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숙제방

이방인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10-25 14:04
조회
24
절차탁마 M / 이방인 에세이 / 171025 / 지은


파괴되는 뫼르소의 공백, 그 후 그가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회


공백에 대한 설명

뫼르소는 ‘속이 텅 빈’ 인물이다. 인생에 있어 특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의미부여를 하는 일도 없고(이 사람은 ‘소중하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 등),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는 사회가 정한 표상을 따라 살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는 의식도 없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해’라는 관념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하기 보다는 그 때의 자신이 피곤한 상황인지, 햇빛이 너무 내리쬐여 정신이 없다던지 등의 ‘현재 상황’에 따라 반응하기에, 때에 따라 사회적 척도와 맞지 않는 행동을 해 주위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살인을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왜 공백에 대해 설명하는가

뫼르소의 행동이 사회의 척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습이 비단 뫼르소만의 특성일까? 우리 모두는 사회적 관습이나 고정관념이 우리를 옥죄여 온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않던가? 청년은 꼭 열정적이어야 한다던지, 남자는 울면 안된다던지 하는 통념들에 꼭 들어맞지 않은 경우들 말이다. 뫼르소가 특별해 보이는것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회적으로 ‘매우 슬픈’ 상황에서도 사회적으로 ‘꼭 느껴야만 하는’ 감정을 절대 쥐어짜내지 않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공백은 사회가 요구하는 ‘잉여 감정’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파트 1: 뫼르소의 개인관계. 누구와 조우하는가?

뫼르소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그들 또한 어떠한 ‘공백’이 있다. 레이몽은 자신의 애인을 잃었으며(혹은 내쫓았으며), 살라마노의 개는 그를 떠나버렸다. 뫼르소의 애인 마리 또한 결핍이 있는데, 뫼르소에게 결혼하자고 요구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 결혼이 부재한 공백을 가지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공백을 메꾸려 그들은 뫼르소와 관계를 맺는다.

반면 뫼르소의 다른 이웃들이나 직장의 상사는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이웃들은 뫼르소가 그의 어머니 생전에 그의 집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효자’라고 생각하고, 직장 상사는 뫼르소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전근을 갈 수 있는 기회도 굳이 마다하는 ‘야망 없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웃들과 직장 상사의 공통점은 그들은 사회적 통념에 의해 뫼르소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뫼르소의 공백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파트 2: 법정에서의 뫼르소

법정이 판단하는 뫼르소는 그의 이웃들이나 직장 상사처럼 사회적 통념과 관습의 최고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가 개인의 유죄 여부를 판단하는 곳이기 때문에 무죄를 증명하려면 ‘사회적’으로 납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러한 사회적 표상이 작용할 공간이 없다. 뫼르소의 이웃들과 직장 상사는 뫼르소를 그저 판단하고 넘어갈 뿐이지만, 법정에서는 뫼르소를 판단하는 것을 넘어 그 존재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뫼르소의 공백을 그냥 놔둘 수는 없다. 따라서 법정은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충분한 슬픔’을 보이지 않은 뫼르소에게 사형을 내림으로써 그의 공백을 파괴한다.

뫼르소의 죽음

사형을 앞두기 전 뫼르소의 공백은 자타를 나누는 경계로 작용했다. 사회적 통념이 스며들지 않는 그의 영역은 타인이 드나들거나 사회가 파괴할 수 있었지만 그 공백의 존재 자체는 뫼르소의 고유의 것이었다. 사형선고로 인해 사회와 그를 나누고 있었던 공백이 사라지면서 뫼르소는 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사형 구경을 갔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는 이제서야 아버지가 왜 그것을 보러 갔는지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죽음’ 외에 인간이 신경쓸 것은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이 죽음 외에 인간이 의미부여하는 신, 가족, 친구, 동물 등은 그저 허상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는 이러한 표상들에 매달려 살아가며 뫼르소를 마음대로 재단했고, 그것이 사형선고까지 이어졌다. 뫼르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회와 끝내 불협화음하는 그 자신을.

뫼르소가 사회와 불화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는 사회와 섞인다. 그는 세계의 무심함과 그의 공백이 동류라고 느끼고, 그 자신 또한 그 무심함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사회가 그에게 내린 사형이라는 폭력이, 그 세계와 끝내 화해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적극적으로 그 사회를 받아들인다. 뫼르소는 사형대에 오르는 순간 군중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그를 맞아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신의 공백을 파괴하는 사회 속 그를 온몸으로 감각하기 위해.
전체 1

  • 2017-10-27 14:38
    뫼르소가 자연과 사회의 대립선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사회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고 보았네요. 그런데 뫼르소와 공백과 사회의 공백을 실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예를 들면 법원의 변호사와 신부가 그 텅빈 표상을 어떻게 붙드는지, 그것과 뫼르소의 '무의미 추구 의식'을 더 견주어봐야 겠습니다. 위에서 정리한 논리의 구멍을 다시 정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