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니체 3주차 후기

작성자
동글
작성일
2017-08-13 17:07
조회
147
짱짱하던 더위가 입추를 지나니 아침은 선선한 바람을 준다. 오전에는 조별 토론을 하는데 우리 조는 셋은 같은 《연민의 정이 깊은 자들에 대하여》에 대하여 썼고 나는 《타란툴라들에 대하여》를 썼다. 같은 글에 대한 다른 시각이 재미있고 신선했다.

채운샘과 수경샘이 차려주신 맛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졸음에 대비해서 차를 준비하고 둘째시간을 맞는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3교시.

이번엔 부교재로 니체의 [우상의 황혼]을 읽었다. 우상의 황혼에서 본 부분은 (철학에서의 ‘이성’)과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우화가 되어버렸는지)를 읽었다. (철학에서의 ‘이성’)에서 형이상학철학자들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역사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고, 둘째 생성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한 그들의 증오. 셋째로 어떤 것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탈역사화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영예롭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 이집트주의이다. 철학에서는 ‘이성’에 우위를 두고 육체(신체)를 버리는 방식으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매순간 변하는 감각을 믿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학문은 감각의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형이상학이나 인식론, 수학은 섬세한 관찰도구인 감각을 배제함으로 학문이라 할 수 없다. 또 철학자들은 최후의 것과 최초의 것을 혼동하여 자기원인인 신을 창조하고 그 개념을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는 오류와 가상의 문제이다. 이성의 편견이 우리를 오류에 빠지게 한다. 오류는 언어로 규정해서 부적합한 관념을 형성해가기도 한다.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우화가 되어버렸는지)에서는 철학사에 대한 요약이다. “나, 플라톤이 진리이다”인 플라톤적 철학과 관념이 정교하고 위험해지고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적인 중세철학과 관념이 승화되고 창백해지고 코니히스베르크적인 관념주의와 이성의 첫 하품이라 할 수 있는 실증주의와 니체가 살던 시대 즉 밝은 날, 아침식사, 플라톤의 무안해서 붉어진 뺨, 모든 자유정신들의 야단법석인 니체의 자유정신. 그리고 참된 세계와 함께 가상세계도 없애버린 규정성을 없애버리고 선과 악을 새롭게 만들어 버린 차라투스트라의 등장.

니체의 힘의지는 이성이고 의욕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해석의 주체가 힘의지이다. 신체가 힘의지이다. 힘의지에는 이성, 욕망, 충동, 본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힘의 느낌이 중요하다. 힘의 본성이란 발산이다. 그것이 가치평가다. 힘 자체의 능동성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산한다. 우리는 수동보다는 능동에 매료된다. 그래서 우리는 찌질 하고 착한 사람보다 악마에 더 매료된다. 힘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신체가 사물 자체다. 세계는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다양성이다. 세계는 계속 생성, 변화중이다. 하나에 대한 다양한 평가로 세계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다양성 자체가 세계다. 힘의지 안에 있는 다양성은 차이 자체다. 신체의 정직성을 믿어라. 신체가 대지다.

 

내가 관심이 많았던 타란둘라의 장. 채운샘은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평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고 말씀하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득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소득분배 문제를 가지고 있다. 기회와 소득의 평등에 대한 문제. 우리는 평등을 똑같아야 한다고, 출발점이 같아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 결과에 따른 불평등에 대한 문제는 또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제도적으로 해결해야할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제도를 보안해 나가면 불평등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그 평등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문제가 없을까? 과연 북유럽 복지국가인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만족하고 살고 있을까? 채운샘 말씀으론 그곳에 사는 사람도 유투브에 헬○○○이라며 못 살겠다며 영상을 올렸다고 한다. 다 자기가 사는 곳은 지옥이라고 하나보다.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다면? 전제가 맞나? 한번 확인해보아야 한다.

동양에서는 평등을 자기의 위치에서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자기 수준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부자는 곳간을 푸는 것이 도리이고 가난한 자가 효도한다고 빚을 얻어 장사를 지내면 도리가 아니다. 니체가 비판하는 균질적인 평등개념을 근대가 만들어냈다.

전근대 즉 근대 이전은 사람의 평가 단위가 평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너희는 다 추상화 될 수 있어’라고 하는 평등을 말한다. 선거권도 한표, 너희의 노동도 딱 척도화된 화폐로 교환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노동력을 추상화할 수 없다. 그런데도 노동력을 추상화해서 물건 단위든지 시간단위로 나눠 노동을 추상화했다. 노동을 화폐로 교환할 수 있게 했다. 기계화된 작업장에서 만들어지는 상품은 개인의 능력과는 관련이 없다. 수량화와 추상적 노동시간의 균질화를 통해서 균질적 평등 개념이 만들어 졌다. 평등은 원하면 끝이 없다. 평등 개념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등에서 추상적인 척도를 버리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생명에 대해서는 평등이란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니체는 이 부분을 비판한 것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제나 혁명가를 타란툴라다. 사람마다 욕망이 다 다르다. 똑같다고 주장하는 도덕은 천민이다.

니체는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고 평등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을 듣고 불평등과 평등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말이 훅 치고 들어온다.
전체 3

  • 2017-08-14 02:18
    타란툴라 어렵지만 재밌었던 장이죠. 확실히 텍스트는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걸 실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 조별토론에서 재밌었던 건 타란툴라를 적으로 '인정'하는 짜라투스트라의 태도였죠. 적이 될 수 있다는 건 친구도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약자, 평등을 외치는 자들과 섞이지 않으려 했던 짜라투스트라의 행동으로는 보기 어려웠죠. 나름 결론을 내렸던 건 타란툴라 같이 평등을 외치는 자들과 같이 살아간다면 그들의 독을 기꺼이 받지만 평등을 외치는 독에 굴복하지 않는, 하나의 수련(?)이라는 것이었죠. 다음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 2017-08-14 09:08
    '타란툴라들에 대하여'는 저도 재미있게 읽은 글이에요. 자신의 무력감으로 인한 폭군적 광기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내리는 앙갚음이라는 말이 쇼킹했죠.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7-08-14 16:11
    망치를 든 철학자라니? 울끈불끈 근육질 남자가 떠오르네요. 마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