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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의미의 깊이> 강의 2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9-10 10:22
조회
81
의식과 본질은 이슬람까지를 다 동양에 넣어서 동양의 사유구조를 배운 것. 표층과 심층으로 나누어 돌아보는 동양적 사유구조를 본 것이다. 그럼 다는 모르더라도, 각자 동양 것을 하는 사람은 동양과 이슬람이 묶이는구나 라든지. 자기가 각자 생각하는 이슬람. 이슬람이라는 게 우리에게 모두 멀고 아는 것도 없는데, 내가 아는 것과 연관될 수 있는 게 있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한다. 지금가지 공부한 것과 연관되는 이슬람.
다른 것을 만났을 때 기존에 있던 것과 스파크가 일어나야 한다. 만약 생기지 않으면 기존에 내가 공부한 것이 내 머릿속에 주의깊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어떤 글을 쓸 수 있는지, 써야 하는지 생각할 것.
종교와 철학을 배웠고, 처음 이슬람 문화가 어떤 것인가를 배웠다. 그럼 거기서 느껴지는 건 타자성의 문제. 내게 익숙한 조건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낯선 일.
오늘 신문에 박노자 선생이 쓴 글. 한국도 이제 이민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 선생님은 노르웨이 사람이니까. 점점 복지국가가 되어가는 나라에서도 인구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 복지가 아무리 좋아도 외롭다면 사람이 살 수 있는건가? 쿠바. 유럽의 잘 사는 중년 여성들의 애인이 되어주는 게 남자들 직업이라고 한다. 수입이 꽤 좋다고 한다. 이 얘기에서는 남자가 본질이 아니다. 캐나다나 북유럽쪽,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쿠바에 와서 잘 해주는 사람에게 껌벅 죽고 간다고 한다. 왜 그럴까? 외롭고 우울하니까. 젊을 때는 우울할 틈이 별로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신체 자체도 기운이 가라앉는데다가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는다. 외로움. 50대 이후가 되면 남녀가 다 겪는 문제.
사회가 다 복지를 잘 해주면 뭘 하는가. 다양한 세대가 다양한 일을 겪을 어떤 장도 없다.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이 하나도 없고 무기력하고 우울해하는 사회. 그나마 노르웨이 사회 같은 데서 이민자를 받아들여서 매년 50만의 인구가 들어와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이 사느냐 안 사느냐가 결국 인간의 문제. 사람이 사는 땅이면, 어디 가든 사람이 있으면 뭘 할 수 있다. 한국도 인구가 줄고 이렇게 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어쩔 수 없다. 이민사회로 접어드는 것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럼 대체로 이민자에 대한 욕은 이슬람에 대한 욕.
난민 문제, 이슬람 문제라는 게 정말 남의 문제인가? 자국민과 난민의 차이는 무엇인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건 언제나 근본에서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띤 개념인지를 묻는 것. 난민 반대 찬성 이전에 난민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는 순간에는 자국민, 나의 영토가 있는데 잠깐 돌아보는 것? 그건 관광객. 존재에게 고향이란 게 있을까? 유발하라리는 인간에게 고향이랄 게 없다. 고향중심으로 뭉칠 거면 모두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 난민이라는 지위란 도대체 뭘까. 타자성에 대해 생각을 할 때. 이슬람이 갖는 타자성.
우리는 기독교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슬람은? 우리는 뭐에 동화되어 있는가? 우리는 기독교라는 것은 익숙하다. 그런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럼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서 멀다, 낯설다고 느끼는 건 뭐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타자성의 문제가 있다. 타자를 만난다는 게 뭘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볼 것. 이슬람이 좋았다 나빴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슬람이 나에게 주는 낯선 문화에 대해 질문을 해야 그들이 말하는 뭔가에 대해 닿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타자, 이슬람이라는 문제는 뭔가. 왜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분노부터 표출하는가. 외국인 노동자도 참기 힘든데 외국 난민까지? 우리가 난민이 아니라 언제나 여기에 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난민이라는 실존적 지위는 정해져 있는 것인가? 난민이라는 타자를 대할 때도. 난민심사가 이렇게 까다로운 나라에서? 이슬람=성폭력자라는 등식은 뭔가. 자기가 나름대로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배타성이 있다. 그럼 난민이란 뭔가.
