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1ㅡ8강(07.22)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7-29 14:22
조회
205
1. 천일기도와 기관 없는 신체

채운샘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디에도 마음을 못 붙이고 계속 직장을 옮기고 아무것도 꾸준히 못 한다는 질문자가 법륜스님에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계속 자격증을 따면서 직장을 구하지만 마음 붙일라치면 또 옮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일단 스스로가 끈기가 없고 한 가지를 오래 못 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는 아니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냥 ‘내가 이렇구나’하면서 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자신을 바꾸고 싶다면 방법이 하나 있는데, 천일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법륜스님이 제안한 천일기도라는 것이, 절에 들어가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원서를 낸 다음에 무조건 처음 합격되는 곳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천일을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주던 안 주던 회사가 망하건 말건 무조건 천일을 다니라는 것. 그렇게 해야만 ‘업식’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불교,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가타리, 푸코 같은,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들의 공통점은 ‘무의식’의 차원을 문제 삼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따지거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이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틀 자체를 넘어가는 철학. 다르게 느끼고 다른 신체를 만들기를 시도하는 철학. 법륜스님의 천일기도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스스로를 아무리 심판하고 벌 줘도 패턴화된 감각과 무의식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고착될 뿐이죠. 그래서 스님은 우선 자신의 끈기 없음에 대해서 심판하기를 멈추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다음으로는 일종의 수행을 통해 다른 신체를 만들기를 제안하셨습니다. 결국 읽고 쓰고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일종의 천일기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때의 목적은 ‘나쁜 습관을 바꿔보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것이겠죠.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힘들과 다르게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 이건 굉장히 어렵고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기도 한 목적인 것 같습니다. 어떤 주어진 해결책도 없고 대안도 없고 도달해야 할 목적지도 없지만, 지금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는 힘들을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느끼는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니까요.

채운샘께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식’과 들뢰즈-가타리의 ‘지층’이 유사한 개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업식과 지층은 모두,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무의식, 타고난 조건으로부터 비롯되는 규정성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조건으로부터 비롯되는 규칙이나 패턴, 전제 같은 것들을 몸에 새기고 있죠. 우리가 돈을 혐오하고 노동을 혐오하고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조차 이미 우리가 사물을 가치평가하고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관점에는 자본주의적 전제가 작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분절하는 지층들과 더불어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화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규칙을 부과하는 ‘형성력’을 의미합니다. 지층이건 업이건, 우리는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체와 정식에 규칙성을 부과하는 형성력이 없다면 우리는 분자로 흩어져버릴 것이고, 정신은 파편으로 붕괴되어버리겠죠. 다만 우리는 지층과 업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업’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업장소멸’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업장소멸’을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로 번역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2. 생성의 철학/ 배치와 추상기계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라고 불립니다. 생성의 철학이란 부단한 변환 자체로서의 존재를 사유하는 철학입니다. 化의 철학. 이러한 철학은 ‘인식’을 위해서 정적인 요소나 변치 않는 구조, 완결된 법칙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훨씬 더 익숙한 것은 생성 이전에 ‘존재’를 전제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아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생성 이전의 존재를 찾기를 반복하죠. 예를 들어 끊임없이 발생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감정’을 실체화하여 ‘나’라는 불변하는 자아로 환원시킨다거나 텍스트로부터 저자의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정의’나 딱 떨어지는 ‘결론’을 요청한다거나 어떤 제도나 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 될 거라고 믿거나 그렇게 해결 된 상태를 꿈꾸는 식으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체론자가 됩니다.

