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0816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8-10 16:48
조회
120
“우리는 참된 세계를 없애버렸다 : 어떤 세계가 남는가? 아마도 가상 세계?……천만에! 참된 세계와 함께 우리는 가상 세계도 없애버렸다.”(『우상과 황혼』,「어떤 오류의 역사」中 )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니체의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니체를 읽기 전), 저는 거칠고 위험한 반항아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신을 죽이고, 도덕의 허위를 까발리고, 모든 기만적인 신념들을 해체하는 예리한 정신의 염세주의자.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니체의 반쪽밖에는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니체의 망치질은 파괴인 동시에 창조입니다(“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무섭게 때려 부순다. … /나는 저 형상을 완성하고자 한다”). 교조적 비판자인 반항아는 참된 세계 대신에 가상 세계를 믿을 것입니다. 무無를 신봉하는 방식인 것이지요. 그러나 니체는 가상과 허무를 신봉하는 대신 실재와 가상의 구분자체를 넘어가버립니다. 불멸, 완전, 부동, 유일을 자임하는 실재(“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에 가하는 니체의 망치질은 거대한 다양성으로서의 세계를 해방시킵니다. ‘유일’이 제거된 자리에는 허무만이 남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해석들과 느낌들이 꿈틀거립니다.

니체도 스피노자도 신체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것은 정신과의 구분 속에서의 신체가 아니라, 초월성(‘배후 세계’, ‘저편의 세계’, ‘천상’, ‘신’)과의 대립 속에서의 신체입니다. 채운샘이 설명해주신 바에 따르면, 신체성의 강조는 세계를 가치평가 하는 기준을 삶 바깥에 두는 방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끊임없이 세계를 해석하고 가치평가하는 과정입니다. 신과 같은 불멸하는 것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더-이상-의욕하지 않기, 더-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를 원하는 '피로감'의 표현일 것입니다. ‘천상’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무엇보다 끊임없는 해석과 가치평가의 과정으로서의 삶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삶 속에서 삶을 부정하고, 신체로서 신체를 비방하는 일이죠. ‘천상’의 자리에는 많은 것들이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평등’이라는 형태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느낌들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느낌’이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겠죠. 우리 안에서 ‘유일한 나’로 수렴되지 않는 모든 것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요? 채운샘은 니체가 종종 이야기하는 ‘고독’이 단순히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것도 의지처로 갖지 않는 시간”이라고 풀이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책하고 명상하고 글을 쓸 때 고독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어쩌면 고독 속에 있을 때, 다시 말해 의지처를 움켜쥐는 힘이 약해져 있을 때 느낌의 해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채운샘은 공통과제 쓰는 시간을 고독의 시간으로 삼을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2부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이번 주 후기와 다음 주 간식은 현숙샘과 영님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까지 『우상과 황혼』 참고할 만한 단편들을 스캔해서 올리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 2부와 같이 읽어오시면 됩니다(다만 과제는 차라투스트라를 중심으로 써오시라는 채운샘의 당부).
전체 2

  • 2017-08-11 15:35
    건화가 개미가 되었네. 베짱이인듯 개미인 듯.
    평가는 창조에 기생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평가 역시 창조였네요. 니체 수업을 통해 내 안의 질서들이 마구마구 뒤집어지고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면 좋겠네요.

  • 2017-08-16 06:34
    세계 밖에 신체를.둔 적은 없는데 그렇다고 피로하지.않게 신체를 두지도 않았다는 느낌이... 언제부터일까요 삶에 이런 피로를 느낀게...아련한 과거 속에선 언제나 활력이 있었던 듯한데..아마 삶에 웃음이 줄어들기 시작한 때인듯요...피로의 삶 대척점에 가벼운 삶이 있다면 그건 평가와 해석이 가벼워지는 지점이 될듯요~^^