젊은 사람들은 훨씬 다국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자본이 흘러가는 길 자체가 그렇다. 나도 어디 가서 난민으로 살지 모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외국에서 교수를 했어도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카프카도. 그리고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소속감을 느끼나? 존재에게 국가란 있는가? 그 질문을 확장하고 가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난민이라는 규정은 타당한가. 탈북민 같은 것도. 그들은 난민인가?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다보면 정치적인 주제이기도 한데 철학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타자란 무엇인가, 난민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주제를 좁혀보면 책들도 많다.
이슬람 하면 또 나타나는 문제. 여성의 문제. 이슬람에서는 여성이 학대받는다고 생각되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가 문화의 상대성 이런 유치한 말을 할 게 아니라, 그런 히잡을 둘러싼 논의들을 보면. 히잡을 쓰느냐 마느냐 이걸 상대주의를 가지고 보는 건 하나도 넘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식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 이게 철학적인 주제이고 사회적인 주제다. 이슬람의 문화. 크게 보면 타자성을 질문할 때 나올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구체적으로 따져 볼 것. 9.11 이후 세계는 이슬람이라는 사회를 악의 축으로 본다. 왜 이슬람은 악인가? 우리의 시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지금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을 자기식으로 질문할 수 있으면 그 질문의 과정에서 그 문제들이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이슬람이라는 게 항상 마찬가지. 그 안에서도 20대가 있고, 그 안에서도 취업하지 못한 사람의 문제가 있다. 뭉뚱그릴 수 없는 집단. 이슬람 안에서도 가장 모르겠고 가장 이상하고 편견을 가지고 있는 문제로부터 접근해 볼 것. 그런 것이 항상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만날 수 있다.

(1) 타자로서의 이슬람

이슬람 세계를 다룬 무수한 다큐멘터리. 서방에서 다룬 것도, 현지에서 다룬 것도 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게 전제가 되어 있는지 분석해 볼 수 있다. 혹은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보면서 드러나는 주제는 가벼운 것 같지만 어쨌든 길 3부작이라고 우리가 보는 건 서방에 이란을 알린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런 영화들이 키아로스타미가 이란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정치적 내용이 없는 것 같은데. 인간을 다루는 방식.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어떤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 애가 왜 왔다갔다 하는지 그런 걸 물을 게 아니다. 이슬람과 관련된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이슬람의 세계를 그리는 방식을 내가 공부한 것과 연관시켜 볼 것.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도. 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슬람에서는 절대적인것이 신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 이 절대성은 왜 이들에게 필요한 걸까? 기독교가/이슬람이 절대적인 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예수를 매개로 하는 기독교와 예수 없이 신과 예언자만 있는 것은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가? 아니면, 불교에 전체와 개체를 보는 방식과 이슬람이랑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슬람도 나름대로 공동체가 있다고 하는데 이 공동체의 존재 양식이 다른 곳에서의 공동체와 뭐가 다를까. 혹은 종교성에 대해서도. 불료에서 수행을 하는 것과 이슬람이 수행하는 것은 뭐가 다를까. 이런 질문을 해야 영성이 뭘까 하는 질문이 나오는 것.
공부를 하는 것은, 자기가 공부를 흡수하고 그 공부를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 내 몸에 질문들이 박혀 있어야 한다. 그 질문들이 박혀 있으니까 다른 것들을 만나면 스파크가 튀는 것. 다른 데서 자꾸 찾으면 공허하고 공허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이 문제를 왜 쓰는지 자기도 모른다. 그리고 뭘 배웠다는 느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세상에 배우지 않아야 하는 건 따로 없다. 다만 뭘 배우는데 어떤 방식으로 내 생각 하나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가의 문제.