그런데 ‘존재’를 우선시하는 철학의 난점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건, 생성변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는 점입니다. 니체는 끊임없이 변이하는 감각을 폄하하고 사물들에 대한 상을 고정시키는 이성에 특권을 부여했다는 점 때문에,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자들의 사유에 스며들어 있는 생에 대한 부정을 고발했죠. 생성을 존재에 종속시켜 총체적 동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한 우리는 관념론자이며, ‘구조’의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우호적인 것들로만 세팅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비관론자입니다. 고정불변의 존재를 요청하는 사유를 극단으로 밀고가면 거기에는 파시스트나 허무주의자가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넘어가기 위해 사회체를 다르게 사유하고자 했습니다. 사회체를 불변의 상수 위에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 위에서 사유하는 것. ‘흐름’이란 질료와 운동을 동시에 사유하도록 하는 용어입니다. 운동 자체로서의 실재. 우리가 흔히 운동을 고정된 개체가 3차원의 한 지점으로부터 다른 지점으로 위치이동을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마는 것과 달리 ‘흐름’이라는 개념은 “움직임 자체, 움직임으로부터 전개되는 힘들의 이코노미”(채운샘 강의안)로서의 물체와, 그러한 운동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이하는 전체를 사유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흐름’의 차원을 포착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가 고안한 개념이 바로 ‘기계’입니다. 기계는 그 자체로 복수성(複數性)을 전제합니다. ‘흐름’의 관점에서 볼 때 운동이란 독립된 개체에 국한된 힘의 작용이 아니라 이미 전체와의 관계, 다시 말해 무수한 다른 흐름들과의 상호작용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죠. 단일한 힘으로는 운동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기계는 언제나 기계에 대한 기계인 것이죠.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계권’에는 이처럼 운동과 개체에 대한 낯선 사유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항상적 요소들의 교환이라는 정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구조’와는 달리 ‘기계권’은 (상수가 아니라) ‘여백’을 통해 작동합니다.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여백, 틈, 차이에 의한 전위(轉位)야말로 전체로서의 기계권을 작동시키는 힘입니다. ‘기계’ 개념을 통해 들뢰즈-가타리는 ‘존재’를 중심에 두지 않고 ‘사회’를 사유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배치’라는 개념에 내재한 관점입니다. 사회체를 ‘포착되지 않는 힘’, ‘달아나는 힘’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 따라서 우리는 ‘배치’를 말하는 순간 ‘도주선’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배치라는 개념을 쓸 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어떤 배치가 더 좋은가’, ‘덜 억압적인 배치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지금 어디에서 무엇이 달아나는 중에 있는가’, ‘달아나는 힘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입니다.

그러나 물론 사회체에는 아무런 관심을 둘 필요 없고, 당장 어떻게든 도주하기만 하면 된다는 건 아닙니다. 도주선은 언제나 배치와의 관계 속에 있고 “배치마다 도주선을 다루는 방식, 다시 말해 코드와 영토를 조직하는 방식은 상이”(채운샘 강의안)합니다. 때문에 전체 배치를 신중하게 살피지 않으면 도주선은 더욱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영토로 귀결될 수도 있고 곧바로 또 다른 영토에 붙들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배치의 한쪽 면은 지층을 향해 있고 다른 한쪽면은 기관 없는 신체, 고른판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체 어디에도 영토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곳은 없으며 또한 도주선이 잠재되어 있지 않은 곳도 없습니다.

추상기계는 이러한 구체적 배치물들 위에서 작동합니다. “‘기계’는 그것이 그리는 운동성을 함축하고, ‘추상적’이라 함은 형식화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채운샘 강의안)입니다. 일종의 도표처럼, 추상기계는 구체적인 사물들을 ‘표상’하지 않고 각각의 배치물들로 환원되지 않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가령 푸코가 ‘규율권력’이라고 말할 때, 그러한 권력은 학교에 속하는 것도 감옥에 속하는 것도 권력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하나의 개체들을 다 모아놓는다고 ‘규율권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규율권력이라는 추상기계는 구체적인 배치물들의 운동과 더불어서 작동되는 잠재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학교, 병원, 감옥, 군대에서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탈코드화-탈영토화의 운동들을 포괄하는, 그러나 고정된 규칙이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도로 추상화된 그래프가 바로 규율권력이라는 추상기계입니다.

쓰면서도 이해가 될락 말락 하네요(^^;). 좀 더 와 닿는 예로, 채운샘은 작가나 예술가 또한 일종의 추상기계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작가의 ‘문체’라는 것은 각각의 구체적인 단어들을 통해서 표현되지만, 그 작가가 사용한 단어들을 모두 모아 놓는다고 해서 설명 되는 무엇은 아니죠. 그 단어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힘과 속도와 리듬 속에서 니체-추상기계, 울프-추상기계가 작동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추상기계 개념이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다르게 사유하도록 해주는지는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네요. 아무래도 이 개념은 다음 시즌 강의를 들으며 차근차근 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시즌에는 '기호체제와 주체화', '얼굴성', '미시정치', '되기', '리토르넬로', '전쟁-기계' 등등 흥미진진한 개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신청해주세요~ 그럼, 9월에 뵙겠습니다. 
전체 2

  • 2019-07-29 20:00
    영토화와 도주선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배치'이고 '기계'인가 봅니다. @.@ 음. . .암튼 왕 어렵습니다.
    한 학기동안 여러분 모두를 너무 부러워했답니다. 수고하셨어요. ^^

  • 2019-07-31 22:51
    "어떤 주어진 해결책도 없고 대안도 없고 도달해야 할 목적지도 없지만, 지금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는 힘들을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느끼는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말이 좋네요!!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서 더듬더듬 공부해가다보면 지층에도 업식에도 조금씩 다르게 느끼게 될 틈이 생길거라 기대해봅니다~~
    다음 시즌도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