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숙제방

8주차 장자 메모 초고

작성자
소정
작성일
2021-05-03 18:30
조회
40
무엇으로부터의 소외를 말하는가                                                                         (소정)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적 대응은 문명초기 인간이 불을 사용하고 도끼를 만들면서부터 자연을 불태우고 땅과 동물과 식물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대립해왔음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인간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소외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활동, 즉 신화라던가, 이성적 고찰 등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소외는 근대의 산업문화에서 되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는 전기불의 발명으로 고양되었는데 몇 십만 년 동안의 구석기 시대부터 유지하던 인생의 절반을 잠의 패턴과 함께하던 밤을 불과 100여 년 만에 제거한 것이었다. - 물론 전기불이 없었을 때도 해가 지면 등잔불에 의지하거나 화톳불에 의지하여 첫 번째 잠과 두 번째 잠사이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잠의 사생활) -

 

1) 잠으로부터의 소외

밤이라는 어둠을 환히 밝히는 전기불은 그야말로 <장자>에서 말하는 하늘의 도리를 완벽하게 버리고 인간에게 밤이라는 외물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밤을 몰아낸 성공으로 인하여 현대의 ‘지구는 중단 없는 일터, 또는 무한한 선택지와 과제와 선정물과 딴 짓거리가 있는, 즉 열려 있는 쇼핑몰이 되었다. 또한 현재를 생산하기, 소비하기, 폐기하기가 쉬지 않고 이뤄지는 그리하여 삶의 소진과 자원의 고갈이 재촉되는 상태를 만들었다.(24/7 잠의 종말 36)’ 더 나아가 ‘잠에 대한 모든 침해는 우리가 잠을 돈 주고 사야만 하는 불면의 상태를 만들어내었다.(24/7 잠의 종말 36)’ ‘불면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으나, 타인의 현존을 위한 공간에 대한 그 어떤 명확한 감각도 제공하지 않는다. 불면에서 우리는 인도적으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마주한다.(24/7 잠의 종말 39)

“우리가 정말로 소비사회의 구성원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세계 안에 살지 않는 셈이고, 언제까지나 반복되는 주기 속에서 물건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어떤 과정에 쫓길 뿐이리라” ‘아렌트는 공적인 삶과 일의 영역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외의 경험이라는 점도 역시 알고 있었다.(24/7 잠의 종말 43)’

우리 자신의 현재의 맥락에서 잠이 사회적인 것의 지속 가능성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 잠이 사회가 자신을 방어하거나 보호할 수 있는 다른 문턱들과 유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가장 사적이며 가장 취약한 상태로서 잠은 자신의 유지를 이해 사회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24/7 잠의 종말 48)

원기를 회복시키는 잠의 무사태평함을 위해서, 두려움에서 해방된 상태의 주기적 막간을 위해서, 잠시 “악을 잊음”을 위해서 타인의 보호에 의존하는 것은 결정적이다. 잠에 대한 침해가 심각해짐에 따라, 잠자는 자에게 필수적인 고독이 더 즉각적으로 명백하고 극심한 형태의 사회적 고통에 요구되는 보호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24/7 잠의 종말 53)

사람들이 무진장하게 제공되는 유혹과 유인에 언제나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 24/7은 동질화, 쓸데없는 중복, 가속화의 과정을 통해 시각을 무능하게 만든다. 숱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지금 진행 중인 것은 정신적·지각적 능력의 확장이나 조절이 아니라 그 축소다.(24/7 잠의 종말 63) 이에 반하여 장자는 인간의 정신적·지각적 능력을 확장시켜 자신을 둘러싼 유혹과 유인을 벗어던지고자 하였다.

 

“아니다, 내 어찌 싫어하겠는가. 내 팔이 차츰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난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겠네, 내 오른팔이 차츰 변하여 활이 된다면 난 그것으로 올빼미를 쏘아 올빼미구이를 만들겠네, 또 내 엉덩이를 변하게 하여 수레바퀴를 만들고 내 마음을 말로 만들면 난 그것을 타겠네. 어찌 다른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무릇 생을 얻음은 시이고 잃음은 순이다. 시에 안주하고 순에 따르면 애락도 끼어들지 못한다네. 이것이 이른바 옛사람이 말한 懸解이다. 그런게 스스로 풀지 못하는 것은 외물이 이를 묶기 때문이다. 또한 외물이 하늘의 도리를 이기지 못함이 오래인데 내 어찌 이렇게 된 것을 싫어하겠는가. <장자> 대종사

 

이성을 가진 인간은 여기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하기에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함으로 懸解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37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의식의 대전환, 즉 일종의 개종에 인도되는 정치라야 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궁극적으로 부인할 수 없고, 인간성의 피폐와 환경악화를 막을 수도 없다.

 

2) 감각으로부터의 소외

스티글레르는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보살피는 데 필수적인 “근원적 나르시시즘”의 파괴가 진해되고 있다고 결론지으며, 수많은 대규모 학살/자살 사건을 이런 널리 퍼진 심적·실존적 손상의 불길한 결롸로 제시한다. 그는 문화적 경험 속에 특이성을 재도입할 만한, 그리고 어떻게든 욕망을 소비의 절대적 요구에서 분리시킬 만한 대항 제품을 만들어낼 것을 긴급하게 요청한다.(24/7 잠의 종말 87)

‘현대 기술의 성취는 죽음의 현실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자기주장의 표현으로서 주어진다. 오늘날 임종에 임박한 사람들을 병원에 입원시켜 온갖 첨단기술의 도움으로 단지 몇 시간, 며칠이라도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적 태도에 말미암는다.(간디의 물레, 35)’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욕망할 줄 알아야한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것은 장자에서 말하는 무위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50년대에 텔레비전에 대대적인 보급은 시장이 이전까지 병합되지 않았던 시간과 공간을 점유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 브라운관은 어떻게 해서 교류가 이뤄지는 공공세계의 섬광과 잡담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 침투하고, 아렌트가 정치적 개인의 존립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고요와 고독을 오염시키는지 보여주는 결정적이고 생생한 사례였다.(24/7 잠의 종말 127)

텔레비전이 몰고 온 수많은 혁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예전에는 덜 직접적인 통제 형태에 종속되었던 삶의 영역에 동질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부여한 점이다.(24/7 잠의 종말 127)

텔레비전은 세계의 허구성을 육화했지만, 또한 어떤 ‘진실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위치도 없애버렸다.

현대 사회에서는 보고, 느끼고, 맛보는 퍼스널리티가 제거되었다. 퍼스널리티는 개체들마다의 다른 시선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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