또 수피즘, 신비주의란? 신비주의는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 너머라고 보는 것인데 그 너머의 세계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할까? 이유는? 그런 걸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를 제3자 관찰자의 입장에 놓으면 안 된다. 누구도 관찰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문제다. 그 문제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 생각을 돌파하는 것으로 만나고 만들어가는 것.
같은 종교성이라도 이슬람과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종교적인 사회는 아니다. 그럼 우리가 종교에 대해 갖는 태도. 나는 종교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종교란 뭘까? 그런데 이슬람에서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일상에서 살아가는 문제. 이 종교성을 우리가 사회에서 생각하는 종교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핵심은 뭘까.
이즈쓰 도시히코에서 꾸란에 대해 자세히 읽었다. 그럼 해석자 혁명에 대해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신의 말씀을 직접 기록하는 게 왜 해석자 혁명인가? 사제를 통하지 않은 것과 뭐가 다른 것인가? 누구나 코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건 왜 혁명적인가?
자신의 지적인 관심사는 다 다양할 수 있다. 그런데 뭐가 되었든, 혹은 예전에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새롭게 제기한 문제가 뭐가 됐든 그 문제,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그 문제가 나에게 절실한 문제인 것. 그걸 가지고 가다보면 어떤 책들이 보이게 되고, 대략 어떤 것을 보든 재밌을 거 같다는 아웃라인이 생긴다. 스케치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슬람을 계속 하면서 그런식의 스케치도 못한다는 것은 반년을 사귀었는데 사귄 사람의 얼굴을 모르는 것.
지금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들, 나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는 편견들,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을 다 꺼내보는 과정이 글쓰기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앎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슬람의 인식이란 무엇인가? 예언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예언이란 어떤 말인가? 그 말하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은 무엇인가?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말이 갖는 힘이라든가 해석자 혁명이라든가 예언자의 존재라든가 그런 문제를 파볼 것.
계속해서 사람은 사랑을 갈망하는데 인간도 계속 바다를 항해하다보면 권태롭게 된다. 인간은 계속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여기 없는 것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건 진짜 그걸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거 말고 안 하고 있는 게 재밌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 하고 있는 것은 계속 부정되고 자기가 하고 있지 않은 것을 꿈꾸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썸을 탈 때는 계속 갈망하게 되는데 손에 넣으면 다른 걸 갈망하게 되는 인간의 미망. 그래서 내가 이게 아니라 다른 걸 더 하고싶다는 것은 착각.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책을 똑같은 걸 읽어도 매번 다르다.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번뇌가 무엇인지, 앞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똑같은 책이 똑같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긴장감을 말해준다. 똑같은 날이라는 건 없다. 읽을 때마다 맨날 다른데 어떻게 권태로운가.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 공부를 오래 할 수 있다. 공부를 오래 한다는 것은 공부를 해서 뭐가 있다기 보다도 그 공부가 주는 긴장감과 자의식, 공부가 나에게 계속해서 주는 긴장감으로 인해 뻘짓을 덜 할 수 있다. 안 그러면 우리는 맨날 뻘짓하고 산다.
