는데, 즉 ‘창녀'를 떠올리게 한다. 여동생을 가장 처음 본 막내 오빠 벤야민은 동생을 보자마자 “커다란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춘다. 동생을 죽이겠다고 벼르던 나머지 오빠들도 막상 동생이 나타나자 아름다움에 반해 “모두 기뻐서 소녀의 목을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는 등, “진심으로 누이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동생과 오빠들은 탈영토화의 근친상간으로서 아버지에 대항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을 벗어난 새로운 형태다. 여동생은 또한 오빠들에게 ‘하녀'로 기능한다. 공주였던 여동생은 오빠들을 만난 후 “음식을 익힐 때 쓸 땔감을 찾아오고, 야채로 먹을 수 있는 풀들을 뜯어 오고, 냄비들을 늘 불 옆에 두”는 등 각종 굳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다. 오빠들 또한 왕자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식거리를 마련하려고 숲 속으로 들어가 사슴, 새, 비둘기 따위의 야생 짐승들을 잡아” 온다.

“분열적 근친상간을 접속의 최대치, 다의적 외연의 최대치와 결부되어 있고, 하녀와 창녀를 매개로 하여 그녀들이 사회적 계열들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결부된다.” (8회 우리는 어쩌다 형제로 태어나 선민샘. 사진에 달라붙을 것인가? 누이의 목에 기어오를 것인가? 157-158쪽 재인용)

 아버지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여동생이 오빠들을 만나 하녀와 창녀로 기능하면서, 오빠들 또한 왕자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냥꾼이 되고 창녀와 접속하는 ‘거리의 남자들'이 된다. 아버지가 물려준 신분으로부터의 탈코드화 및 왕국의 질서로부터의 탈영토화를 이루는 것이다.

 여동생은 나아가 오빠들의 존재 자체를 뒤바꿔 버린다. 동생이 꽃을 꺾자, 오빠들은 난데없이 까마귀로 변신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존재의 변신이 아니다. 여동생은 탄생 전부터 오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존재하기도 전부터 오빠들의 생과 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여동생은 ‘존재 이전의 지평’, 즉 기관 없는 신체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은 비생산적인 것, 불임인 것, 출산되지 않은 것, 소비 불가능한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것이 형태도 모습도 없는 채로 있던 그곳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죽음 본능, 그것이 그 이름이며, 죽음은 모델이 없지 않다.” (<안티오이디푸스>, 32쪽)

이 동화에서 여동생은 오빠들과 같이 아버지의 질서를 재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고, 특정 역할을 하는 어떠한 존재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소비 불가능'하다. 여동생은 ‘꽃을 꺾어' 오빠들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이전인 ‘중간단계'의 지점, 까마귀로 만든다. 인간이 되기 이전의 지평인 까마귀로 머무는 7년 동안 여동생은 그 오빠들을 위해 7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코드화와 기표화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 오빠들은 다시금 사람으로 되돌아오지만, 왕인 아버지에게도 돌아가는 대신 여동생의 가족과 함께 산다.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동화 <열두오빠>에서의 여동생은 오빠들이 아버지의 법과 질서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열어주는 존재다. 그런데 현대의 오누이 관계는 어쩐지 아버지-딸의 관계의 재생산인것만 같다. 여동생이 밤늦게 밖에 돌아다닐라 치면 혼쭐을 내고, 여동생의 미래를 코치하는 존재. 하지만 여동생은 오빠를 도주 시키는 발화점이 되고 가족을 해체시키는 지점이 된다. 제일 약하고 아무 역할도 없어 보이는 존재가 실은 가족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