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과제

우상의 황혼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5-07-29 13:37
조회
741

2015.7.29 절차탁마 - 니체, 우상의 황혼 - 수영

진짜 잔인한 것

독일의 ‘상급 학교들’이 사실상 달성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잔인한 조련으로서, 이것은 시간의 손실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면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국가의 봉사에 이용할 수 있도록,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독일 문화의 하강은 무엇 때문인가? ‘고등교육’이 더 이상 특전이 아니고 - ‘일반적’이고, 공통적으로 된 교양의 민주주의라는 점 때문이다…… (...) 우리의 ‘상급’ 학교들은 모두 교사나 교과 과정이나 교과의 목표상 가장 애매한 평균성을 지향한다. 그리고 만일 23세의 젊은이가 아직 ‘준비 완료’ 되어 있지 않아, 어떤 직업을?이라는 ‘핵심 문제’에 아직 대답을 못하는 경우, 마치 무엇인가가 소홀히 되었다는 듯이 생각하는 점잖치 못한 성급함이 도처에서 지배하고 있다 -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급한 인류는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서두르지 않으며, ‘준비 완료’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37)

‘준비 완료’라니, 생각만 해도 싫은 말이다. ‘준비 완료’, 그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대체 무엇을 위하여 우리는 ‘준비 완료’같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고등 교육을 받고, 유능해지는 것, 이에 대해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결국 ‘이용하기 좋은 인간’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독일의 소위 ‘고등 교육’이 만들어내는 ‘고등 인간’이란 실상 ‘평균인’이다. ‘평균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일반적’이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옳음, 일반적인 기준의 ‘뛰어남’ 속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 유일한 과제가 된다. 하여 ‘공통적으로 된 교양의 민주주의’ 속에 편입될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국가라거나 사회, 학교 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딴지걸기는 쉽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는 저 ‘평균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나는 이 사회, 우리의 무리에 해롭지 않다’, ‘나는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다’, ‘나는 우리 무리에 유용하다’, ‘나는 무리에 받아들여질만한 인간이다.’ 이런 말들이 생각난다. 우리의 수많은 행동들을 추동하는 것은 실상 저와 같은 목소리인 것 같다. 한 사람이 어떤 특별한 자질을 발휘할지언정 결국 타인에 의해 평가되어져야 하고, 무리로부터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는 잘 해봤자 잘난 노예일 것이다. 우리 존재성은 여전히 사회적인 도덕‧가치, 타인의 시선, 주어진 어떤 권위의 획득 따위를 통해서만 겨우겨우 증명되곤 한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런 증명을 필요로 한다. 그런 채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의 시대는, 지금의 우리 가족이나 학교나 사회는 겉보기에 분명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가난해지든 백수가 되든, 혹은 직장을 갖고 돈을 많이 벌고, 혹은 직장을 그만 두고 갖가지 여행지를 떠돌든, 결국은 각자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자기’를 무한하게 펼칠 권리이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 ‘개인의 자유’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끊임없이 불안하고 두렵다면, 이것은 무슨 일인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방식이든, 유용한 인간으로서 승인받기 위한 열정, ‘나’를 증명하고자하는 강박, 이런 것들이 나를 좌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어느 누구도 인간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도 아니고 사회도 아니고, 인간의 부모나 선조도 아니며, 인간 자신도 자신의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그런 상황과 바로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책임이 없다. (...) 그는 특정 의도나 특정 의지나 특정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와 함께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에 이르려는 시도는 하게 되지 않는다-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넘겨주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니까. ‘목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다 : 사실 목적이라는 것은 없다…… (123)

자기 자신에 대해 결코 대상화하여 알 수 없는 인간이 오만하게도 자기에 대해, 인간에 대해 ‘객관적’이라는 척도를 말하고자 한다. 도덕은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해롭고 잔인한 것이다. 왜냐, 그 때 존재는 일단 ‘죄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절대적 평가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는 일단 ‘무구한 것’일 수 없기 때문에. 갖가지 관계 속에서 갖가지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은 ‘절대적 평가’에 대한 믿음 속에서 늘 일단 불안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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