공부를 안 하고 뻘짓하고 하는 사람들의 두 유형. 대학원 가서 20년 전 하던 주제를 지금도 한다. 가령 근대 연구. 20년 전 핫한 연구. 그걸 지금도 한다. 아니면 학교에서 계파싸움 하거나 지방대 교수들은 내일 모레면 학교가 다 정리된다. 지방대는 머잖아 다 정리될 학교가 몇십개. 제자가 안 들어온 지는 오래되었고. 그러니까 거기에서 뻘짓하고 살아간다. 그러지 않고 공부 안 하면 폐인이 된다. 회사, 결혼. 맨날 옛날 얘기만 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순간은 자기가 기억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게 옛날 얘기밖에 없는 것.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긴장감을 가지고 지금 공부 안 했다면 안 했을 아주 많은 뻘짓들을 피하고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공부를 오래 하면 좋다.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내 삶을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가 아닌가. 뭐가 됐든 공부를 하는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면서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팁을 만들어보자. 타자의 시공간을 이동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뭘 만나는 걸까. 타자를 만나는 것이 유물을 만나는 것이겠는가? 박물관만 가면 되는데. 내가 그 시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없으면 남는 게 없다. 내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과 연관되는지만 남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공부를 해서 우리의 방식으로 생산하고, 소모한다. 이게 목표.
연구실에서 하는 것도 그렇게 돈을 순환해서 쓰기 위해서다. 그 소모를 할 때 잉여가 없는 소모가 되어야 한다. 어떤 공간에 가면 그 공간에 가서 각자의 질문을 품을 수 있어야 하고 각자 자신의 신체성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한달동안 많이 걷고 차를 타고 다녀야 한다. 자기 신체를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고. 뭘 보느냐는 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가도 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럿이 가면 서로를 만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 자신과 관련된 모든 실험들을 낯선 땅에서 한달동안 할 것. 그럼 그 이상할 것이 분명한 그 한달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겪어낼 것인가. 그랬을 때 나에게 떠오르는 질문들을 체크 해 놔야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안 생겨도 질문들이 구체화 되거나 방향이 달라지거나 하는 일이 반드시 생긴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는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내가 나이가 젊으면 외국에 가서 살아가도 되겠다. 우리 때는 외국에 대한 환상이 많았는데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국에 대한 환상이 다 깨졌다. 유럽만 가도 다 깨진다. 유럽에 가면 다 쇠락한 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를 걸어다니다 보면 2000여년 전 텍스트로 접했던 그 문화가 있었던 것이 맞나? 우리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유럽은 스페인도 그렇고 어디를 가든 쇠락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유럽 문화가 가지고 있는 때가 그럴 것이다. 그러다보니 다녀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흥망성쇠. 인생이 뭔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래야 뭐가 보인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자기 자신과 공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여러 공간성을 겪고 나야 21세기를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다르게 살자는 말은 공허한 말. 다르게 살자는 것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다. 질문이 확장되어야 한다.
내가 질문을 하게 되면, 삶의 긴장성을 갖고 있으면 사는 게 질문의 연속이다. 파브롤 네루다의 질문의 책. 70넘어 쓴 질문으로만 구성된 시. 그런데 애들이나 할법한 질문부터를 한다. 그런 감각이 다 필요하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사실 다 모른다. 그게 뭘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2) 발표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을 짚어줘야 한다.
가령 역사팀은, 우리가 가는 곳을 생각해서 발표해야 할 것. 한 텀이 끝나면 어디어디를 가야 한다는 것이 나와야 한다. 가는 곳이 나오게 되면 변동이 있겠지만 터키 가고 이란이 오고 시간이 되면 이라크, 메카까지 갈 것. 이슬람을 공부했는데 메카는 가봐야 하지 않을까. 그럼 그 중간에 어떤 곳을 왜 가야 하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걸 가지고 조율을 해야 한다. 역사팀은 일단 우리가 가는 곳을 중심으로 할 것. 이란 중심. 아라비아 반도까지. 이슬람 문화권의 역사를 보는 것. 역사의 기본은 연표. 반드시 도표화 해서 나눠줄 것. 저 고대에서부터. 페르시아 전쟁사를 읽은 것부터. 페르시아의 역사, 그걸 중심으로 놓고 사이드로 이슬람의 역사가 나와야 한다. 효과적인 도표를 만들 것. 현대사까지. 중간중간 왕조들은 안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가는 자세히 모르더라도 왕조가 있었고, 변할 때마다 뭐가 있었고 누가 차지했는가 특기할 사항을 넣어줘야. 그리고 유물은 고대사와 연관된 것이 많을 것. 고대사와 현대사의 만남.
그런데 이란 같은 경우 현대사가 복잡함. 그럼 이란은 현대사의 기점을 어디로 잡는가. 우리나라는 보통 1876년 광화도 조약을 일찍 잡기도 한다. 그럼 이란은? 현대사의 사건은? 최소한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공간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집어넣을 것. 그리고 더해진다면 공부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 질문들을 말할 것.
철학팀. 엘륄의 책을 읽었는데.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를 뭐라고 보는가. 기독교의 입장에서 뭐가 핵심적으로 다르다고 보는지를 정리할 것. 최소한 살림에서 나온 이슬람 책을 참고할 만하다. 해당 주제에 대해 정리는 되게 잘 해놓았음. 이슬람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보는 방식과,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슬람을 보는 방식이 다르다.
철학팀은 나중에 이븐 시나의 책을 읽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슬람철학과 중세철학.
일단 기독교와 이슬람이 신을 바라보는 관점, 몇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최대한 정리할 것.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것도 있고, 그리고 토론을 하면서 이슬람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차원... 조로아스터교를 공부했을 때. 다른 지점. 고대종교인 조로아스터교. 그런데 이슬람화 되면서 그 토착종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종교는 어떻게 변형/평가 되었는가? 엘리아데의 책은 고대에서부터 종교가 형성되어 온 것을 보여준다. 페르시아 자체의 종교의 역사가 있는 거고, 무함마드 이후로 종교의 역사가 따로 있다. 이 두 가지 맥을 보여줄 것.
1. 기독교와 이슬람. 2.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변천.(교리를 둘러싼 문제 등) 3. 이란. 이란이 가지고 있는 고대 종교의 특수성과 문제.
네 사람을 가지고 이슬람에 대해 훑었다면, 네 사람이 이슬람을 어떻게 봤는가 이건 너무 크다. 그런데 주로 종교적 차원에서 이슬람을 본 것. 이즈쓰 도시히코는 여러 차원에서 본다. 그러니까 종교적 차원에서 이슬람을 네 사람을 정리할 것.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은, 그 종교적 차원에서 기독교와의 관계, 고대종교와의 관계,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의 특수성을 정리해보니까. 종교라는 것은 뭘까. 이 시대에 신이란 뭘까. 현대 이슬람에서도 그런 건 견고한가? 그런 자료를 찾아볼듯. 유럽이 다 기독교도가 아님. 그럼 이들은 기도를 하는 애들이 있는데 또 다 그런 건 아니다. 현대 서양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슬람 종교란 무엇인가? 현재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슬람의 현실적인 문제. 종교와 관련해서. 이들은 순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형식적? 이들에게 알라는 뭘까. 똑같은 기독교라도 중세인에게 기독교와 지금의 기독교가 다르듯, 이슬람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갖는 특이성은 뭘까. 왜 점점 이슬람 교도는 확장될까. 무슨 매력?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분들은 현대와 맞지 않을 거 같기도 한데, 그럼 현지의 사람들은 이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런 현재적인 부분들을 질문해볼 것. 정리는 바탕. 정리할 때도 핵심을 가지고 할 것.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종교성이란? 이들에게 자기들 종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렇게 디지털화 된 시대의 이슬람이란? 그렇게 문제를 확장하다보면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이 있을 것. 기사를 더 찾아볼 것. 르몽드. 우리나라 기사. 뭐가 나오더라도 나온다. 그것만 보더라도 우리가 갖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이 나온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슬람 사회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이맘은 정치 지도자와 뭐가 다를까? 서구에서 말하는 대의제에 의한 정치지도자라는 말을 굳이안 쓰는 이유는? 이들에게 왜 종교적 카리스마가 필요한가? 수니파는 차라리 상식적. 능력있는 정치지도자를 원한다. 그런데 왜 시아파는 그들에게 종교적 카리스마를 원하는가? 또 종교적 카리스마는 뭔가? 어떻게 해야 종교적 카리스마가 있는 것인가? 혈통이라고 해야?
철학팀은 마호메트 평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평전을 봐야 뭐가 좀 보일 것

(3) 의미의 깊이

174페이지.
수피즘을 신비주의라고 말하는 도시히코. 그런데 신비주의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경험적 세계의 이면의 차원을 생각하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경험적 세계의 이면에 있는 것은 독특한 체험을 필요로 한다고. 수피즘 같은 경우. 특수한 정신적 훈련에 의한 '타리카'. 세계적으로 정신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음 둘 데가 없으니까. 자기 마음이 어디에 붙들려 있으면 굳이 마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차원에서 영적 수행을 필요로 하는 건 유투브 찾아보면 많다. 수피즘도 영적 체험과 관련해서 정말 많은 시각자료가 존재한다. 그런 사이트도 많고. 수피즘 같은 다른 방식의 정신적 차원을 생각하는 것을 다 수피즘으로 묶는다. 나는 그렇게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의 전제가 그렇다.
타리카. 특수한 정신훈련. 칼리아스 산이 불경에 나오는 수미산의 모델. 그런데 통째로 바위산. 봉우리가 여러개인 산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인 산이다. 그 산이 당연히 통째로 바위다 그러면 산이라면 나무도 물도 있지만 광물이 많다. 이 통째 바위산이다보니 자기장이 다르게 작용한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그 산을 많이 간다. 거기 가면 신비체험을 많이 한다. 신비체험이라는 게 왜 산에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산은 오행이 다 있는데 특히 나무가 별로 없는 돌덩어리가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기 떄문에 신체가 바뀌어버린다. 그래서 굉장히 다른 체험을 하고 온다. 그래서 인도 수행자, 수피즘 수행자들이 거기 가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 많이 아프거나 그러면 몸을 바꾸기 위해 거기서 오래 수행하기도 한다. 신비체험이라는 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신비하지 않다. 몸의 기운이 강력한 자석을 만나서 몸의 기운이 바뀌고, 정신도 바뀌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관념은 몸의 변형에 대한 관념이다. 신체의 변형이 이루어지면 관념의 회로가 바뀐다. 그래서 이전에 형성되어 있던 생각의 회로가 바뀌는 체험이 된다. 그래서 어떤 것도 관념으로 돌파할 수 있는 신비체혐 같은 것은 없다.
신비체험이라는 것은 몸의 훈련이 따라오지 않는 정신수행은 없다. 심신훈련은 형이상학적 신체훈련으로 이루어진다. 요가도 몸의 훈련. 몸의 장이 바뀌니까 생각도 바뀌는 것. 문제는 강력한 신체 변형이 이루어지는 강한 훈련을 지속하면서 관념 자체가 다른 회로가 되는데, 세속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수피즘이든 신비로운 체험이든 살아가는 인간세상에서 필요한 건 맞다. 인간이 다 유용한 것만 하는 건 망하는 지름길. 영적 체험을 위해 무용한 것을 하는 것. 그런 것만으로 존재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그런 세계에 살고 싶지는 않다. <장자>에 나오는 신선들. 필요하긴 하다. 신선이 어렵지는 않다. 산에 가고 그러면 자기장이 바뀌어서 되는 문제.

184 페이지.
이슬람이 신과 인간 세계의 관계를 무화하려는 과정에서 두 가지 극단적 형태를 취한다. 1. 에로스의 길. 아라비안 나이트에 많이 나오는 모습. 정기를 잃은 남자. 다른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진(요정). 이 문화 안에 그런 요소들이 있다. 요정이라는 것은 천사. 그걸 만나서 자기의 세계가 해체되는 것. 강력한 자기장을 만나면 자신의 몸 자체가. 우주만 가도 중력체험이 다르다. 그럼 관념이 다를 것.
스페이스 카우보이. 지구에 있을 때의 번뇌가 사로잡지 않을 때 달라지는 인간의 모습.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천사의 존재. 무함마드에게 예언을 준 것이 천사. 천사란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것. 천사론을 체계적으로 쓴 게 토마스 아퀴나스. 천사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이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간은 영원한 유동의 시공간. 영원한데, 고정된 채로 영원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공간이 이밤. 현대철학/과학에서 천사는 뇌. 천사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차원에서 살지는 않는다. 요정과 천사는 공통적으로 중력이 없다. 중력은 장이 뒤틀렸을 때 갖게 되는 무게. 중력이 작동하는 물리적 시공이 변환되면 아주 미세한 진동만으로 변환된다. 그러면 전혀 다른 시공간, 이쪽도 저쪽도 아닌 시공간이 있는데 천사의 시공간이라고 한다.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카타스트로피의 점 같은 천사가 사는 시공간을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비슷하다.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 미세한 틈의 공간.
문학에서는 천사와 요정이 나온다. (신이 아니라). 그런데 이들은 정기를 빨아먹는다. 인간의 에너지를 빨아먹어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 광기와 연관. 또 예언과도 연관. 광기의 영역. 없는 영역이 아니라 뇌가 갈 수 있는 극한의 영역. 나카자와 신이치가 대칭성 사유를 말할 때 비슷한 것이 있다. 또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신곡>. 지옥에 있는 인간들이 겪는 것. 그곳의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 강력한 중력으로 작동하는 관계가 있는 곳이 지옥. 천사들의 자유는 어떤 관계하고도 중력의 관계로 작동하지 않는 것. 우리에게는 인력과 척력이 있다. 그건 강력한 힘들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있다. 천사란? 인간이 강력한 중력의 힘으로 관계하는 것은 서로 끌고 밀치는 게 가득해서 번뇌로 가득함을 아는 것. 이게 지옥. 그런데 천사는 중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천사는 중력 자체가 없기 때문에 중력과 관계하는 것과 다르다.
수피즘. 무화의 체험. 이건 내가 없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와도 달라붙지 않는 차원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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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중심점이 소실된 상태. 개념상으로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한없는 존재 유동. 자신을 흐름으로 느끼는 상태.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실존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런 체험을 통해서 신적인 기운과 하나가 된다고 하는 체험을 중시하는 게 수피즘. 그리고 그건 이상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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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쿠트. 천사적 세계 이야기가 나온다. 천사적 세계란 경험적 존재 질서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이 작동하지 않는 존재. 그럼 인간들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 냈을까. 종교학적으로 따지고, 뇌과학과 따져보면 결국 뇌의 극한의 영역. 일상세계가 무화되는, 뇌의 작용이 확 열리는 것. 차크라라는 것도 그런 것. 열리게 되면서 더 이상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 것.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는 너 나는 나라는 분별이 작동하지 않는 것. 그런 차원을 말하는 것.
어떤 종교성을 따지고 본다면. 엘리아데도 요가에 대한 책을 쓴 게 있다. 요가체험이 어떤 것인가 밝힌 책도 있다. 공통적으로 종교학자가 말하는 체험이란. 그런 체험이라는 게 인간의 의식 경계들을 확 넘어가는 체험. 의식이라는 건 분별이 되어 있다. 분별적 의식을 확 넘어가는 체험들이 몸의 배치가 바뀌는 체험과 연관이 되어 있다. 영성이라는 문제가 궁금할 때도. 영성이 뭔가. 이런 질문을 하면 안된다. 매번 다섯번 절하고 기도하는 게 있으니까 다른 게 있을 수 있다. 어떤 신체 동작의 훈련.
무예도 내가 싸울 때 갑자기 솜씨가 좋아지는 건 없다. 무예는 매일매일 해야 하는 것. 드라마에서 무사인데 맨날 연애만 하다가 싸울 때 기가 막히게 잘 싸우는 건 불가능. 무사는 매일매일 훈련을 해야 한다. 몸을 쓰는 훈련을 해야 정신이 바뀐다.
신비체험이라고 하니까 정신적인 것에 치중할 필요는 없다. 몸을 쓰는 차원이고 그 극한이 천사. 뇌가 열릴 때 마주하게 되는 감각하지만 여기 있는 건 아닌 것. 귀신도 마찬가지. 그리고 이걸 언어학적으로 풀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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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체험이라는 게 표층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일상적인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 눈이 두개 이런 표현. 프리다 칼로 그림도 '다른 것을 보는 눈'이 있다. 표층의식은 표층의식대로 가지만 표층의식을 심층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보관의 눈을 가진 체험이 하마다니의 구조. 다의적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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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니: 시니피앙에 대한 시니피에의 압도적 우월성.
서양에서는 시니피앙의 절대적 지고함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사랑. 사랑이 나타나는 여러 의미. 하지만 아무리 여러 의미라도 그걸 관장하는 건 시니피앙이다. 시니피앙의 절대성. 시니피앙의 지고성이라는 말이 있다.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
데리다 해체주의. 언어를 뭘 해체하는가? 시니피앙의 중심성을 해체하는 것. 시니피앙은 본질. 사랑이라는 말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단어. 아무리 다른 의미로 쓰여도 하나의 지고한 어떤 것으로 빨려들어간다. 팔루스, 로고스. 이게 서양의 이성 중심주의. 언어 중심주의라고 지금까지 서양의 사고체계를 결정지어 왔던 것. 이것을 데리다는 해체하려고 한다.
어떤 신비주의가 무엇에 대해 성립하는 것인가 이걸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신비주의라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힘으로서 있다. 지구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말 중심주의. 말인 동시에 이성, 합리적 사고. 합리적 사고는 말에 있따고 생각하고 말도 쓰여진 기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서양의 텍스트 중심주의를 낳은 것. 그런데 불교도 그렇고 수피즘도, 남미의 수련들은 말의 중심성을 해체한다. 합리적 중심의 이성을 해체하는 힘으로서 존재한다. 모든 문화들은 이런 게 다공존한다.
타자를 볼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로고스 중심주의로 환원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 안 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로고스를 해체하는 것. 그러나 신비주의는 시니피에가 압도적.
동양에서 텍스트 중심주의가 된 것은 송나라 이후. 그 이전만 하면 텍스트가 중심도 아니었고 모든 것은 말이었다. 그럼 언어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말과 글 중에 어떤 것이 더 사고에 가까울까? 글쓰기를 고민, 말하기를 고민하는 건 말과 글의 차원이 어떻게 다를까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쓰여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언어라는 게 어디까지를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으면 없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불교에서도 이슬람에서도 등등 모든 문화권에 다 있다. 그런데 이슬람은 수피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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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시나. 제1 원인으로서의 신. 그런데 신은 결국 로고스. 그런데 위를 보면 수피즘에서는 원인을 가지고 나아가는 게 아니라 무시간적 차원이라는 것을 상정한다. 무시간적 차원이라는 게 뭘까. 시간 바깥에 있는 차원이라는 게 있을까? 그건 신. 기독교도 모든 변화하는 세계 밖에 신을 놓기는 했지만 그 세계에와 수피즘은 다른 느낌. 무시간적 차원을 만든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를 갖게 할까. 수피즘이 궁금해졌다면, 이 사람들에게 경험이란, 세계란, 시간이란 무엇인가. 정말 철학적으로 덤벼들 수 있어야 장자의 신비주의, 불교의 신비주의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로 가서 철학적 사유를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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